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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Jul 27. 2023

서서 술집

혜원 신윤복이 그린 삶의 활기

 

[혜원 신윤복/주사거배/종이에 담채/28.2*35.6/조선 후기/간송미술관 소장.]   


혜원 신윤복이 그린 술집 풍경이다.   

  

주막이 아니라 주점이다.

주막은 임시로 만든 술집이고, 주점은 붙박이 술집이다.

주막과 주점의 가장 큰 차이는 세금이다. 주점은 정부의 허가를 받고 세금을 내며 장사하는 곳이다.  

   

술맛이 좋다고 입소문이 났을 것이다.

대청마루가 있는데도 손님들은 모두 서있다.

술구기로 떠주는 모습과 안주를 먹기 위해 젓가락을 드는 모습만으로 술 향기 가득한 풍경을 만들었다.     


분홍색 진달래가 활짝 핀 봄날의 초저녁이다.  

퇴근길에 진한 술 향기를 맡았다.

차마 지나치지 못했다.

데운 청주 한 잔을 시켜 마셨다.

짠지를 입에 넣자 뒤에 선 사람이 보챈다. 술잔을 내려놓고 옆으로 물러섰다.

주점 앞에 핀 진달래가 바람 따라 흔들린다.

딱 한 잔만 더...

술집 앞에 서서 부뚜막 술통만 바라본다.   

  

그림 왼쪽에 신윤복이 쓴 글이다.     


“술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술 항아리 끌어안고 맑은 바람을 맞는다.”     


서서 급하게 마시는 술잔에도 운치가 넘친다.     


그러나,

혜원 신윤복은 이렇게 착한(?) 그림을 그릴 사람이 아니다.     

막걸리 한 잔도 쪼그려 앉아 먹는 것이 우리의 습성이다.


넓고 편한 대청마루를 두고 서서 술을 마시는 이유는,

곁눈질로 주모를 훔쳐보면서 웃음을 흘리는 아전의 표정에서 알 수 있다.

술을 핑계로 젊은 주모를 보고 수작을 걸어 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젊은 주모는 신윤복의 미인도에 나오는 똑같은 가채를 하고  옷을 입었다. 청색 주름치마는 비싼 옷이다. 앉은 자세, 술구기를 잡은 손 맵시에서 미인도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확실히 신윤복 그림이 맞다.]

     

젊은 주모는 머리를 올리고 가채를 틀었다.

과부인지 결혼을 하지 않고 머리만 올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남편이 있는 부녀자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가채를 올려 꾸민 젊은 주모는 유행하는 청색 주름치마를 입었다.

이 치마는 비싼 옷이다.

앉은 자세나 술구기를 든 손에서 농익은 교태가 흐른다.  

   

대청마루에 앉으면 주모가 술상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성질 급한 남정네들은 주모를 가까이 보기 위해 술통 앞에 몰려들었다.

술을 받으면서 소문처럼 예쁜지 확인하고 말이라도 건네 볼 심산이다.

      

손님이 몰려오고 농담과 수작을 걸어오자 급히 기둥서방을 불렀다.

연보라 저고리의 젊은 남자가 맨 상투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급하게 나왔다.  

이런 모습은 일을 도와주는 목적이 아니라 위협을 가하기 위함이다.

    

붉은 덜렁과 노란 초립을 쓴 사람은 무예청 별감이고, 깔때기를 쓴 사람은 나장이다.

접부채에 옥색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 선비가 있고, 도포를 끌어올리는 사람은 아전으로 보인다.

모두 만만치 않은 직업과 위세를 가졌다.     

[연보라 저고리에 미투리를 신었다. 어설프고  연약해  보인다. 이런 나약함을 숨기기 위해  맨  상투에 소매까지 걷었다. 상투를 보인다는 것은 체면을  차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통을 벗은 거나  다름없다.]


젊은 기둥서방은 기세에 눌렸는지 머쓱한 표정이다.

그럼에도 주먹은 풀지 않았다.

주눅이 들어 어정쩡하게 서 있는 기둥서방의 모습에 화가 났는지 주모의 표정은 뾰로통하다.      

[기묘한 웃음을 흘리는 아전은 붉은 옷을 입은 무예청 별감을 부추기는데 정작 별감은 당황했는지 젓가락질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함께 온 아전은 주모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한다.

    

“이분은 임금을 호위하는 무예청 별감이오. 아직 총각이지요. 이만하면 잘 생기지 않았소? 흐흐흐...”      


별감은 술인지 주모한테 나는 것인지 모를 진한 향기에 몸이 얼어붙었다.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으면서도 차마 주모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혼자 온 뒷모습의 사내는 밀려 났지만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      

[주름을 넣은 옥빛 두루마기는 명품옷이다. 두루마기를 허리춤까지 끌어올린 것은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노련한 나장이 슬쩍 말린다.]


멀찍이 떨어져 보던 옥빛 두루마기의 사내가 부채를 흔들며 다그친다.

    

“거, 술 한 잔 마시면서 말이 많소.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지.”     


같이 온 나장이 슬쩍 말린다.     


“손목이라도 잡고 싶으면 조급하게 굴지 마시오. 저들을 초짜인 게 분명하오. 나에겐 다 계획이 있소. 호호홍...”      

[술집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연분홍 진달래에 취한 것이다. 젊은 주모는 진달래의 화신이다.]


술맛을 내는 것은 사람이다.

젊고 아름다운 주모가 술 향기로 남정네들을 불러 보았다.

저마다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 관복을 입거나 한껏 멋을 부리고 나왔다.

언젠가 예쁜 주모를 두고 싸움판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진달래 흐드러진 봄날 저녁이 깊어간다. (*)                    

          

참고1-무예청 별감은 조선시대 왕을 호위하는 일을 맡아보던 무관(武官)이다.     

참고2-나장은 일명 나졸(羅卒)이라고도 하며, 의금부·형조·사헌부·사간원·오위도총부·전옥서·평시서 등 중앙의 사정(司正)·형사업무를 맡는 관서에 배속되어 죄인을 문초할 때 매를 때리거나 죄인을 압송하는 일 등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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