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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Apr 24. 2023

유능한 연출가 혜원 신윤복

사회적 풍류의 경계

“혜원 신윤복의 작품 중에 청금상련(廳琴賞蓮)이라고 가야금 연주를 들으면서 연꽃을 감상하는 그림이 있네. 그런데 그림 안에 뜬금없는 모습이 있네.

그림 왼쪽에 기생을 안고 야릇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남정네는 왜 그린 것인가?”     


“어떤 이는 성행위를 하는 장면이라고 하네만, 아무려면 여럿이 있는 야외에서, 그것도 벌건 대낮에 그 짓을 하겠는가? 연출된 것일세.”       

   

[신윤복/청금상련/종이에 채색/28.2cm×35.6cm/19세기 초/국보 135호, 혜원전신첩/간송미술관 소장. 왼쪽 사내가 흥분한 표정으로 뒤에서 껴안자 기생은 당황한다. 실내 장면을 야외로 옮겨와 연출한 것이다.]


“하지도 않은 장면을 의도적으로 끼워 넣었다는 말인가?”

    

“저런 상황이나 행위가 있었을 것이네.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야외가 아닌 실내였네. 옆쪽에 벗어 놓은 방건(方巾)이 증거일세. 사각형 방건은 선비가 실내에서 쓰는 모자이지.

아무튼, 실내에서 남자가 기생을 희롱하며 껴안는 장면을 밖으로 옮기는 마술 같은 연출을 한 것이네.

혜원 신윤복은 오해를 없애기 위한 장치도 잊지 않았네.

다른 두명의 남자는 야외용 갓을 쓰고 있으며, 곰방대를 물고 있는 기생도 외출용 모자인 가리마를 쓰고 있네. 당시 사람들은 실내용 모자와 야외용 모자의 차이를 정확히 알았지. 이런 소품을 통해 연출된 장면이라는 것을 살짝 흘리고 있는 것이지.”


“헐, 감쪽같이 속을뻔했네.

그건 그렇고, 기생을 무릎 위에 앉힌 자세가 오묘하지 않은가?”

    

[신윤복 필 춘화-이런 자세로 성행위를 하려면 여성이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 앉아야 한다. 오랫동안 성행위를 즐길 수 있는 방중술 체위라는 소문이 있다.]    

 

“다리 사이로 끌어당겨 껴안는 모습인데, 성행위 체위라고 보는 사람도 있네.”    

 

“나도 신기하고 독특한 성행위 자세로 보았네. 부끄럽지만, 지난밤에 마누라와 그 자세를 취해 보았지. 그런데 마누라 엉덩이에 눌려 허리를 쓸 수가 없었네. 저 자세로 성행위를 하려면 여자가 다리를 세워야 하는데, 그림과는 전혀 딴판이네.”


“혜원은 정통 미술교육을 받은 화원이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의 진경산수화를 익혔고, 아버지 신한평에게는 왕실 인물화를 체계적으로 배웠네.

혜원의 풍속화는 대부분 연출한 것일세. 각각의 주요 장면을 따로 그려 나중에 합치는 방식을 사용했네.”   

  

“그렇다면, 그림을 위해 등장 배우가 연기하고 감독이 연출했단 말인가?”     


“실제 일어났던 상황에 감독의 상상력과 연출력을 가미한 것이네.

연꽃을 보는 사람, 가야금 연주를 듣는 사람, 기생을 껴안은 사람은 각각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있었던 것을 한 화면에 결합한 것일세.

이런 화면 연출은 신윤복의 전매특허인데, 전통이 있었지. 일찍이 겸재 정선 선생께서 금강산을 발품 팔아 곳곳을 사생하여 철학적으로 결합한 금강전도에서 확립되었네.”    

 

“마치 판소리의 눈대목을 모아놓을 것과 같다는 말이군.

하긴, 신윤복이 아무리 눈썰미가 좋아도 모든 장면을 단번에 그려내지는 못하지.

이렇게 화면을 연출하려면 각각의 장면을 미리 그려놓아야 하지 않겠나? 많은 밑그림이 필요하겠군.”

     

“어림잡아, 수십 장 이상의 밑그림이 있어야 할 것이네.

상상을 해 보게. 혜원은 화판을 목에 걸고 연회장을 돌아다니면서 밑그림을 그렸지.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은 혜원을 거의 의식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네. 우리가 행사장에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것과 같네.”     


“그렇게 만든 밑그림을 화실로 가져와 잘라내고 붙이고, 확대 축소하여, 한 화면에 그렸단 말인가?”

    

“원본 그림은 제법 크게 그렸을 것이네.

음, 가로 길이가 대략 1m 정도로 추정하네. 이렇게 원본 그림이 완성되면 주문한 사람과 상의하여 최종 결정을 했다네.”  

   

“우리가 보는 혜원의 풍속화는 작은 그림이 아닌가?”     


“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기 위해 여러 벌을 제작했다네. 화첩으로 묶거나 두루마기 족자로 만들려면 그림이 작아야 하지. 주로 제자나 화공을 동원하여 원본을 모사한다네.”    

      

[신윤복/주유청강/종이에 채색/28.2cm×35.6cm/19세기 초/국보 135호, 혜원전신첩/간송미술관 소장.

황색 도포에 큰 갓을 쓴 주인공과 청색 천막 사이의 원근을 잘못 그렸다. 이 정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신윤복이 아니다. 제자나 화공이 여러 벌 모사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일 것이다.]

     

“혜원의 주유청강(舟遊淸江)도 같은 방법으로 그린 것인가?”    

 

“뱃놀이 그림도 연출한 것이라네.

이 뱃놀이의 주인공이 뒷짐을 하고 전체를 관망하는 듯이 서 있네.

뱃머리에서 기생이 홀로 생황을 연주하는데, 중앙의 총각도 대금을 불고 있네. 기생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담배를 주는 남자와 물장난을 하는 기생, 소매를 걷고 같이 물장난하다 기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젊은 선비도 있지.

아참, 뒤쪽의 노 젓는 사람은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그냥 힘을 쓰고 있는 표정이라네.

한 그림에 7개의 상황이 진행되고 있네. 이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지.”

    

“나도 그런 생각이 드네. 그림 속의 사람들은 각자 따로 놀고 있거든.”   

  

“나는 관심, 희롱, 멍때림, 연주, 노 젓기 따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화면에 담길 수 있다는 것이 더 신기하네. 당시 조선 사회는 뭐랄까, 이질적인 재료이지만 한 그릇에 어우러지는 따로국밥 같은 분위기였을까?”  

   

“8명이나 되는 사람을 태웠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작은 배로 보이네.”     


“혜원이 어디쯤에서 관찰하고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군.

실제 놀이용 배는 상당히 크네. 술과 음식, 악기는 물론이고 기생을 태웠으니 요강까지 실어야 하네. 혜원은 옆 배가 아니라 이 사람 무리 속에 있었을 것이네.”

    

“저 배 안에 있었다면, 정작 자신은 빼고 그렸다는 말인데?”    

 

“혜원 자신뿐만 아니라, 각종 짐이나 보조 뱃사공 같은 불필요한 요소는 모두 없앴네. 혜원은 이 작품을 연출한 감독이니까.”     

 

“감독이 연출한 장면 속에 감독이 나오면 얼마나 웃기겠는가. 아무튼, 혜원 신윤복은 이런 연출과 감독을 통해 뭘 표현한 것인가?”  

   

“풍류일세. 사회적 풍류.”  

   

“사회적 풍류가 뭔가?”     


“풍류는 사회적 보상일세.

양심을 지킨 사람, 열심히 공부하는 젊은이, 공로를 세운 사람, 어려운 사람을 도운 의인, 부모를 공양한 효부 효녀에게 국가나 사회가 주는 혜택이지.

뱃놀이나 꽃놀이, 음악공연, 활쏘기, 명승지 관광도 모두 사회적 보상의 방편이라네.”    

 

“국가나 사회가 주는 보상 안에 기생을 껴안거나 희롱하는 것도 포함된 것인가?”

    

“마당 쓸기나 성벽 쌓기를 보상으로 주면 받을 사람이 있겠나?

술과 풍족한 음식, 아름다운 여성, 춤과 노래, 우쭐함, 권위 따위가 진짜 보상이지. 이 중에서 남녀의 성적 욕망은 가장 강력하다네.”   

  

“그렇다면, 흥청망청 돈을 쓰고 미녀와 놀아나는 부자들은 풍류를 즐기고 있는 것인가?”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사회라면, 틀림없이 풍류일세.

하지만 혜원이 활동했던 조선 후기는 강력한 양심사회였네.

술을 마시되 취해서 난동을 부려서는 안 되고, 음식을 배불리 먹되 탐식은 안 되었지.

특히, 공공기생(관기)을 추행하는 일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위험했네. 남자들은 사설 기생의 손목이라도 잡으려고 최선을 다해 아부할 정도였다네.”    

     

[연소담청-젊은이들의 봄나들이/신윤복/종이에 채색/35.6*28.2/간송미술관 소장.

나들이 가는 기생은 관기가 아니라 사설 기생이다. 남자들은 걷고 기생은 말에 태웠다. 머리에 진달래를 꽂아주고 담뱃대를 공손히 주면서 아부를 하고 있다.]      


“혜원이 남녀의 야릇한 표현을 자주 사용한 이유가 뭔가?”     


“혜원은 사람들이 원하는 풍류를 정확히 알고 있는 유능한 감독이었네.

남녀의 사랑은 풍류의 으뜸이지만 적나라한 표현은 눈쌀을 찌푸리게 하고, 과도한 절제는 재미가 없지.  

혜원은 욕망과 양심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지키면서 풍류라는 사회적 가치를 높인 화가였다네.

어쩌면, 대중문화를 정점에 올려놓은 감독이자 상상의 세계를 현실처럼 만들어내는 연출가가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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