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사전을 찾아보니 사람으로서의 됨됨이, 사람의 품격, 도덕적 행위의 주체, 신에 대하여 인성을 갖춘 품격 따위로 검색된다.
솔직히 뭔 말인지 모르겠다.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된다.
그래서 우회해 보기로 한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최상위 인격자를 떠올려보자.
당연히 예수, 석가모니, 공자, 마호메트이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된 장점이 곧 인격의 실체가 아닐까?
예수는 사람들의 원죄를 모두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했다.
석가도 카스트제도에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는 깨달음을 설파하고 스스로 청빈하게 살다 죽었다. 공자는 전쟁, 약탈, 살육으로 고통 받는 백성을 위해 효와 예를 설파하고 실천했다.
그렇다.
최고 인격체로 존중받는 사람들은 인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타인을 위해 목숨과 전 재산을 버리며 헌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기부와 자원봉사, 재난상황에서 타인의 목숨을 구한 의인 따위도 높은 인격체가 아니냐고 주장할 수도 있다.
자원봉사자나 의인(義人)은 그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쉽게 말하면, 법과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이다.
사회적 가치는 법률과 규칙 따위로 이미 정해져 있다.
노동운동의 신호탄을 알린 전태일 열사가 죽기 전에 외쳤던 말이 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그러니까 업주나 정치인이 법률에 명시된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범죄자라고 하며 처벌한다.
당시 사회는 나쁜 놈이나 범죄자가 활개치고 다녔다.
범죄자가 법을 지키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 탄압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법과 질서를 지키는 사람은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것이다.
[김홍도/군선도 팔곡병/지본채색/132.8x575.8㎝/조선후기/리움미술관]
단원 김홍도가 그린 군선도(群仙圖)라는 작품이 있다.
정조 대왕 앞에서 6m에 가까운 그림을 단번에 그렸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유명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신선은 노자(老子)를 중심으로 종리권(鍾離權), 여동빈(呂洞賓), 장과로(張果老), 한상자(韓湘子), 이철괴(李鐵拐), 조국구(曹國舅), 남채화(藍采和), 하선고(何仙姑) 따위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중국의 신선을 잘 모른다.
신선은 금도끼 은도끼 설화에 나오는 하얀 옷에 긴 수염을 한 모습이 전부이다.
신선은 원래 인간이었는데 사람들에 의해 신격화된 존재이다.
엄밀히 신은 아니고 인간과 신의 경계선에 있는 존재이다.
동방삭(東方朔)이란 신선은 제법 유명하다.
중국의 실존 인물로 유창한 말솜씨와 재치로 한무제(漢武帝)의 측근이 되었다는 정도의 기록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신선이 되어 추앙받는다.
한번 먹으면 천 갑자를 산다는 천도복숭아를 세 개나 훔쳐 먹어서 삼천갑자를 살았기 때문이다.
1갑자가 60년이니, 18만년을 살았다는 허무맹랑한 소리이다.
심지어는 염라대왕이 수배령을 내렸다는 말도 전한다.
[김홍도/낭원투도/49.8*102.1/종이에 담채/간송미술관. 천도복숭아를 든 동방삭은 기쁜 표정이 아니다. 여기저기 살펴보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단원 김홍도의 신선도 중에 동방삭 이야기를 표현한 그림이 있다.
그림 상단에 [낭원투도]라고 적혀있는데, 그대로 작품 제목이 되었다.
낭원(閬園)은 보통 신선세계를 뜻하고 투도(偸桃)는 복숭아를 훔친다는 의미이다.
중국에서 그린 동방삭 그림을 보면 훔쳐 나오는 모습을 약간은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이 많다. 주로 복숭아를 훔쳐 도망가는 장면에 중심을 둔다.
하지만 김홍도가 그린 동방삭의 모습은 어정쩡하다.
커다란 복숭아를 두 손으로 잡고 약간 높게 들고 바라보고 있다.
몸동작은 도망가는 자세가 아니다. 무게 중심을 뒷발에 두고 멈칫거리는 모습이다. 표정은 알쏭달쏭하다.
마치 “이게 뭐지?”하며 궁금해 하는 표정이다.
김홍도가 이런 애매한 표정을 그린 이유는 뭘까?
[낭원투도]의 진짜 주인공은 동방삭이 아니라, 김홍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천도복숭아를 보는 김홍도의 표정은 호기심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과연 이것을 먹으면 삼천갑자를 살 수 있을까?’
‘불로장생하는 과일이 존재하기는 할까?’
‘천도복숭아는 우리에게 어떤 쓸모가 있을까?’
[낭원투도]의 동방삭에게는 김홍도뿐만 아니라 당시 선비의 생각이 투영되어 있다.
선비의 입장에서 본 천도복숭아는 어떤 의미였을까?
선비들은 불로장수한다는 천도복숭아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18만년을 산다는 동방삭은 더더욱 수용할 수 없었다.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는 불로장생에 대한 대화가 나온다.
연암은 잘라 말한다.
“나는 수천 년을 살았다는 사람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수천 년을 살면 뭐하겠나.”
선비들이 생각했던 천도복숭아의 의미는 백성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십장생도, 해학반도도에 표현한 천도복숭아는 태평성대의 상징이었다.
[십장생도/심규섭/디지털 그림/2022. 왕실그림인 십장생도는 만백성이 조화롭고 풍요하게 살아가는 태평성대를 표현하고 있다.]
선비들은 태평성대를 만들고 구현하는 사람은 군자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사회적 인격의 완성체인 군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으며 군자에 이르는 길을 진정한 도(道)라고 했다.
선비는 군자가 되기 위한 ‘엄격한 예법과 자발적 청빈’의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부당한 재물과 권력의 남용을 경계하는 자기희생과 헌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신선은 현실의 재부나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묘사한다.
희생과 헌신이라는 인격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신선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군자와 신선을 동일시했던 바탕에는 이러한 인격이 존재한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파 먹히는 극심한 고통을 당한다.프로메테우스에 관한 신화는 복잡하지만 서양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즘 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프로메테우스 이야기가 전한다.
하늘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죄로 거대한 바위에 묶여 커다란 독수리에게 간을 파 먹히며 고통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불의 사용은 인간 문명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으며 나약했던 인간을 신에 버금가는 강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는 신들의 싸움과 질투, 두려움에 의해 불이 인간에 전해졌다고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인과 화가들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벌을 받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인간에게 불을 갖다 주었다고 규정한 것이다.
인간을 너무 사랑하여 기꺼이 고통을 감내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영웅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김홍도가 그린 동방삭과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의 공통점은 인간을 위한 희생과 헌신을 중심으로 신화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인간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프로메테우스는 신(神)이다.
과연, 신이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을까?
아니다.
사람이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며 스스로 찾아낸 것이다.
불을 지피고 사용하는 방법을 독점하지 않고 전 인류에게 전파한 것도 사람이다.
어쩌면 높은 인격을 가진 능력자였을 것이다.
김홍도는 신선인 동방삭을 통해 진정한 군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런 허무맹랑한 신선을 믿지 말라,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요행이나 도둑질로 장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좋은 세상을 만든다면 더 건강하게 오래 살 수는 있다, 높은 인격자만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