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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Oct 17. 2022

울트라마린과 양심

이택균의 책가도(冊架圖)

      

조선 후기 화원이던 이택균은 [책가도]를 전문으로 그려서 널리 이름을 알렸다.  

그의 인장이 찍혀있는 [책가도]의 배경에는 짙은 청색이 칠해져 있다.

이 청색을 울트라마린 블루(ultra marine blue)하고 부른다.   

   

“물감 이름에 울트라(ultra)가 붙은 경우는 처음이네. 그렇다면 울트라마린은 아주 특별하면서 엄청나게 비싼 물감이란 뜻이 아닌가?”

     

“그렇다네. 희귀한 청금석을 갈아서 만든 물감으로, 최고품질은 kg당 가격이 2,000만 원이나 하지. 매우 비싼 물감이기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옷을 채색할 때처럼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했다네.”

    

“자료를 찾아보니, 청금석은 거의 보석과 다를 바 없구먼. 물감 이름도 특별나다는 의미보다는 바다 건너(ultra marine) 왔다는 의미가 굳어졌다고 하네.”  

       

[천연 울트라마린은 금값과 맞먹는다. 현재 시판하는 물감에 천연 울트라마린이 미량이라도 들어가면 엄청나게 비싸진다.]   

  

“조선 시대 궁중회화에서도 제법 많은 청색을 사용했네.  

이 청색을 만드는데 널리 쓰인 재료는 구리 산화물의 일종인 남동석(Azurite)으로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했는데, 국내에서도 일부 채굴했지.  

이 남동석을 가루로 만든 것이 바로 석청(石淸)이라는 물감 재료이고, 이를 적절히 가공해서 다양한 청색을 만들었지.”  

         

“정말 이택균의 책가도에도 값비싼 울트라마린을 사용한 것인가?”

    

“아닐세. 문화재청에서 안료의 성분분석을 한 결과, 1850년경 서양에서 개발된 합성 울트라마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

그러니까 이택균은 천연 석청 대신 합성 울트라마린을 사용한 것이네.

당시 조선에서는 합성 울트라마린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고, 100% 중국을 통해 수입했지.”                                                                                                                         

[요하네스 베르메르/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캔버스에 유채/ 44.5×39cm/1665년경/마우리트하위스, 헤이그. 유명한 그림인데, 제목과 다르게 파란색 터번이 인상적이다. 이 터번에 값비싼 울트라마린을 칠했다. 베르메르는 울트라마린을 너무 좋아해서 재산을 탕진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택균은 가짜 울트라마린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속인 것이 아닌가?

천연과 합성 울트라마린의 가격은 엄청나게 차이가 나네. 물감 값은 그대로 작품가격에 반영되지. 당연히 구매자는 천연 울트라마린 물감을 사용했다고 여겨서 비싼 돈을 지불했을 것이 아닌가. 이거 순 사기꾼이네.”   

   

“흥분하지 말게. 속이고자 했으면 울트라마린 물감을 조금만 사용했을 것이네. 그림을 자세히 보시게. 넓은 배경에 아낌없이 칠했네. 이렇게 많이 사용하면 누구라도 의심하게 되지. 이택균은 인공 울트라마린을 사용한 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을 것이네.”  

   

“그러고 보니 저렇게 울트라마린을 많이 사용했으면 누구라도 의심했을 것이네. 더구나 울트라마린을 사용하지 않은 그림과 비교하면 금방 들통이 날 것이고.”

    

“이택균이 합성 울트라마린을 사용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네.”     

[이택균/책가도 10폭 병풍/290*417.8/비단에 채색/1871년 이후/조선/서울 공예박물관 소장.

궁중화원이었던 이택균의 인장이 있다. 책장의 배경을 모조리 밝은 울트라마린으로 칠했다. 이를 통해 뒤가 막혀 답답했던 것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동시에 작품의 격을 높이고 공간을 확장했다.]     


“또 어려운 미술조형 문제인가?”  

   

“어렵긴 하지만, 듣다보면 묘한 흥미가 생길 것이네.

배경에 칠한 울트라마린을 자세히 보시게. 상당히 밝은 청색이지. 그런데 사물의 뒤쪽인 배경에 밝은 청색을 칠하는 것은 상당한 모험일세.”

    

“책과 사물보다 배경의 청색이 먼저 보이는군. 자칫 주객이 바뀌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구먼.”

    

“정확히 보았네. 이택균은 이런 조형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는 말이 생각나는군. 조형상식을 무시하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그게 뭔가?”    

 

“우리민족의 정서와 맞지 않기 때문이지. 이게 무슨 말이냐면,

우리 전통그림은 공간이 막힌 구도를 좋아하지 않네. 산수화를 보면 구름, 안개처럼 보이는 여백을 통해 깊고 먼 공간을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지.

하지만 책가도는 일종의 장식장으로 뒤가 막혀 상당히 답답한 느낌을 주지. 이런 그림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숨이 막힐 지경이라네.

답답한 책장을 없애고 책과 사물을 표현한 ‘책거리 그림’이 유행할 수 있었던 바탕에도 공간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네.”         

[상단, 중단그림-배경을 갈색이나 어두운색으로 칠했다. 이는 서양화법의 원근 투시법이나 명암법의 원리에 맞다. 하지만 공간이 막혀 답답한 느낌을 준다.

하단그림은 아예 책장을 버리고 책과 각종 사물을 펼쳐 놓았다. 공간이 확장되어 답답한 느낌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밝은 울트라마린을 칠하면 배경이 마치 하늘처럼 보여 답답했던 공간이 뚫린다는 말이 아닌가?”

    

“정확하네. 밝은 울트라마린은 책가도의 공간을 확장한다는 조형적 효과를 노린 것이지.”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뭔가?”    

 

“이택균은 책가도에 답답한 시공간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책거리 그림처럼 책장을 버리고 싶지 않았지.

책가도는 이택균 그림공방의 얼굴이자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네. 서양화법이 들어간 책가도는 그리기 어려워서 화가의 기량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지. 그래서 책거리 그림보다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었네.”  

    

“화가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구먼.

그런데 말이지, 이런 조형 문제라면 굳이 울트라마린을 사용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회색이나 갈색 황색 같이 다른 색을 칠하면 될 것이 아닌가?”  

   

“탁월한 질문일세. 여러 밝은 색을 두고 굳이 울트라마린을 선택한 이유는 철학 문제 때문일세.”

    

“철학 문제라고? 울트라마린을 칠하는 것에 무슨 철학의 문제가 있단 말인가?”  

   

“이택균은 책장의 배경을 단순히 막혀있는 벽이 아니라 공간으로 표현하고 싶었네.  

어쨌든 막힌 배경을 뚫으면 빈 공간, 여백, 하늘이 되어 버리지.

우리그림에서 보통 빈 공간은 황색이나 감색(紺色)을 칠한다네. 참고로 우리그림의 바탕색은 황색이네.

그런데 황색은 누런 책과 색이 겹치네.

배경과 책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엉키는 문제는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어. 그래서 황색은 탈락했지.     

빈 공간을 상징하는 황색을 제외하니 남은 색은 감색(紺色)밖에 없었지.

하지만 감색은 너무 어두워서 공간을 확장할 수 없었지.    

  

이때,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지. 책가도는 그야말로 선비, 양반의 그림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조선의 선비가 가장 좋아하는 색을 칠하면 될 것이고, 최종적으로 울트라마린을 선택한 것일세. 엄밀히 말하면, 울트라마린은 감색을 대체한 색이지.”         

[이형록/책가도/비단에 색/153.0×352.0cm/조선 19세기.

이형록의 인장이 있는 또 다른 책가도이다. 이 책가도의 배경은 녹색으로 칠했다. 청색은 녹색과 파랑의 혼용이다. 이택균은 양심의 색이자 우주의 색인 청색을 칠한 것이지 파랑만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선비와 양반이 가장 좋아한 색이 울트라마린이라는 말은 뭔가?”  

   

“이것은 철학, 미학과 관련이 있네.

조선 시대, 선비들이 가장 좋아했던 개념은 청(맑을 청, 淸)이었지.

청(淸)은 군자의 경지를 뜻했네. 훌륭한 관리를 청백리라고 했고,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관리를 청직(淸職)이라고 불렀지.

그런데 맑은 청(淸)은 추상 언어로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지 않네.

철학적 개념인 맑은 청(淸)을 현실의 색으로 유추한 것이 푸를 청(靑), 청색이지.

녹색과 파랑을 혼용하여 사용한 청색은 군자의 색이자 양심의 색으로 자리 잡았네.”  

   

“덧붙이자면,

조선 후기부터 하늘, 우주의 색은 감색에서 청색으로 변화한다네.

양심의 색은 청색이고, 우주는 양심이 있는 자리라는 논리가 성립되었기 때문이지.

이 때문에 감색으로 칠하던 [오봉도]의 하늘이 짙은 청색으로 바뀌기도 했지.

책가도는 철학을 통한 태평성대의 구현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청색은 책가도의 철학적 가치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면서, 서양화법과 전통사상을 자연스럽게 통합한 신의 한 수였다네.

이택균은 최종적으로 청색을 선택하고 배경에 녹색이나 파란색을 칠한 책가도를 창작했지.

이 중에서 시원한 눈 맛을 내는 파란색을 선호했네.”  

   

“정리해보면, 처음에는 어둡고 칙칙한 색을 칠했는데, 공간이 막혀 답답한 조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마침 값싼 합성 울트라마린이 수입되어 칠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이택균은 진작부터 배경에 청색을 칠하고 싶었네. 그래서 청색 대신 녹색을 칠한 책가도도 있다네.

천연 울트라마린, 즉 석청은 금값보다 비싼 물감으로, 국가가 운영하는 도화서에서도 조금씩만 사용하고 관리를 철저히 할 정도였지. 청색을 칠해야 할 자리에 녹색으로 대체한 경우도 많았다네.

만약 석청을 사용해 넓은 배경을 칠하면 그림 값은 상상을 초월할 것일세.

사용하고 싶어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지.

합성 울트라마린은 1850년 쯤에 개발되어 20년 쯤 지나 중국으로 통해 수입되었네. 처음에는 사찰의 불화나 단청에 사용하여 검증을 마치자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서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했네.”     


“어쨌든, 이택균은 값싼 인공 울트라마린을 사용하고 비싼 석청을 사용한 것처럼 위장한 셈이네?”

     

“그렇다고 이택균을 사기꾼으로 볼 필요는 없네.

합성 울트라마린의 사용으로 작품은 수준은 올라가고 책가도의 가격은 석청을 사용할 때보다 훨씬 내려가 더 많은 사람이 구매할 수 있었네.

조선 말기에 인공물감과 값싼 화지의 수입으로 대중그림인 민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네. 미국식 팝아트가 유행할 수 있는 바탕에도 값싸고 사용법이 쉬운 아크릴 물감이 있었지.”   


“청색을 내는 울트라마린이 양심의 색이라고 했는데, 혹시 푸른 기와집인 청와대(靑瓦臺)와도 관련이 있는가?”
 

“물론이지. 청와대는 백성들의 삶을 평안하게 하는 곳이니, 반드시 양심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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