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하고 어수선하던 세상을 휘청거리며 걷던 젊은 시절,
[단원 김홍도展]을 한다는 전시장에 갔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렸기에 우리 전통그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미술교과서에 나오는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하물며 손바닥 만 한 풍속화를 잘 그렸다고 알려진 김홍도에 대한 기대는 애당초 없었다.
당시 미국을 위시한 서양문화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조선시대와 같은 우리 역사는 침을 뱉으며 경멸해야만 직성이 풀리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선입견 때문인지 다양하고 수많은 김홍도의 작품이 전시되었지만 기억나는 작품은 없다.
딱 이 작품 빼고는.
[김홍도/을묘년 화첩-해암호취도/1795년/수묵담채/23.2*27.2/개인소장. 어려움 속에서도 양심을 지키는 강인한 선비, 군자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커다란 충격에 빠졌고 몸이 굳은 것처럼 한동안 작품 앞에 서 있었다.
10호 화폭보다도 작은 그림이지만 내게는 어떤 대작보다도 웅장하게 각인되었다.
작품의 뜻은 단번에 알아 차렸다.
바다는 거친 세상이며, 울퉁불퉁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는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이고, 독수리는 의지를 가진 사람의 의인화라고.
그림과 나는 금방 공명했다.
망망한 바다와 거친 파도는 나의 현실이며, 바위는 그 속에서 지쳐버린 나의 심신이었으며, 독수리는 나의 양심과 청춘과 같았다.
이 작품은 내게 큰 위안에 되었고 힘을 주었다.
이후 내가 우리 전통그림에 꾸준한 관심으로 가지고 관점을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작품의 연원을 굳이 찾으라면,
김홍도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화원 정홍래의 [욱일취도]에 있다.
정홍래는 숙종 연간에 활동했던 궁중화원이었다.
[욱일취도]는 거친 바다에 바위가 있고, 그 위에 매나 독수리를 표현한 그림이다.
[정홍래/욱일취도(旭日鷲圖)/118.2*60.9/견본채색/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차이가 있다면 아침 해의 유무이고, 다소 큰 비단 화폭에 꼼꼼한 필선과 채색을 한 [욱일취도]와 작은 화지에 수묵과 엷은 색으로 칠한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내용은 동일하다.
[해암호취도]는 여러 그림을 묶은 화첩(畫帖) 속에 있다.
이 화첩 속의 그림은 대부분 훼손, 분실되었고 3점만 전한다.
이 화첩은 김경림에게 그려 주었다고 한다. 당시 김홍도는 50세였다.
김경림은 역관 출신으로 당시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부자였으며 소금장수를 해서 큰돈을 벌었다고 전한다.
김경림에 관한 평가는 비판적이다.
돈을 물 쓰듯이 화려한 생활을 하고 정경유착과 같은 비리를 저질렀다고 비난한 글이 남아있다.
당시 많은 부자가 김홍도의 그림을 얻고자 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김홍도 그림은 큰 돈을 주고도 쉽게 구매할 수 없었다.
김경림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번 사람들은 양심이나 청렴 따위에 별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는 양심을 지키며 사는 선비를 비아냥거렸다.
공직자에게 뇌물을 주고 사치를 일삼던 김경림에게는 [곽분양행락도], [백동자도], [호렵도] 같은 화려한 그림이 맞춤일 것이다.
[단원 김홍도가 김경림에게 그려준 화첩 속 3점 중 나머지 그림이다. 총석정은 금강산 위쪽에 있으며 최고의 유람 명승지이다. 사슴과 소나무 그림은 신선세계를 표현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그림으로 수용했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을묘년 화첩의 전모를 알 수 없지만 김경림이 좋아할만 한 금강산 유람이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해암호취도]는 의외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어려움 속에서도 양심을 지키는 강인한 선비, 군자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김경림의 삶을 통째로 부정할 수도 있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단원 김홍도는 돈의 위세에 눌려 타협하거나 아부하지 않았다.
선비의 양심과 강인함을 담은 그림을 통해 자신의 철학과 자존심을 표현한 것이다.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더라도 마지막까지 양심을 지켜야 하지 않겠냐고 김경림을 질타했을 지도 모른다.
김홍도는 인격적으로 완벽하거나 사회적 비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현감 재직 시 탄핵을 받아 쫓겨 다니기도 했고, 거만했으며, 사찰에 큰돈을 기부하고 요행을 바란 심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김홍도는 양심과 사회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끊임없이 성찰과 자기수양을 이어나갔다.
그의 모든 작품이 이를 증명한다.
흔한 종이 쪼가리에 먹선으로 그린 그림 따위가 뭐가 대단하냐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별볼일 없는 작은 그림이 한 사람의 인생이나 세상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다.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은 심장에 새겨져 있다.
세상 풍파에 무너지고 있을 때 비수가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