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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Oct 23. 2023

신윤복의 미인도 4화

 [도화서]를 그만둔 신윤복은 한양의 시장과 뒷골목을 돌아다녔다.

그곳은 신윤복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별세계였다.

청나라에서 수입한 귀한 물건이 가득한 상점, 밀가루로 지진 각종 전과 빈대떡을 파는 전집, 한강에서 잡은 각종 생선이 있는 어물전, 쇠고기를 파는 육전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오고 간다.

엄청난 양의 식재료를 실은 나귀가 지나가고 백정들은 쇠고기를 담은 항아리를 지고 나른다.

한껏 빼입은 기생들이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지나가고 여관에는 보부상들이 짐을 쌓아두고 곰방대를 물고 있고, 한쪽 주점에는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양의 시장풍경을 그린 삽화]


저녁이 되면 사설 기생집에서 풍악 소리가 울리고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매일 도박판이 열리고 술과 싸움과 욕설이 난무했다.

두리번거리며 걷은 사람들,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사람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싸우는 사람들, 말리는 사람들, 기생을 끌어안고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 육모방망이를 든 우락부락한 덩치들, 접시를 돌리고 재주를 넘는 사람들, 혁필로 알록달록한 글자를 쓰는 사람들, 원숭이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

골목 안의 사람들의 목소리는 크고 몸짓은 과도했으며 눈빛은 욕망으로 이글거렸다.   

       

역관 출신인 사촌 형은 재미있다는 듯이 골목 여기저기에 데리고 다녔지만, 신윤복은 처음 보는 광경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청나라는 대만을 근거지로 반항하던 명나라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해상무역을 금지하는 해금 정책을 편다.

이 정책은 명나라가 왜구를 막기 위해 처음 시작했다.

1684년, 대만이 항복하여 해금 정책이 일시 완화되었지만 18세기 중반부터 쇄국정책을 펴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일본은 청나라와 해상무역이 끊기자 조선을 통한 무역에 의존했다.

이 당시 조선은 청과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었다. 정부에서 돈을 빌려주고 중개무역을 권장할 정도였다.

    

중국말을 알았던 역관과 서얼, 상인들을 중심으로 신흥부자들이 나타났다.

조선 후기, 조선에서 큰 부자들은 모두 중인계층이었다.

수십 칸짜리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고, 집안에는 값비싼 채색화와 청나라에서 수입한 명품들로 가득 채웠다.

이 중인계층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심을 지키지 않는다고 공권력으로부터 탄핵을 당할 일이 없었다.

오히려 막대한 자금으로 관료들을 매수하고 선비들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김억은 영조 때 사람이다. 집이 부유하여 호사한 성품에 노래와 여색을 더할 나위 없이 즐겼다.

대부분 사람은 흰옷을 입는데 김억 혼자서 눈부신 채색 비단옷을 입고 다녔다.

칼에 대한 벽(미쳐)이 있어 구슬과 자개로 장식한 칼들을 방과 기둥에 걸어놓고 하루 한 개씩 바꿔 찼는데 일 년이 돌아와도 그 많은 칼을 다 지 못했다고 한다.

평소 악원에서 교습이 있는 날이면 수업을 받는 기녀들을 구경하며 즐긴다.

그가 총애하는 기녀는 모두 여덟 명이었는데 서로를 알지 못하게 할 만큼 수완이 좋았다.

하루 저녁은 여덟 기녀를 모두 불러서 술을 마시며 놀았다.

기녀들 각자 총애받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해 전혀 투기하지 않았다.

그의 권모술수가 대개 이와 같았다.’(조희룡/호산외사/1789년)    

 

‘저것은 모두 가식이다. 속에는 욕심이 가득하면서 억지로 조심하니 이익이 될 것이 없다.

이것은 우리처럼 솔직하여 옷을 벗고 싶으면 벗고 신발을 벗고 싶으면 벗으며, 노래하고 웃고 성내고 꾸짖는 것을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먹고, 마시며 여자를 취하기 위해 돈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다.’(이덕무/사소절/1775년)   

  

정조 때부터 관노를 면하는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1801년, 정조대왕이 죽고 11세의 어린 순조(재위 1800~1834)가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렸기에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3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순조는 즉위하자마자 관노비를 혁파하였다.

    

“백성들은 귀천이 없어야 한다.”     


궁궐과 팔도 관청에 속한 약 6만 6000여 명의 노비 문서를 돈화문 앞에서 불태웠다.    

 

사촌 형이 주점으로 이끈다.

사촌 형은 어릴 때는 얌전하게 공부만 했다. 어렵게 역관 시험에 통과하여 사신단을 따라 중국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중국에서 물건을 사다가 조선에 비싸게 팔아 이윤을 남겼다. 심지어는 왜국까지 물건을 납품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다.   

  

“노비를 면하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닙니까?”  

   

“꼭 그렇지도 않다. 얼마 전 성균관을 후원한답시고 쇠고기를 팔아 엄청나게 이윤을 남기던 관노들이 일이 끊겼다며 눈물을 질질 짜더라고.

이제부터 세금을 내고 노역, 군역도 져야 하니 처자식 먹여 살릴 길이 막막하다며.”   

  

“면천 된 관노들은 어떻게 생계를 이어갑니까? 양민들처럼 농사지을 땅을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대부분 계약직으로 다시 관청 일을 한다고 하더군.

사실 이 일은 정순왕후의 탁월한 정치력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네. 관노를 면천해서 민심을 얻으면서도 더 많은 세금을 걷어 왕실의 힘을 키우는 일거양득일세.

양민이 된 관노들은 세금과 노역, 군역을 져야 하네.

관청에서 나오는 돈만으로는 살기 어려울 것이야.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굴 것이 뻔하네. 한양에서 돈을 벌 방법은 장사나 노름밖에는 없네.”

    

“형은 어떻게 그 많은 재물을 모았지요?”  

   

“은과 인삼이지. 일본에 인삼을 팔아 은을 받고, 이 은으로 청나라에서 물건을 사서 비싸게 팔아 이윤을 내지.

요즘은 해외무역보다는 내수시장이 잘 된다는군. 나도 곧 역관 일을 그만둘 생각이다.”

    

“그만두고 뭘 할 생각이세요?”   

  

“여자를 사서 술집을 차릴까 한다. 노름판도 열고.”     


“여자를 산다는 말은?”     


“아, 오해하지 마라. 고용한다는 말이다. 몇몇 기생들을 알고 있다. 얘들은 원래 관기 출신이라 콧대가 높지. 춤과 노래, 악기도 잘 다뤄 예기(藝妓)라고 부르기도 해.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국가에서 관노들을 모두 면천(免賤) 했잖아. 말이 면천이지 그냥 쫓겨 난 거야. 졸지에 실업자가 된 거지.

걔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일 빼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선금을 주고 계약을 했다.”    

 

조선의 기생(妓生)에 대해 알아보자.

관기 제도는 국가 행사에 필요한 춤과 연주, 노래가 필요했기 때문에 생겨났다.

따라서 기생은 노래, 기악, 학문, 그림, 글, 화술, 단장 등 모든 것에 능통한 종합예술인이었다.

현대 전통예술(춤이나 음악)의 대부분이 기생들에 의해 전승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안릉신영도 속의 기생 모습이다. 18세기 말, 현감 행차에 무용 복장을 한 기생(관기)이 말을 타고 있다. 나귀를 탄 아녀자와 다르게 말을 탈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안릉신영도는 1785년 요산헌(樂山軒)(성명 미상)의 부친이 황해도 안릉의 신임 현감으로 부임하는 광경을 담은 행렬도이다. 이때 요산헌이 그 행렬의 광경이 매우 성대한 것을 보고 다음 해인 병오년(丙午年)(1786)에 화공 김홍도에게 부탁해서 이를 그리게 했다는 무신년(戊申年)의 제발이 있다.]      

[조선 말기의 기생 모습이다. 이 당시 기생은 천민이 아니라 평민 신분이었다. 배경의 곽분양행락도로 보이는 병풍은 높은 관직이나 큰 부잣집 잔치를 의미한다.  공연하고 난후 기념으로 찍은 것이다.]   

  

소속에 따라 관기(官妓)와 사기(私妓)로 나뉘었다.

관기는 관청에 소속된 천민이었고, 사기(私妓)는 평민이었다.

집안이 몰락하여 관기가 된 경우는 주로 바느질 같은 잡일을 했다.

관기는 다른 관노처럼 가정을 꾸렸으며 재산을 모아 상속했다.     

조선은 장신구까지 제재할 만큼 사치 금지법이 엄격했는데, 기생은 예외였다.

기생은 멋있게 차려입고 생활했으며 이들이 입는 양식의 옷과 화장은 금세 유행되었다.     


조선은 매매춘을 법으로 금지했다.

국가에 소속된 기생의 매춘은 불가능했다.

기생은 예술가로서 궁궐이나 관아의 가례에 동원되었다.

무엇보다 국가 공식 행사에 매춘부를 동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우리 동방(東方)이 기자(箕子) 이래로 교화(敎化)가 크게 행하여져, 남자는 열사(烈士)의 풍(風)이 있었고 여자는 정정(貞正)의 풍이 있었으므로 역사(歷史)에도 소중화(小中華)라 칭하였습니다.     

요즈음 음란한 여자가 관청이나 군영 근처에서 활동하고, 봄과 여름에는 세금을 거두는 장소에 가고 가을과 겨울에는 절간에 놀러 가 음란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여 교화를 오염(汚染)시킨다고 합니다. 이를 감찰하여 엄중하게 논죄해야 합니다.

유녀(遊女) 혹은 화랑(花娘)이라 칭하며 음란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이를 금제(禁制)하는 조목을 뒤에 자세히 기록합니다.”(성종실록)     

[기생학교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다. 기생은 한자, 한글을 배워 글을 읽었고 종 춤과 악기를 배웠다. 기생들이 선비의 문인화처럼 그림을 배우는 것은 인성을 기르기 위함이다. 기생학교는 요즘으로 치면 예술대학이다.]     


기생은 창녀가 아니다.

조선 시대의 창녀는 들병이, 화랑유녀, 작부 등으로 분화되어 있다.

들병이는 들병에 술을 담아 떠돌며 파는 이들이었는데 매음도 했다.

화랑유녀는 관청이나 사찰 주변에서, 작부는 술집에서 술과 몸을 파는 여자이다. 사당패도 떠돌아다니며 공연하면서 매춘을 겸했다. 이게 사회문제를 발생시키자 남자들로 구성된 남사당패가 만들어진다.  

   

1801년에 관노를 면천 하면서 기생도 평민이 된다.

국가의 행사에 필요한 기생을 모집하고 연습시키는 일은 하급관리가 했다. 기생의 춤이나 외모, 인성, 연출력 따위를 평가하여 상급, 중급, 하급으로 나누었다.

상급기생(일패기생)은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궁궐의 행사에 동원되고 교육도 하는 연예인의 삶을 살았다.     

관기 중에는 민간업자가 만든 기방(妓房)에 소속된 기생이 되기도 했다.

기방에는 한두 명의 기생이 가무 하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모여들었는데, 일종의 소극장 공연 같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기생은 일본의 유곽이나 사창가 행태에 오염된다.

지배자인 일본인의 수준에 맞춰 기생문화를 왜곡한 것이다.

아직도 사극이나 영화에는, 여러 기생이 손님들 곁에 하나씩 붙어 앉아 술을 따르며 춤추거나 몸을 만지는 일제강점기 창녀의 유곽 문화를 표현하고 있다.    

 

신윤복은 친척 형이 마련해준 술집의 구석 방에 들어앉았다.     

윗목에는 책상과 서책을 놓았고 한쪽에는 종이와 먹, 화지와 물감을 펼쳐놓은 소박한 방이었다.

낮에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렸다. 낮잠을 자고 동네를 산책했다.

저녁이 되면 사촌 형을 따라 주점, 기생집, 도박판, 풍류방 같은 곳을 들락거렸다.

도화서 출신의 화원이라는 신분을 가진 신윤복을 사람들은 좋아했다.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이다. 술집 앞에서 싸우는 사람들 모습이다. 벗었던 웃옷을 입으며 의기양양한 사내가 승자이다. 붉은 옷을 입고 말리는 사람은 일명 왈짜라고 불리는 하급관리일 것이다. 신윤복이 이런 생생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충분한 현장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라는 사람, 중인출신 문인, 자칭 협객이라는 사람들, 왈짜라 불리는 하급 공무원, 관직에 나가지 못한 한량, 돈 많은 부모 아래 자라 놀고먹는 착하고 철없는 젊은이들,

소리꾼, 재주꾼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

술값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즉석에서 쓱쓱 그린 그림에 사람들은 환호했고, 몇몇은 그림을 주문하기도 했다.     

특히 신윤복은 기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여타의 장사꾼과는 달리 예의 바른 품행과 뛰어난 그림 재주는 기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윤복을 틈나는 대로 한양의 뒷골목 사람들을 그렸다.

주점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 싸우는 장면, 기생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 기생들의 생활 장면, 기생의 나들이 장면 따위를 화폭에 담았다.     


어느 순간 자신도 뒷골목의 한 부분이 되어 가는 것을 느끼면서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신윤복은 자유분방하고 원초적 욕망이 분출하는 한양의 뒷골목 생활이 좋았다.

그렇게 꿈결 같은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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