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가 사회 비판이라면, 신윤복은 풍속화를 통해 ‘현실의 긍정’을 표현한다.
[신윤복/이부탐춘(嫠婦耽春). 사람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지만 양심과 사회적 질서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신윤복 풍속화는 성적 해학이 있다. 해학은 웃음을 유발한다. 신윤복은 사회적 질서라는 숨김과 욕망이 드러나는 아슬아슬한 경계가 웃음의 지점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작품은 마치 순간을 포착하여 그린 것처럼 표현했다. 하지만 실상은 여러 모습을 조합하고 상상을 가미한 것이다.]
신윤복이 표현하고자 하는 현실은 한양 뒷골목에서 꿈틀거리는 인간의 욕망이다.
특히, 인간의 원초적 욕망 중에 가장 강렬한 ‘성적 욕망’을 밖으로 드러내어 사회화한 것은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신윤복의 풍속화를 유럽의 르네상스 미술과 비교하기도 한다.
의미가 있다.
르네상스 화가들은 신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관점을 그림 속에 표현하고자 했다.
신윤복의 풍속화에도 독특한 관점이 들어있다.
성리학이라는 철학의 관점도 아니고 욕망의 존재인 인간의 관점도 아니다.
철학을 체득한 사회적 인간의 관점으로 유전자에 박혀있는 원초적 욕망이 아니라 사회에서 발현되는 사회적 욕망이다.
[19세기 말의 인상주의 화가 로트렉의 작품이다. 방식은 다르지만, 내용은 신윤복의 작품과 비슷하다. 로트렉은 프랑스의 하류 유흥가에서 놀았지만, 신윤복은 한양 종로 골목에서 놀았다. 해학과 풍류를 담은 신윤복의 그림이 100여 년 앞선다.]
산책길에 서당 훈장인 선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래에 글을 쓰거나 철학을 논하는 선비를 만난 적이 없었다.
신윤복의 주변에는 대부분 장사꾼이었고 돈, 여자, 술, 도박, 노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가끔 철학이나 정치와 같은 주제가 나오면 사람들은 애써 외면했다.
신윤복은 단원 김홍도가 그린 [서당]이란 풍속화를 떠올리며 피식 웃는다.
“조선에서 하늘을 찌를 듯이 유명한 화원인 단원 선생께서 그린 풍속화에 훈장님 같은 분이 나옵니다.
과제를 하지 않아 회초리를 맞고 우는 아이를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 저도 몰래 웃음이 났습니다.”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회초리는 개인의 폭력이 아니라 사회의 규율입니다. 아이도 아파서가 아니라 부끄러워 우는 것입니다. 사회 규율과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사람의 모습을 한 짐승일 뿐이지요.”
“가끔 제가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것을 느낍니다.
몸을 따라가면 편안하고 삶의 의욕이 생깁니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알 수 없는 허무가 밀려오고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사람은 우주적 본성인 인의예지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하지만 인의예지는 욕망 덩어리인 몸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지요.”
“인간의 몸은 어떤 존재입니까?”
“흔히 기(氣)라고 하는 칠정(七情-희노애락애오욕)의 총체입니다.
이 칠정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성 욕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칠정은 나쁜 것인가요?”
“칠정은 인간이 가진 본능이기에 나쁘거나 좋다고 정의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칠정을 조절, 통제하지 않으면 전쟁, 약탈, 살인과 같은 지옥이 펼쳐질 것이요.”
“인의예지라는 양심과 칠정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합니까?”
“이론적으로는 이 둘의 조화와 균형을 잡는 중용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늘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좋은 세상과 나쁜 세상은 작은 차이입니다. 양심이 주도권을 잡는가, 칠정이 주도권을 잡는가로 결정되지요.”
늦은 저녁을 먹는데 기방(妓房)의 머슴이 편지를 가져왔다.
신윤복은 간단한 화구를 챙겨 따라나섰다.
기생집의 널찍한 방안에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상에는 갖은 요리와 술병이 놓여있었고 술 시중을 들던 두 명의 기생들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묻어났다.
[신윤복의 풍속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선이다. 신윤복은 등장인물을 통해 시선을 만들어내고 감상자는 시선을 따라간다. 그림 속의 선비는 활쏘기 연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 개울에서 빨래와 머리를 감고 있는 여성을 보고 있다. 선비는 애써 눈을 돌리지 않으며, 아낙네들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두 장면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날 조짐도 없다. 선비의 활쏘기는 인격 수양의 방편이다. 빨래하고 머리 감고, 목욕하는 것은 더러운 욕망이 아니라 생활 욕망이다. 신윤복은 이 둘이 자연스레 공존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혜원, 어서 오게. 비단 장사를 하는 친구가 나쁜 일이 있어 이렇게 모여 화풀이 술자리를 하는 중일세.”
“자네가 그 유명한 도화서 화원 출신 신윤복이라지. 내 술 한잔 받게.”
신윤복이 술잔을 건네받기도 전에 상인이 떠든다.
“내가 중국에서 고급 비단을 수입하여 궁궐에 납품하는 일에 얼마나 공을 들인 줄 아는가? 예조 관료들에게 먹인 술이 몇 말은 넘네.
망할 놈들. 뭐? 공정 입찰을 하라고? 입찰하려면 미쳤다고 돈과 술을 처먹일까.”
“내가 할 말은 아니네만, 특정 상인에게만 납품을 허용하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무너트린 게 우리 상인들 아닌가.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도 점포를 열고 장사를 하게 되었네. 그런데 자네는 마치 폐지된 금난전권을 달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네.”
“금난전권을 폐지한 이유가 뭔가? 금난전권은 이윤이 별로 없는 일종의 물물교환에 가깝네. 우리는 이윤을 따르는 장사꾼이네. 독점이든 뭐든 상관없네. 이윤의 크기가 곧 장사의 핵심이란 말일세.
세상이 바뀌고 있네. 이윤이 곧 세상의 왕일세.”
“내가 북경에 있을 때, 비단길로 도자기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 들었네. 서양에서 장사꾼들이 역모를 일으켰다는군. 왕의 목을 작두로 잘랐다는 소문도 있네.”
[당시 부자였던 중인들이 좋아했던 그림은 청나라에서 유행하는 그림이다.
상단-곽분양행락도는곽분양이라는 사람이 호의호식하며 천수를 누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지연도는 도교적인 내용이 가득하다. 도교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가장 잘 드러낸다.
하단 우측-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적벽대전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대중소설을 그림을 표현한 이런 작품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요즘으로 치면 유행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모습을 따라 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단 좌측-호렵도는 사냥하는 그림이지만 인간의 본성을 자극한다. 일종의 스포츠에 중독되는 것과 같다.]
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시기 청나라는 강희제, 건륭제에 의해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정조 임금의 재임 기간은 1775~1800년이며, 프랑스 혁명 기간에 조선은 전성기였다.
“성리학이 밥 먹여주는가? 방바닥에 앉아서 글만 읽는다고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는가.
우리 같은 장사꾼들 발품을 팔고 고생고생해서 물품을 돌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먹고사는 것이네. 이 나라는 공자 왈 맹자 왈 때문에 망할 것이네.”
“그래도 성리학 때문에 나라가 이만큼 사는 게 아닌가. 말조심하게.”
오고 가는 말이 거칠어지자 기생들이 슬며시 나갔다.
“성리학과 백성 중에 뭐가 중한가?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우리만 우물 속에 개구리처럼 움츠리고 있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시게. 우리가 장사를 하는 것은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닐세. 처자식 호강시키며 떵떵거리며 살기 위함이지.”
“그야...뭐. 그렇지.”
“자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소리 그만하고 막잔을 드세나. 내 조만간 크게 술판을 내겠네. 추사 선생의 제자라는 문인에게도 이미 연통을 넣었네.”
그제야 신윤복에게 눈길을 돌린다.
“혜원, 오늘 얘기는 못들은 걸로 하세. 혜원 그림이 저기 붙어있네. 자네가 그린 풍속화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네. 무엇보다 술맛이 나네. 껄껄껄.”
“그나저나 그림은 좀 팔리는가?”
신윤복은 불쾌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술잔을 비웠다.
그즈음 신윤복의 풍속화가 청계천 광통교에 나돌았다.
혜원의 풍속화는 기생집에서 인기가 높았다.
점주들은 신윤복의 풍속화로 방안을 장식했으며 화첩으로 묶어 손님방에 내놓기도 했다.
몇몇 화상들이 수군거렸다.
“혜원의 그림이 서화사(書畵肆)뿐만 아니라 화공이나 떠돌이 환쟁이 그림을 파는 지전에도 나돈다더군.”
“그런 작은 풍속화를 팔아서 돈을 벌 수 있겠는가? 큰 그림을 비싸게 팔아야지. 소문에는 부자들과 어울린다던데, 그중에서 혜원의 그림을 사는 사람이 없나 보지?”
“억척스럽게 돈만 번 구두쇠들일세. 그 사람들이 그림 보는 안목이 있겠나?
그 사람들은 조선에서 그린 것은 싸구려라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네.
청나라에서 들어온 [호렵도], [요지연도], [곽분양행락도], [적벽대전도] 같은 그림이면 환장하지.”
“그나저나 요즘 혜원이 주점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여럿이네. 뭔 일이라도 있는지 걱정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