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의 미인도 9화
-풍류야회를 통해 사기를 높이다.
신윤복은 평소 친분이 있던 선비, 문인, 상인, 화원들에게 연락을 보냈다.
“매화가 떨어진 후, 봄비가 내리고 아지랑이가 피어납니다.
얼마 전에는 바람을 따라온 꽃내음에 마음이 설레어 밤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인왕산 자락 후원에 복사꽃이 활짝 피었다 하니 부디 오셔서 풍류를 즐김이 어떠하오리까.”
대략 50여 명의 지인이 연락을 받고 모였다.
신윤복은 춘화를 그린 대가로 받은 돈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빌렸다.
술과 쇠고기를 비롯해 많은 음식을 주문하고 6인조 풍각쟁이들을 불렀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놀 수 있는 소리꾼, 사당패, 무희는 기본이고 거문고 연주와 시조창을 하는 기생도 빠트리지 않았다.
풍류야회(風流野會)는 짧게는 3~5일 정도로 진행될 예정이다.
관청에 미리 허락을 받았다. 대외 공연행사를 알리기 위해 벽보를 붙였다.
초대한 지인들은 멀게는 화성, 안산 등지에서 하루를 꼬박 걸려 달려왔다.
이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고 노자(路資)를 줘야 한다.
이번 풍류야회를 준비하는데 대략 100냥, 1억 원 가까운 돈이 들어갔다.
사촌 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혜원, 이리 많은 돈을 써도 되는가?”
“제가 돈을 모아 뭐 하겠습니까? 빚은 갚았고 쌀은 먹을 만큼 사 두었으니 생계는 문제없습니다.
제가 돈을 벌었다는 소문은 이미 한양에 파다합니다. 집에 돈을 모아 놓으면 도둑이 들 것이고 인명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일찍이 단원 김홍도 선생께서도 그림을 판 돈 대부분을 매화 풍류에 사용했다고 들었습니다.
제 평생에 언제 이런 모임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형님은 이번 야회가 차질 없도록 준비해 주십시오.”
낮에는 글을 쓰고 시를 낭독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저녁이 되면 화톳불을 피워놓고 가무 공연을 열었다.
개인 앞으로 나온 개다리소반에는 종이로 만든 복사꽃을 꽂은 화병을 중심으로 술과 떡에 쇠고기 구이가 놓였다.
복사꽃에 대한 찬사로 모임이 시작되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께서 복사꽃이 만발한 선계를 노니는 꿈을 꾸었다네. 꿈이 너무 생생하여, 당시 도화서 화원이었던 안견 선생에게 꿈을 그려줄 것을 명하자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네.
그렇게 탄생한 그림이 [몽유도원도]라네. 안타깝게 이 작품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행방이 묘연하네.
안평대군은 복사꽃을 너무나 좋아했네. 그래서 무계정사에 복숭아나무를 심고 여러 문인을 모아 꽃놀이를 즐겼네.
이후 조선은 복사꽃의 나라가 되었지. 조선의 문인들은 매년 봄이 되면 복사꽃 아래에서 시회(詩會)를 가졌네.
복사꽃이 만발한 정원에 우리가 이렇게 모여 모임을 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고 풍류의 극치라 할 수 있네.”
[안견-몽유도원도. 안평대군 이후 복사꽃은 조선의 꽃이 되었다.]
시회(詩會)의 경험을 가진 문인에 의해 일정은 빡빡하게 계획되어 있었다.
문인들은 시경에 나오는 좋은 구절을 유려한 필치로 쓰고 창을 하듯 소리 내어 읽었다.
저마다 시에 대한 감상평을 말했다.
취기가 오른 한 문인은 즉흥적으로 시를 지어 낭독하자 기생들이 거문고를 연주했다.
문인이 화제를 내면 화원들은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 관한 평은 한나절 계속되었다.
주나라 목왕과 서왕모의 연회 이야기부터 신성한 복숭아인 반도(蟠桃)를 훔쳐 먹고 18만 년을 살았다는 동방삭 이야기로 이어진다.
사신단을 따라 청나라를 다녀온 상인은 신기한 마술을 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러자 옆이 있던 동료는 중국에서 보았던 코끼리나 낙타의 모습, 원숭이 재주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황금 기와로 덮은 라마교 사원, 검은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나 가짜가 판치는 골동품과 진위를 구별하는 이야기 따위가 끊이지 않았다.
문인은 철학을 이야기했고, 상인은 장사 이야기를 했으며. 화원은 그림 이야기를 했다. 삼삼오오 모여 토론을 하고 비판을 하기도 했다.
[인왕산 자락 아래에서 시회(詩會)를 하는 여항인의 밤 모임을 묘사한 단원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1791). 정조 임금 때인 1791년 천수경의 집 송석원에서 열린 시모임이다. -시회(詩會)는 풍류의 정점이다.]
이야기는 넘쳐났고 노래와 풍악이 이어졌다.
기생들은 앞마당에서 칼춤이나 태평무를 공연했다.
동네 사람들은 공연을 보기 위해 모였고, 혜원은 술과 음식을 내놓았다.
작은 모임으로 시작한 풍류연회는 동네잔치가 되었다.
그렇게 풍류야회가 끝나가고 있었다.
하나둘씩 떠난 정원에는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서당 훈장이 늦게까지 남아 정리를 도왔다.
“혜원, 자네 덕에 좋은 풍류를 즐기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복사꽃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니, 사는 게 진정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군.”
“석씨(당시 선비들은 불교의 석가모니를 이렇게 불렀다.)는 인생이 고해라고 했다지요. 하지만 고통만 있는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통과 행복은 늘 함께 있지요.”
“조선 땅에서 민본세상을 열고자 발버둥 친 세월이 수백 년이 넘었네. 종묘사직은 튼튼하고 수많은 선비를 키워냈지만, 아직도 백성의 풍요를 해결하지 못했네.
가끔 우리가 이렇게 풍족한 모임을 하는 것이 백성들에게 부끄럽네.”
“상인들은 무역과 장사를 통해 재부를 키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백성들의 탐욕을 부추길 뿐입니다.
최근 재물 때문에 형제를 죽이거나 아내를 버리는 극악무도한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 들었습니다.”
[정선/필운대상춘/25.6x31.8cm/종이에 수묵/개인소장 -한양 필운대에서 복사꽃 놀이를 하는 장면이다. 필운대 아래 풍경은 한양 모습이다. 집집마다 복사꽃이 피었다. 당시 한양은 복사꽃 천지였다.]
“풍류는 삶과 양심에 대한 보상일세.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모든 개인에게 관혼상제와 돌잔치, 환갑잔치 따위를 만들어주네.
선비가 수신하여 학문을 넓히면 출세라는 보상을 받고, 관료가 공을 세우면 명예를 높여 보상하네. 부인들은 시집살이를 통해 곳간 열쇠를 보상받는다네.
이 모든 것이 조선이라는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공공의 보상이네.
삶에 대한 보상이 없으면 민란이 일어나고, 과도한 보상을 요구하면 범죄가 일어나기 마련이네.”
“관료나 양반들이 부패하는 것은 보상이 부족한 탓인지요?”
“아니네. 고위 관직자는 정치를 통해 명예를 얻을 수 있네. 명예가 곧 보상이네.
문제는 명예와 재물을 모두 가지려는 탐욕 때문일세.”
“상업에 종사하며 돈을 많이 번 사람을 상놈이라고 비하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들 중에는 양반이나 선비가 무능하여 조선의 백성이 굶주린다고 여깁니다.”
“고려는 무역과 상업이 가장 발전했지만 결국 부패하여 망했네. 국가의 부는 넘쳐났지만 권문세가의 배만 불려주었지. 백성은 비참한 농노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네.
조선이 개국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농노를 평민신분으로 바꾸고 토지를 개혁하여 농민에게 나누어 준 것이네.
그래서 조선은 사농공상이라는 사회적 순위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지.
사(士)는 양심의 철학을 말하고, 농(農)은 건강하게 노동하는 다수의 백성을 의미하지. 공(工)과 상(商)은 사(士)에 의해 관리되고 농(農)을 위해 존재한다네.
만약 조선이 망한다면 상인들의 탐욕이 양심을 능가하거나, 탐욕으로 강대해진 나라의 침략 때문일 것일세.”
[김득신/송하청금도/1815년/비단에 담채/94.7*35.4/삼성미술관. 소나무 아래에서 거문고 소리를 듣는 장면이다. 풍치가 좋은 장소에서 기생과 거문고 연주자를 데려와 작은 공연을 열었다. 화원까지 불러 그림으로 남겼다. 며칠 동안 진행한 큰 행사였기 때문이다.]
“제가 주최한 풍류야회도 사회적 보상이라 할 수 있습니까?”
“자네를 감찰하던 사헌부 관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소문을 들었네.
풍류는 양심을 가진 선비의 사기를 높인다고 했다지.
사람들은 풍류를 그저 가무를 즐기며 놀고먹는 것이라고 말하네.
이는 개인의 쾌락을 숨기려는 기만일세.
개인의 풍류는 탁족이나 달을 보며 악기를 연주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하지만 사회적 보상은 사회에서 만들어낸 물질, 정신적 재부를 사회로 환원하는 것이네.
이런 일을 누가 하겠나? 양심을 가진 선비, 정치가, 지식인이 할 수밖에 없지. 이들을 응원하며 가치를 높인다면 사회는 더욱 발전할 것일세.
물론, 이 야회를 더 큰 이익과 청탁에 이용한다면, 그 또한 탐욕의 자리가 될 것이네.
하지만 자네 같은 화원이 무슨 이익을 챙길 수 있겠나.
자네가 마련한 풍류야회는 선비들의 사기(士氣)를 높여주었네. 그것으로 충분하네.”
지인들은 모두 돌아갔다.
그중에 몇몇은 신윤복에게 풍류야회의 소감을 적은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틈틈이 사생했던 그림을 쳐다보니 짧았던 야회의 시간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사람들의 얼굴은 밝았고 몸짓은 생동감이 있었다.
모두 복사꽃처럼 아름다웠다.
세상을 걱정하고 세상을 품었다.
저마다의 사연은 부끄럽고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진지했고 기뻤으며 슬펐다.
그렇게 살아있음을 느꼈다.
‘아아, 이렇게 사는 것이, 삶의 보상이며 풍류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