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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Oct 16. 2023

신윤복의 미인도 3화

일재(逸齋) 신한평(申漢枰, 1725년~1809 이후)의 집안은 화원 가문이었다.

종조부 신세담(申世潭), 당숙인 신일흥(申日興)이 화원을 지냈다.

신한평은 어진 제작에 3차례 참여한 어용화사로 종6품의 벼슬을 지냈다.

[도화서] 화원 중에 뛰어난 실력자를 뽑은 [자비대령화원]으로 26년간 봉직할 정도로 탁월한 화가였다.     


신한평은 섬세한 정서의 소유자였으며 원칙적인 사람이었다.

여러 갈래의 그림에 능력을 보일 정도로 성실하기도 했다.

신한평의 성정은 고운 선묘와 단아한 채색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정조 임금이 [자비대령화원] 등급시험인 녹취재의 시험문제로 [책가도]를 내었고,

신한평과 이종현(李宗賢) 등이 책가도를 그려 제출하였다.

하지만 이들 그림이 형편없다고 판단한 정조는 자비대령화원 전원을 파면하고 귀양을 보냈다.     

이런 정도의 일로 화원 전원에게 파면과 귀양이라는 문책을 내리는 것은 과한 조치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양이 풀리고 복권이 되어 자비대령화원으로 돌아왔다.

정조 임금은 나태한 화원들의 군기(?)를 잡은 것이다.    

 

이 일로 신한평은 큰 충격을 받았다.

신한평은 [책가도]를 잘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신한평은 정조 임금이 원하는 새로운 [책가도]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는구나. 나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신한평의 그림으로 추정하는 화조도이다. 선묘가 곱고 화면구성은 단아하다. 신한평의 성품도 이러할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신한평의 특별한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신한평은 안정된 중산층의 삶을 살았고 이런 삶에 만족했다.


신한평은 슬하에 많은 자녀를 두었다.

이 중에서 다섯째였던 신윤복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천부적 재능을 보였다. 

신한평은 신윤복에게 화원 가문을 잇게 할 마음을 굳혔다.  

   

신윤복은 1758년, 영조 임금 재임기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신윤복의 어릴 적 이름은 신가권(申可權)이었는데 이후 윤복으로 개명했다.

정조 임금 즉위 초기부터 창작 활동을 시작해 1800년, 순조 임금 초기에 전성기를 누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윤복의 사망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략 1814년 전후일 것이다.   

  

신윤복은 엄격하고 체계적인 미술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신한평은 영조의 어진을 두 번이나 그린 어진화사였던 만큼 인물화의 대가였다.

아들 신윤복은 김홍도 화파의 진경산수화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인물화는 사물의 핵심요소를 찾아 묘사하고, 산수화는 구도를 짜고 시공간을 만드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 둘의 결합으로 신윤복은 조선 최고의 화원으로 성장했다.     

[신한평/자모육아. 김홍도의 영향 때문인지 배경이 생략되었다. 인물의 표정과 자세를 표현하는 능력은 탁월하다. 신한평은 왕의 초상을 모사한 어용화사였으며 풍속화 실력도 뛰어났다. 신윤복이 인물 중심의 풍속화는 아버지 신한평의 영향이 크다.]      


신윤복은 어렵지 않게 [도화서] 시험에 합격하여 화원이 되었다.

조선 시대의 모든 관직은 세습되지 않는다. 모두 과거시험을 통해 선발한다. 

도화서 화원도 당연히 세습직이 아니다.   

  

화원의 선발은 시취(試取)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잡과는 역관, 의원, 음양과(감목관), 이과(서리)를 뽑는 과거시험인데, 시취는 그보다는 한 단계 낮다.

화원은 특별한 재능을 요구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시험 과목은 대나무, 산수, 인물과 동물, 화초 등 네 과목 중에 두 가지를 선택한다.

신윤복은 산수와 인물을 선택하여 최고점을 받았을 것이다. 

    

[도화서]에는 15명 정도의 화학생도(畵學生徒)가 있었다.

화학생도는 요즘 말로 미술지망생이다.

재능이 뛰어난 10대 중후반의 학생들을 선발하여 국가기관인 [도화서]에서 체계적으로 양성한다.

조선 최고의 화원에게 교육을 받으며 현장실습을 한 생도들은 정식화원이 될 가능성이 컸다.

신윤복이 화학생도였을 가능성은 크지만, 구체적 기록은 없다.   

  

신윤복에 관한 기록에서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첫째, 도화서 화원의 활동기록이 없다. 국가 행사를 기록한 의궤에도 이름이 없다. 반면 아버지 신한평은 왕조실록이나 의궤에 이름이 나온다. 

신윤복이 도화서 화원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벼슬을 했다는 것이다.   

  

둘째, 신윤복은 무관직인 첨절제사(僉節制使)라는 벼슬을 지냈다.

첨절제사는 종3품의 관직이다.

[도화서] 수장인 별제가 종6품이고, 평화원의 경우는 종 9품이다.

조선 최고의 법전(法典)인 경국대전에는 화원의 최고 품계를 종6품으로 규정하고 있다.

단원 김홍도가 공을 세워 받은 관직은 종6품의 현감과 찰방이었다.

신윤복이 어떤 공을 세웠기에 갑자기 종3품의 벼슬을 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조선 후기 화원이었던 김득신, 이인문, 이성린 등은 종3품 첨사에 제수되었으며, 허담은 종2품에, 장준량, 김화종, 김순종은 정2품의 품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추정컨대,

실제 근무하거나 녹봉을 받는 벼슬이 아니라 명예직이거나 후손들이 족보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신윤복은 어릴 적부터 [도화서]에서 활동했다.

국가의 큰 행사에 참여하여 의궤제작에 참여했다. 백성의 삶을 그리는 풍속화나 국가 장식화를 제작하면서 경력을 쌓아 나갔다.     

[신윤복의 단오라는 작품이다. 단원 김홍도와 달리 진경산수화로 배경을 그렸고 담채가 아니라 진채를 사용했다. 수묵과 채색을 결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도화서]의 일상은 지루했다.

왕실에서 사용할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거나 출판용 삽화를 그렸다. 때론 편지지, 책을 만드는 종이에 줄을 긋는 일로 몇 달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화원 신분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할 수는 없었다.    

 

역관인 사촌 형이 청나라에서 그림과 물감을 가져와 신윤복에게 보여주었다.

신윤복은 청나라 그림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진경산수화보다 이런 화려한 그림이 좋더군.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불필요한 묘사와 경직된 인물, 화려한 채색은 작품의 본질을 흐릴 뿐입니다. 중국의 그림은 조선과 달리 청량함이 없어 답답합니다. 조선 그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여기 형형색색 물감은 어떤가?”     


“조선에서는 좋은 물감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수묵화와 채색의 결합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무튼, 청나라에서 경험한 이야기나 해 주세요.”    

 

어느 날, 아침 문안을 드리는 자리에서 신윤복은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아버님. 소자 도화서를 그만두려 하옵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화원 가문이다. 도화서 화원은 명예이고 삶의 가치인데 어찌 그리 말하느냐?”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도화서가 너무 답답합니다. 소자는 이미 도화서에서 공을 세워 벼슬을 지냈습니다. 이 정도면 가문에 누가 되진 않을 겁니다.”  

   

“그래, 뭐가 너를 답답하게 하느냐?”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북쪽과 서쪽에서 거대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바람을 따라가고자 합니다.”     


신윤복의 대답에는 단호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신한평은 아들이 이미 결심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성실하고 원칙적인 삶을 추구했지만, 아들에게는 강요할 수는 없었다.

어릴 적부터 아들은 나비와 꽃을 좋아했고 아지랑이 같은 바람에도 흔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집안은 유복하고, 나 또한 붓을 놓지 않았으니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네 그림 실력이면 도화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림도 중요하지만, 서책은 곁에 두고 반드시 읽어라. 이제 바람을 따라가거라.”    

 

도화서를 그만둔 신윤복은 바람을 따라 지인들을 만나고, 바람을 느끼려 술을 마셨다.

하지만 바람을 잡으려 할수록 갈증은 더해졌다.

바람은 손아귀를 빠져나가 그림 속에 묶고 새겨둘 수 없었다.

신윤복은 그림을 그리는 손재주의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바람을 붙잡는 것은 붓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다.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진 바람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삶 속에 그물이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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