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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Nov 06. 2023

[신윤복의 미인도 6화]

도화서 동료가 찾아왔다.

매서운 눈초리의 남자가 동행했다.

누군지 물어보지 않았고 소개하지도 않았지만, 신윤복은 사헌부 관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자네도 소문을 들어서 알겠지만 나도 정조 임금의 화성행차도 사업에 참여했네. 그 공로로 포상을 받았네. 오늘은 좋은 곳에서 한 잔 사겠네.”

     

작지만 제법 기품이 있는 술집으로 안내했다.  

   

“자네 그림을 광통교에서 보았네. 참으로 멋지더군. 사람들이 살아가는 솔직한 풍경에 자네의 섬세한 감성이 스며들어 있더군. 인물의 표정을 순간적으로 잡아내는 능력과 적절한 채색이 배경과 잘 어울렸네. 단원 김홍도 선생이 자네 그림을 보았다면 극찬을 했을 것이네.”   

  

“과찬이네. 나는 그저 사람들의 진솔한 삶을 그릴 뿐이네.”  

   

“기존의 풍속화가 선비나 임금의 시선이나 요구에 따라 그렸다면, 자네의 풍속화에서는 그러한 관점이 보이지 않네. 그렇다면 반대로 백성의 관점으로 그린 건가?”

    

“백성의 관점이라니? 나는 백성의 관점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네. 이리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자네, 날 떠보는 건가?”

    

“듣자 하니 자네가 돈 많은 중인하고 어울린다는 소문이 있더군. 그중에는 역모죄가 있었던 추사 김정희를 따르는 무리도 끼어 있다던데.”     


술잔을 잡고 있던 손이 떨리고 입술이 바짝 마른다.

추사 김정희와 역모를 언급한 것은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이네. 철학으로 정치를 하는 나라라는 말일세. 요즘 성리학을 비난하는 무리가 설치고, 무역이나 장사를 해서 재물을 모은 중인이 선비를 조롱한다는 소문도 있네.     

청나라 물건이나 유행을 따르면서 조선의 것을 하찮게 보는 시류 때문에 임금도 걱정이 많다고 하더군.”  

   

백성의 관점이라는 말은 속임수이다.

모든 역모는 백성의 관점이라는 명분을 만들 뿐, 사실은 정치적 관점이다.

버젓이 왕이 있는데, 또 다른 백성의 관점을 말한다면 자칫 역모죄에 걸려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다.

해명해야 한다. 추호도 거짓이 있으면 안 된다.

    

“나는 백성의 관점이 뭔지 모르네. 술자리에서 추사의 제자들을 보기는 했지만, 대화는 없었네.”

    

“자네의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은 선비인가 중인인가?”     


“내 그림 속의 사람은 모두 신선이네.”    

 

“신선(神仙)이라니?”   

       

[김홍도/송석원시사야연도/종이에 수묵/25.6 × 31.8㎝/1791년경/한독 의약박물관. 미산옹(眉山翁, 1727-1798)이 쓴 화제의 내용이다.

무더운 밤 /구름과 달 아련한데 /붓끝 조화에 /놀란 이 가물가물하네

(庚炎之夜 雲月朦籠 筆端造化 驚人昏夢)

중인들의 시모임을 그렸다. 이것을 여항문화라고 한다.

이 안에는 하급관리, 학문하는 사람, 장사해서 돈을 번 사람, 서얼, 평민이 뒤섞여 있었다. 중인 중에는 추사 김정희를 따르며 정치적 입지를 다진 사람도 있었다. 흥선대원군도 중인들과 어울렸다. 중인들이 선비들과 모임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막대한 재력이 있었다.]    

  

“조선은 성군이 나타나서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백 년 이상 전쟁이 없었고, 역모는 모두 진압되어 종묘사직은 튼튼하네.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도 없고, 농사는 풍년이고, 나라 곳간에는 환곡이 넘친다고 들었네.

어떤 이는 세종대왕 이후로 가장 좋은 시절이라고 하더군.     

이런 태평성대를 신선 세계에 비유했네.

그렇다면 신선 세계에 사는 모든 사람은 신선이 아닌가. 나는 세상에 불만이 없네. 오히려 조선 사람들의 아름다운 풍류를 그리고자 하네.”     


“풍류라... 풍류는 군자의 풍모를 드러내는 것일 줄 나도 알고 있네.

군자의 풍류는 유유자적, 소쇄, 와유 따위로 표현하고 소박하게 수묵화로 그리네. 하지만 자네의 수려한 풍속화에는 뱃놀이, 꽃놀이, 기생과 어울리는 향락 따위가 표현되어 있는데, 그게 풍류와 무슨 관계란 말인가?”  

   

혜원은 단호하게 대답한다.   

  

“사기(士氣)라는 말이 있지. 양심을 가진 사회적 존재인 선비는 사회적 보상을 받아야 하네. 이 때문에 나라에서는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활쏘기, 술자리, 꽃놀이, 뱃놀이 따위를 열어주지 않았던가.

사기를 높이고자 유희하는 것이 풍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네가 내 그림을 의심하는 것은 임금을 의심하는 것과 다르지 않네.”

     

“흠흠...무슨 소린가? 내가 언제 자네 그림을 의심했다고 하는가?”  

   

신윤복은 평소 부친의 충고를 따라 책을 꾸준히 읽었기에 체계적인 논리를 펼칠 수 있었다.

사헌부 관리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연꽃이 핀 못에서 기생과 향락하는 장면이다. 연꽃은 군자의 상징이며 수기치인의 상징이다. 곰방대를 물고 거문고 소리를 듣는 일은 고급 풍류이다. 오른쪽 위의 곰방대를 문 여성이 쓴 것은 기녀의 외출용 모자인 가리마이다. 연꽃은 한여름에 핀다. 더운 여름이지만 그림 속의 사람들은 복장을 갖추고 있다. 체면을 지키고 있다는 말이다. 왼쪽에 기생을 무릎 위에 앉히고 마치 희롱하고 있지만 다른 이들은 관심이 없다.

이상한 상황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윤복 풍속화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기생을 무릎에 앉히고 있는 사람, 연꽃을 바라보는 사람, 거문고 연주와 듣는 사람은 다른 공간, 다른 시차에 일어난 모습이다. 각기 다른 세 장면을 합쳐 한 화면에 그린 것이다. 이를 통해 욕망과 양심을 충돌하지 않고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양심을 지키는 일은 매우 어렵네. 온갖 재물과 권력의 유혹을 이기고 백성들을 위한 민본정치를 펼치기 위해서는 자발적 청빈과 엄격한 예법이 필요하다고 들었네. 그래서 선비나 양반 중에는 부자가 없지.

아무리 명예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선비들이 생활고에 찌들며 살아가야 한다면 누가 양심을 지키고자 하겠나.

양심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상해야 하네. 사회적 보상은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허영과 사치를 동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네.

선한 사람에게는 넘치는 보상을, 악한 사람에게는 확실한 응징을 하는 것은 성리학과도 잘 맞네.”   

  

“자네 말이 틀리지 않구만.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군.

흠흠. 분위기도 바꿀 겸 기생을 부르면 어떻겠나?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이내 술상이 바뀌고 기생이 따라 들어오자 사헌부 관리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기생은 동그란 얼굴에 풍성한 트레머리를 하고 쪽빛 주름치마를 입었다. 십장생도 병풍 앞에 앉아 거문고를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자 신윤복은 무릎을 치며 고마움을 전했다.    

 

“도화라 하옵니다.”    

 

“도화(桃花), 복사꽃이라. 기명(妓名)이 좋구나.”     


술잔이 몇 번 돌았다.

동료 화원이 기생에게 말한다.     


“이 친구는 기생들과 풍류 하는 풍속화를 잘 그리는 화원인데, 너는 들어본 적이 있느냐?”     


“일전에 이웃 술집에 놀러 가서 '월하정인'이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혹시 나리의 그림인지요?”  

   

“내가 그렸다. 연인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였으나 제대로 그린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림을 본 소감은 어떠하냐?”     


“소인이 뭘 알겠습니까. 저는 그저 좋은 사람과 절절한 마음을 나누고 있는 그림 속의 남녀가 부러웠습니다.”   

  

“혜원, 사기를 높이는 그림이 대부분이지만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 그림도 있는데 이것도 풍류와 관계가 있는가?”     


“무관하지 않네. 사기(士氣)는 풍류, 사회적 보상으로 높여야 하네. 사회적 보상은 칠정(七情)을 충족하는 것이지.

칠정은 인간의 욕망이네. 칠정 중에서 가장 큰 욕망이 남녀의 사랑이라고 들었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 위태롭다지. 특히 남녀의 사랑은 집착과 소유, 시기, 질투를 불러내어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네.

그렇다고 무조건 억누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네. 누르면 누를수록 욕망은 더욱 강해져서 더 큰 죄악을 만든다네.

그래서 나는 이런 남녀의 사랑을 아름답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네.

무엇보다 남녀의 사랑은 삶에 대한 강력한 의욕을 만들어내지. 이런 의욕이야말로 민본세상을 이루는 바탕이 아닌가.”    

 

도화는 혜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이야기들 들었다.

신윤복의 눈에서는 총명한 빛이 났고 이야기 도중에도 몸가짐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동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월하정인, 늦은 밤에 연인을 만나는 모습이다. 뭘 하려는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성을 보는 남자의 눈빛은 야릇하면서도 절절하다. 이 작품을 보면서 불륜, 매춘 따위를 떠올린다면 풍류를 모르는 것이다.]     


“나는 먼저 가겠네. 술값은 이미 치렀네. 자네는 마저 마시게나.”   

  

동료 화원이 나가자 혜원은 깊은숨을 내리 쉰다.

이 모습을 본 도화는 거문고를 내려놓고 맞은 편에 앉는다.   

  

“지쳐 보입니다. 화원은 그저 그림만 그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화원은 진짜 세상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이를 진경이라고 하지.

진짜 세상을 그리려면 진짜 세상이 뭔지를 알아야 하는데 쉽지가 않구나.”

    

“화원님이 생각하는 진경은 어떻게 생겼나요? 그 속에 저 같은 기생도 있나요?”

     

혜원은 손가락으로 거문고가 놓인 뒤편의 십장생 병풍을 가리켰다.    

 

“네 뒤에 있는 십장생도가 진경이다. 하늘에는 학이 날고 육지에는 사슴이 뛰놀고, 바다에는 거북이가 헤엄친다. 소나무, 대나무, 복숭아나무, 영지가 만발한 아름다운 세상이다. 도화야, 너는 왜 십장생도에 사람이 없는지 아느냐?”    

 

“그러고 보니, 동물만 있지 사람이 없네요. 무심히 보아서 그런지 의문을 갖지 않았습니다.”  

   

“왕을 그리면 왕의 세상이고, 양반을 그리면 양반의 세상일 것이다.

아무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모든 백성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너도 조선의 백성이니, 저기 어디쯤 있을 것이다. 아, 복사꽃 옆이면 좋겠네.”    

 

“호호호. 제 기명과 딱 맞는 곳이네요.”     


“내 술잔을 받겠느냐?”    

 

술잔을 받은 도화는 혜원을 슬쩍 쳐다보며 고개를 돌려 마신다. 짧은 시간 혜원과 도화의 눈이 마주쳤다.     


“봄이 아니라도 저는 복사꽃처럼 피어 있습니다. 발걸음 소리를 기다리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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