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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Apr 13. 2023

꿈을 찾아 산에 오르다.

    

우리 민족은 등산에 미쳐있다.

히말라야를 등정해도 끄떡없는 최고급 등산복을 입고 높은 산, 낮은 산 할 것 없이 오른다.     


산이 많다고 산을 오르지는 않는다.

이유가 반드시 있다.

심마니나 사냥꾼이 산을 오르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함이다.

생존이나 경제활동과 무관하게 산을 오르는 것은 종교 행위, 정복, 탐험, 군사 밖에는 없다.     


사람들은 왜 산에 가는 것일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산이 거기 있으니 오르는 걸까?

    

“고려나 조선 시대 사람들도 산을 좋아했을까?”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네.

산은 호랑이나 뱀, 승냥이, 곰, 늑대처럼 사나운 짐승이 있는 위험한 곳이고, 자칫 길을 잃어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네. 일반 백성들이 산을 오를 이유는 없다네.”

    

“유명 사찰은 깊은 산속에 있으니, 이를 찾기 위해 산을 오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지금과 달리, 고려 시대 절간은 대부분 도심 한가운데 있었고, 조선 시대 산중 절간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네. 설령 찾는다고 하더라도 등산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공자님 말씀이 있지 않은가.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여 산과 물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라네.”

    

“중국의 유명 문인 중에는 명산을 찾아 유람했다고 하네. 일생에 한두 번 정도의 특별한 행동이었지. 고려나 조선 시대에 뱃놀이하고 개울에서 탁족을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등산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인가?”     


“조선 기, 명나라가 망하자 선비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네. 오해하지 말게. 명나라가 망해서 통곡한 것이 아니라 유학의 전통이 끊어졌기 때문일세.

조선은 250여 년간 유학의 삶을 이어왔다네. 유학이 없는 선비나 조선은 생각할 수도 없었지. 그래서 끊어진 유학의 전통을 조선이 계승해야 한다고 여겼지. 이런 생각을 체계화한 것이 소중화(小中華) 사상일세.

아무튼, 졸지에 조선은 세계 철학의 중심 국가가 되어버렸다네.”     


“조선이 유학의 중심지가 된 것과 등산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요지연도 8폭 병풍/경기대학교 미술관 소장.

곤륜산에서 서왕모와 주나라 목왕이 연회를 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왼쪽에는 천도복숭아를 얻기 위해 신선들이 곤륜산을 찾아오는 장면이다. 곤륜산은 유학문화의 성지같은 곳이다.]     


“종교의 천국이나 극락 같은 곳처럼 유학에도 이상세계가 있었네.

중국의 곤륜산이 그런 곳일세. 곤륜산은 서왕모와 주나라 목왕이 만나 연회를 한 곳이면서, 모든 신선이 천도복숭아를 얻기 위해 찾는 곳이라고 하네. 이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 [요지연도, 瑤池宴圖]일세.

아무튼, 곤륜산은 전설 속의 산이네. 사람들은 쉽게 범접하지 못하며 괴이하게 생긴 산을 곤륜산이라고 여기고 찾아다녔지.”      


“곤륜산을 유학의 성지(聖地)로 여겼단 말이군. 당시 선비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비하했는데, 오랑캐가 지배하는 중국 땅에 곤륜산이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겠군.”     


“정확히 짚었네. 유학의 중심지가 된 조선에 곤륜산을 옮겨와야 했지.”


“곤륜산을 옮긴다고?”     


“진짜 옮긴다는 말은 아닐세. 그보다 편한 방법이 있지. 바로 조선에 곤륜산이 있다고 우기는 거지.”   

  

“조선에 곤륜산과 닮은 산이 있는가?”     


“어차피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상상의 산일세. 왕을 비롯한 조선의 주류 세력이 곤륜산이라고 하면 그리 정해지는 것이지.”     


“그게 어떤 산인가?”   

   

“금강산일세.

백두산이나 묘향산, 칠보산과 같은 명산을 두고 금강산을 지목한 것은, 한양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네.

아무튼, 금강산을 곤륜산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치밀하게 준비하고 실행했지.     

일단 유언비어를 퍼트렸네.

중국 신화에 나오는 봉래산이 조선에 있었다~, 진시황이 불사약을 찾기 위해 조선 땅에 왔다~, 중국의 서왕모는 조선의 마고할미이다~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밑밥을 깔았지.    

그런 다음, 청나라에서 수입한 [해학반도도]를 대량으로 창작했네. 궁궐을 장식하고 한양뿐만 아니라 전국의 지방 관청에 내려 보냈지. 조선 화원의 붓질로 그린 [해학반도도]의 풍경은 마치 조선 땅을 보는 것 같았지.”

[해학반도도 10폭/디지털그림/심규섭/2023년. 해학반도도는 요지연도를 간략하게 그린 것이다.]  


“내막을 모르는 백성들은 조선을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겼겠구먼.”    

 

“아직 마지막 결정타가 남았네.

선비 화가였던 겸재 정선의 등장이었네.

겸재는 당시 지배정당이던 노론세력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네.

은밀하게 겸재를 금강산으로 파견했지. 겸재는 몇 달 동안 금강산 구석구석을 직접 등반하고 다녔네. 한양에 돌아와 직접 느낀 감흥과 사생 그림을 바탕으로 여러 금강산 그림을 완성했다네.”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가?”      


“겸재의 금강산 그림은 정부와 노론세력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대박이 나고, 겸재도 하루아침에 유명 화가가 되었지.”     


“그림 때문에, 금강산이 곤륜산으로 바뀌었단 말인가?”

    

“조선의 선비들은 양심이 있었네. 아무려면 금강산이 곧 곤륜산이라고 우겼겠는가. 신선과 선녀가 사는 신선 세계로 인식하는 정도로 이해했네.

하지만 겸재는 만족하지 않았네. 갑자기 낮은 벼슬인 음양과에 들어가 주역과 천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

이를 바탕으로 금강산 그림의 완전판인 [금강전도]를 완성했다네. 이 작품은 금강산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네.”  

   

“금강산에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겸재 정선/금강전도/종이에 담채/94.1*130.7㎝/조선 후기/삼성 리움미술관 소장]  

   

“금강산에 우주 전체를 그려 넣었다네.

좌우로 나눈 금강산에 나선 모양의 암산과 토산을 그렸지. 원형 구도 속에 밀어 넣은 토산과 암산은 영락없는 태극이었네. 금강산이 끝나는 윗부분에는 우주 본연의 색인 청색을 뿌옇게 칠했네.

조선의 금강산은 우주를 품고 새롭게 태어난 것이지. 세상의 어떤 화가도 표현하지 못한 세계를 겸재가 해내었다네.

이제 금강산은 곤륜산의 아류가 아니라, 그 자체가 되었네.”   

  

“어쨌든 산에 오를 수 있는 미학적 명분과 사회적 가치가 만들어진 것은 확실하군.

이후 사람들은 금강산을 보기 위해 몰려갔겠구먼.”

    

“아닐세. 막대한 비용과 몇 달씩 걸리는 금강산 등반은 쉽지 않았네.

한 평생 소원이 금강산 유람이라고 할 정도였다네.”  

   

“산을 오르고 유람하는 일이 부자나 권력자만이 누리는 특권이라니, 이해하지 못하겠군.”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네.

금강산으로 한정되었던 신선 세계가 조선팔도로 확장된 것이지. 여기에 불을 지핀 화가가 바로 단원 김홍도라네.

관동 팔경이나 단양 팔경 같은 명승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자, 단원 김홍도는 팔도의 명승지를 진경산수화로 그리기 시작했지. 단원의 명승지 그림이 인기가 높아지자, 많은 화원이 따라 하기 시작했네.

단원 김홍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그림에 녹여내었지. 가까운 명승지를 금강산 부럽지 않게 멋있게 그려내었다네.

몇 달 걸리던 유람 기간을 10일 정도로 줄이면서도 신선 세계를 유람할 수 있는 높은 가성비 문화를 창조한 것이지.”         

[단원 김홍도의 진경산수화. 오대산 월정사와 단양의 옥순봉, 사인암처럼 조선 팔도의 명승지를 화폭에 담았다.]


“명승지를 유람하려면 반드시 산에 올라야 하는가?”     


“명승지가 높은 산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크고 작은 산을 끼고 있기 마련이지. 무엇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의 쾌감을 마다할 사람은 없지.

산을 등반하고 내려와 경치 좋은 골짜기에서 술과 음식을 먹는 문화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네.”   

  

“홀로 유람하는 사람도 있었나?”  

   

“별로 없을 것이네. 작게는 대여섯 정도, 많게는 50여 명 단위로 유람을 즐겼네. 개인적 놀이가 아니라 사회적 풍류였기 때문이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명승지를 유람하고 산을 오르는 목적은 뭔가?”

    

“꿈을 찾고 확인하는 행위였다네. 금강산과 같은 명승지는 신선 세계를 의미했고, 신선 세계는 정치적으로 태평성대였다네. 그런 세계에 들어가 즐거움을 만끽할수록 태평성대를 빨리 이룰 수 있다고 여긴 것이지.”    

 

“성지 순례와 비슷한데?”

    

“즐거운 성지 순례였다네.

양심을 지켜 사회에 공헌한 사람을 모아 조직적으로 산에 오르고 유람을 시켰다네.

이를 사회적 풍류라고 했지.”         

[신윤복 풍속화. 명승지가 아니라 동네 유원지를 그렸다.]    

 

“명승지도 가기 어려운 사람도 있지 않은가?”  

   

“당연히 있겠지. 이런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혜원 신윤복이었다네.”  

   

“화원과 그림이 해결사 역할을 하는군. 도대체 이유가 뭔가?”

    

“당시 화원의 그림은 미디어, 유튜브, 카톡과 같은 SNS 역할을 했다네. 조선은 그림으로 정치를 한 나라였네. 그만큼 그림의 위력은 대단했네.

아무튼, 단원 김홍도가 조선 팔도의 명승지를 그렸다면, 혜원 신윤복은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동네 유원지와 동산을 그렸네.”    

 

“사람들이 마을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는 말인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점심만 챙겨 뒷산과 경치 좋은 골짜기를 유람하기 시작했지.

이로써 조선 땅 구석구석은 신선 세계가 된 것이네.”   

  

“정리하면, 겸재 정선은 금강산 그림을 통해 등산의 가치와 명분을 만들었고, 단원 김홍도는 조선 팔도 명승지로 확장시켰으며, 혜원 신윤복은 당일치기 등산도 가능케 했다는 말이군.”

     

“산에 가서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하루 종일 노는 문화가 오랫동안 이어졌다네.”   

   

“조선이 망한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나?”   

  

“더 이상 산에 가지 않았네.

대신 대도시와 휴양지를 찾았다네. 그곳에 꿈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세.”  

   

“요즘, 많은 사람이 등산을 즐기는 이유는 뭔가?”  

   

“대도시와 휴양지는 사람을 끊임없이 소모하고 상처를 준다네.

잠깐의 눈요기를 미끼로 허영과  탐욕을 자극하지.

열등감과 소외, 갈증은 필수 덤으로 따라오지.


이를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선택지가 산이라네.

마음을 치유하고 삶의 활기를 얻기 위해,

어쩌면 진짜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산에 오르고 또 오르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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