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물살을 헤치고 이르는 곳
심사정의 어약영일도(魚躍迎日圖)
중국 고사에 뿌리를 둔 등용문이라는 그림이 있다.
등용문은 잉어가 거친 물살을 이겨내고 용문에 올라 용이 된다는 내용이다.
지극히 도교적인 설정이지만,
사람들은 어려움을 이겨내면 사회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보편적 가치로 수용했다.
이 화제(畫題)의 그림은 조선 후기에 많이 그려졌다고 한다.
조선의 지식인에게 사회적 성취는 주로 과거 급제나 승진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저급한 탐욕이라 여겨 손가락질을 당했기 때문이다.
심사정이 환갑의 나이에 그린 [어약영일도]에는 이런 글귀가 들어가 있다.
"1767년 2월 삼현을 위해 장난삼아 그리다."
후배의 과거시험 합격을 위한 그림으로 추정하지만 삼현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모른다.
“옛 그림에는 가끔 장난삼아 그린다는 글이 있는데 무슨 뜻인가?”
“당시 상황을 상상해 보세.
심사정은 선비들이 모이는 시회에 초대를 받았을 것이네.
오랜만의 외출에 설레어 소박하게 차려입고 참석했네.
모란이 활짝 핀 5월, 은은한 먹 향기가 흐르는 작은 정원을 옆에 두고 10여명의 선비가 모였지.
심사정은 삼현으로 불리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후배들이 곧 과거시험을 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선배들은 후배에게 선비가 갖춰야할 덕목과 사기를 높여주는 덕담을 해 주었지.
하지만 사람들은 화가인 심사정이 덕담 정도로 끝내기를 바라지 않았네.
이들의 사기를 높이기 합당한 그림을 그려줄 것을 청했지.
심사정은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고 미술도구도 없으니 극구 사양했을 것이네.
하지만 체면도 있고 주변 분위기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려야 했네.
제대로 그리지 않았다는 의미, 혹은 가볍게 그렸다는 의미로 '장난'이라는 화제를 쓴 것이지.”
[심사정/어약영일도/129*57.6cm/종이에 담채/1767년/간송미술관 소장.]
“작품 속에도 장난의 흔적이 있는가?”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통해 즉흥성이 강한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네.
파도를 그린 붓질은 자유분방하고, 먹의 강약도 일정하지 않네.
잉어의 머리 부분도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지.
그럼에도 심사정의 필력이 느껴지는 작품일세.”
“중국의 등용문 그림과는 사뭇 다른데?”
“정확한 지적일세. 등용문의 핵심 소재는 잉어와 용문, 거친 물결이라네.
하지만 심사정 그림과 공통점은 잉어와 거친 물결 밖에 없지.”
“왜 이렇게 그린 것인지 설명해 주게.”
“이 작품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네.
일단 잉어는 민물고기인데 하천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에 있는 것처럼 그렸네.
물론 우리 그림에서 의미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생태나 상식을 무시하는 경우는 흔하지.
심사정이 강이 아닌 거대한 바다를 그린 것은 넓은 세상을 표현하기 위함일세. 강이 개인과 가문의 영역이라면 바다는 사회적 영역인 셈이지.
과거시험을 본다는 것은 가족과 가문을 넘어 넓은 사회로 나가길 원한다는 것이네. 넓은 바다와 거친 파도를 통해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과감하게 바꾼 것일세.”
“여기서 잠깐, 시험을 앞둔 젊은 후배에게 너무 가혹한 그림이 아닌가?”
“심사정은 거친 파도를 통해 현실의 어려움을 직시하기를 바란 것이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내지 않고 해결책까지 제시하고 있다네.”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이 어디에 표현되어 있단 말인가?”
“바로 아침 해의 표현일세.
해에는 붉은 색을, 주변에 흐릿한 붉은 색을 칠한 것은 아침 해라는 것은 강조하기 위함이지.
아침 해는 우리 그림에서 흔한 소재이며, 양심을 뜻한다네.
거친 파도가 치는 아침 해의 표현은,
‘어려움 속에서도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여 이루다.’와 ‘강인한 양심의 힘만 있으면 세상의 어려움은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뜻이 함께 들어있다네.”
[중국의 등용문 그림이다. 잉어와 용문이 강조되어 있다. 거친 물살과 아침 해를 강조한 심사정의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중국의 등용문 그림과 비교해 보니 전혀 다른 그림 같아보이는군."
"심사정은 탄탄한 철학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선비화가이네.
앞서 등용문 그림은 도교, 미신의 성격이 강하다고 했지. 심사정은 등용문의 성공, 성취라는 기본 구도만 수용하고 도교 요소는 제거했네.
가장 큰 변화는 기존에 있던 용문을 제거하고 대신에 아침 해를 그린 것이네.
화려한 용문을 제거하고 아침 해를 넣은 이유는 성취의 목적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네.
아침 해는 아침이라는 시간을 드러내는 장치가 아니고 붉은 마음, 단심(丹心)의 미술적 표현일세.
그러니까 단심(丹心)이 상징하는 아침 해는 사람의 사회적 본성인 양심을 뜻한다네.
이로써 잉어가 거친 물살을 헤치며 아침 해를 향해 도약하는 그림은 단지 합격, 승진 기원만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목적을 표현한 명작으로 거듭났지.
이런 파격적인 형상은 이후 조선 등용문 그림의 본보기가 되었네."
“장난삼아 그린 작품치고는 심각하고 묵직한 그림일세.”
“심사정의 내공이 대단하기 때문일세.
심사정은 과거시험의 합격이 단순히 벼슬을 한다는 의미보다 양심을 구현하는 사회적 실천이라고 본 것일세.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는 것은 정치를 위함이네.
정치의 목적은 백성의 태평성대인데 민본정치를 하려면 숱한 유혹과 자만, 탐욕을 이겨내어야 하지. 결코 쉽지 않네.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아무튼 심사정은 백 마디 말보다 선비의 삶, 정치인의 삶을 그림 한 장에 정확하고 거침없이 담아내었네.”
“어떤 사람은 등용문 그림을 ‘개천에서 용 난다.’로 해석하기도 한다지.
별 볼일 없는 곳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네.
대부분의 대중 언어가 그러하지만,
개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용이 될 수 있는지, 용이 상징하는 성취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지는 생략되어 있네.
그래서인지 해석도 천차만별일세.
개천은 출신 성분이나 스펙, 부모의 능력 따위로 무력화되었고 성취를 의미하는 용은 그저 많은 돈을 의미할 뿐이지.
양심과 인격적 완성, 헌신을 상징하는 아침 해의 의미는 이미 사라졌네.
심지어 아침 해는 아침 시간을 뜻하고, 잉어는 남성의 발기한 성기로 보고 아침에 발기하는 강인한 남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지.
심사정이 말한 장난을 진짜 장난처럼 만들어 버렸네.
한바탕 웃을 수는 있지만,
철학적 내용이 빠진 그림은 그저 탐욕을 부추길 뿐이니, 한탄만 나오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