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은 쉽게 꽃을 피우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네. 또한 한 번 꽃을 피우면 향이 진하고 오래 가지. 이런 난의 생태적 특성을 오랜 수신, 수양, 기다림 끝에 세상에 나아가 올바른 뜻을 펼친다는 선비의 풍모에 비유한 것일세.
지초는 우리나라 산과 들판의 양지바른 곳에서 나는약성 좋은 여러해살이 풀인데, 특정 품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네.
십장생도에 표현된 영지의 상징을 빌리자면, 좋은 땅에서 나고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식물의 총칭이네.
지란병분이란 글에서 난초와 지초는 동격이네.
서로의 가치를 높여주고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네.
아무튼, 난의 역할은 향기이고 지초의 역할은 지조와 절개, 영원성을 뜻한다고 해석이 되지.
그림의 맥락을 읽자면 추사는 정신적 지주이며 향기의 원천일세.
그렇다면 친구들이나 후학들은 추사의 이상과 학문을 따르고 배반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다짐을 하는 것이지.
성리학의 관점을 가진 선비들이 지초를 지조와 절개, 영원성 따위로 해석하는 것은 당연했다네.
만약 추사 김정희와 그를 따르는 친구들이나 후학들이 지초를 단순히 장수축원으로 해석했다면, 추사의 부채그림은 그저 난세에 한몫 잡아서 떵떵거리며 끼리끼리 잘 살겠다는 세도정치의 탐관오리(貪官汚吏)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지.”
“추사 김정희는 부채그림을 통해 지초의 상징을 지조와 절개라고 말하고 있다네.
그림에 발문을 쓰거나 감상한 사람들도 이런 상징에 공감하고 있었지.
누가 뭐래도, 추사 김정희의 정치, 사상적 힘은 대단했다네. 추사가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면 이를 거스르지 못한다는 말일세.”
[오재순은 1727(영조 3)∼1792(정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오랫동안 대제학을 맡았다. 왕은 그의 겸손하고 과묵함을 가상히 여겨 ‘우불급재란’ 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도화서 화원이었던 이명기가 그렸는데 조선의 초상화를 대표할만한 명작이다. 이 초상화의 흉배에는 쌍학이 영지를 물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지초의 상징을 증명할 또 다른 그림이 있네.
엄밀히 그림은 아니고 자수공예인데, 조선시대 관복의 흉배(胸背)일세.
흉배에는 학과 사슴, 기린, 표범, 호랑이 따위의 형상들이 그려져 있다네. 전체적인 형상은 [해학반도도]를 양식화 시킨 것일세.
문인 관복의 흉배에는 쌍학이 그려져 있는데, 그 학은 영지를 물고 있는 모습이지.
도교적으로 해석하면, 학은 장수, 출세의 상징이고 영지는 장수의 상징이 된다네.
하지만 고급관리가 이런 상징을 담은 관복을 입고 정치를 했다는 것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지.
‘내가 출세하여 천년만년 장수하면서 영화를 누리겠다.’는 도적떼 같은 상징을 가진 관복을 입고 정치를 했다면 조선은 100년도 되지 않아 망했을 것이네.
오히려 학(鶴)은 태평성대, 신선세계의 상징이고, 영지는 지조와 절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네.
이 둘의 상징을 합치면 ‘백성을 위한 태평성대를 만들기 위해 어떤 어려움이나 유혹도 이겨내고 올바른 정치를 하겠다.’가 되기 때문이지.”
[구멍장이버섯인 영지는 나무도 풀도 아닌 특성으로 인해 신비하게 여겼다. 하지만 영지의 약효는 검증된 적이 없다. 장생도에는 영지와 일반 버섯이 결합한 모습으로 표현한다.]
“잘 알겠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영지를 불로초로 여기고 비싼 값에 사고 파는 이유는 뭔가?”
“부채그림에 그려진 형상을 보자면, 지초는 분명 영지를 그린 것이네.
상서로운 버섯을 뜻하는 지초(芝草)나 신령한 버섯을 뜻하는 영지(靈芝)는 같은 의미이지.
생김새가 구름을 닮았다하여 운지(雲芝), 신선들이 먹어 장수한다하여 불로초라고 부르기도 한다네.
[십장생도]나 [해학반도도]에는 많은 지초(芝草)가 표현되어 있네.
사람들은 ‘생명력이 풍부한 이상세계’라는 의미를 가진 십장생도를 도교적으로 해석하여 수용했다네.
그래서 작품 속의 사슴, 학, 거북, 지초, 바위 따위의 사물들을 장수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그림 속의 동물이나 식물을 먹으면 장수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믿음을 가졌지.
사실, [십장생도] 속의 사물들은 현실을 바탕으로 했지만 현실과 다른 이상적인 가치를 담고 있네.
그림 속의 지초(芝草)도 구멍장이버섯에 속하는 영지버섯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현실의 버섯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세.
이를 잘못 해석하여 실제 영지버섯을 비싼 돈을 들여 청탁용 뇌물로, 부모님의 장수 선물로 사용하고 있네. 실제 구멍장이버섯에 특별한 약효가 있다는 임상실험 결과는 없네.”
“자료를 찾아보니 영지에서 여러 약효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건 무슨 말인가?”
"모든 식물에는 약효가 있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은 음식 재료에도 영지와 비슷한 약효는 있네. 다만 특정 약으로 사용할만큼은 아니기에 무시한다네. 정말 약효가 있다면 글로벌 제약회사에서 약으로 만들어 판매했을 것이네.
“음, 알겠네. 별 약효도 없는 영지가 단지 십장생도에 표현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는 말인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군.”
[해학반도도에 표현된 영지의 모습이다. 풍요한 땅에서 나는 영험한 약재를 상징한다.]
“사람들은 과학적인 약효나 논리보다는 사연, 역사, 서사 따위를 좋아하지. 서사가 좋으면 자발적으로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네.”
“서사(敍事)가 뭐 길래?”
“요즘 대중문화에서 서사의 역할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네. 좋은 서사는 곧 권력이고 돈이 된다는 말도 있지.
서사를 다양하게 해석하지만 결국 양심적인 삶의 이야기를 뜻한다네. 더럽고 나쁜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지.”
“영지의 서사는 뭔가?”
“당장 추사의 지란병분이라는 부채그림 하나만 가지고도 몇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이야기가 있다네.
영지에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신념과 고통, 희생과 헌신, 사랑과 눈물이 스며들어 있네.”
“영지에 이런 서사가 있는 줄 누가 알겠는가? 그저 비싸니까 몸에 좋다고 여길 뿐이데.”
“당장은 욕망의 서사가 담긴 영지가 활개 치겠지만 결국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네. 가짜는 밑천을 쉽게 드러내기 때문이지.
약효도 없는 영지를 먹는다고 몸아 좋아지겠는가? 비싼 영지는 뇌물, 청탁, 허세의 상징일세. 이런 영지를 주고받는 대가는 혹독할 것일세.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의 삶을 망칠 수 있지.”
“정말 그렇다고 믿는가?”
“세상이 이 만큼이라도 건재하고, 그래도 살만하다고 느끼는 것은 영지의 진정한 서사를 믿기 때문일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