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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Jan 09. 2024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1화

“김홍도가 정홍래의 작품을 베꼈다.”   

  

“김홍도의 역작, 알고 보니 무단 표절”  

   

“정홍래 자녀들, 김홍도를 표절 혐의로 고발.”   

  

“김홍도의 흑역사, 정홍래 그림 훔쳐.”     


요즘 같았으면, 이런 자극적인 신문기사가 나갔을 사건이 있다.

이른바, 김홍도의 정홍래 그림 표절 사건이다.

[단원 김홍도/송하맹호도/비단에 수묵담채/90.4×43.8㎝/호암미술관 소장.

김홍도의 대표작이자 세계에서 가장 철학적인 호랑이 그림이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송하맹호도, 松下猛虎圖]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송하맹호도]는 전 세계 호랑이 그림 중에 가장 탁월한 명작이다.

실제 호랑이를 뛰어넘는 자세, 세밀한 묘사라는 흠잡을 데 없는 조형성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호랑이의 공격성, 포악성을 없애고 양심의 가치를 투영하여 경쾌하게 표현했다. 이는 세계의 여느 호랑이 그림에서도 찾기 어렵다.  

   

김홍도는 신선도, 진경산수화, 풍속화, 초상화, 화훼도와 같은 모든 갈래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사람들은 풍속화를 김홍도의 대표작으로 여긴다. 백성들의 삶의 진솔한 삶을 표현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홍도의 최고 작품은 [군선도, 群仙圖]와 [송하맹호도]이다.     

이 중에서 딱 한 점만 고르라면, [송하맹호도]를 선택할 것이다.

이 작품은 김홍도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창안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반면, 정홍래의 [산군포효도, 山君咆哮圖]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정홍래는 호랑이 그림보다 매 그림으로 더 유명하다.

정홍래의 매 그림은 당대에도 인기가 높아 왕이 새해에 하사하는 그림으로 선정될 정도였다.     


정홍래라는 화원을 모른다고?

정홍래는 도화서 화원으로, 천재성과 경력으로 따지면 김홍도 못지않다.

정홍래는 29세에 숙종 어진 모사에 동참화사로 참여하고 공을 인정받아 현감 벼슬을 지냈다.

김홍도는 29세에 영조 어진과 왕세자 초상을 그려 감목관 직책을 받는다.

이 정도면 막상막하이다.   

  

이 둘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정홍래는 1720년생으로, 1745년생인 김홍도보다 25년 연상이다.

김홍도가 7~8세쯤 강세황에게 그림을 처음 배울 때,

정홍래의 나이는 33세 전후였다.

60세 전후로 사망했다고 추정할 때 김홍도가 당시 최고의 화원이었던 정홍래를 몰랐을 리는 없다.

김홍도는 이미 20세 전후로 화단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 둘이 만나서 교류했는지는 알수 없다.

하지만 정홍래도 젊은 나이에 화원이 된 천재적인 김홍도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김홍도는 능력만큼이나 꿈이 컸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배워 자신만의 화풍을 창안했다.

이후 진경산수화는 겸재 화풍과 김홍도 화풍으로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      

김홍도는 청나라에서 서양화법이나 채색화 기법과 같은 최첨단 미술 흐름을 수용하여 궁중회화의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조선을 대표하는 [오봉도], [십장생도], [책가도] 같은 작품에도 김홍도의 손길이 느껴질 정도이다.     


하지만 김홍도는 늘 목이 말랐다.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자신만의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고 싶었다.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대상과 소재가 필요했다.     

[좌-어몽룡/월매도/비단에 옅은 묵/119.2x53cm/16세기/국립중앙박물관,

우-이정/풍죽도/견본수묵/127.5X71.5cm/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는 신선도를 그리다 붓을 던져버리고는 벌렁 누웠다.

    

“아, 이런 것은 수백 번이나 그렸다. 재미없고 지겨워. 길동아, 뭐 새로운 것이 없을까?”

    

길동은 김홍도를 도우며 그림을 배우는 제자이다.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사부님께서는 무척 피곤해 보이십니다.

누우신 김에 한잠 주무시고 나면 편안해지실 겁니다.”

    

“몸은 피곤한데 머릿속이 복잡하여 잠이 오지 않는구나.

내가 물어볼 것이 있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단번에 대답하거라.”  

   

“말씀하십시오.”

    

“조선에서 금강산을 가장 잘 그리는 사람은 누구냐?”    

 

“겸재 정선이옵니다. 중국에도 없는 독창적인 산수화를 창안하여 조선산수화, 동국진경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조선에서 매화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사람은 누구냐?”    

 

“설곡(雪谷) 어몽룡입니다. 어몽룡의 매화 그림은 나무나 꽃과 줄기 일부만 그리는 절지법(折枝法)과 창날처럼 날카롭게 수직으로 세워 그린 줄기가 특징입니다.

이 그림을 본 명나라 사신들이 혹평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오히려 어몽룡의 매화 그림이 중국과는 다른 새로운 형식을 창안한 것을 반증합니다.”    

 

“그놈, 가르친 보람이 있구나. 그렇다면 조선에서 대나무를 가장 잘 그리는 사람은 누구냐?”  

   

“이징(李澄)입니다. 이징은 종실 출신임에도 도화서 화원이 된 분으로 인조대왕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이징 선생은 타고난 재능을 가졌고, 그 재능을 허비하지 않았다.

어릴 적 이징이 갑자기 사라졌다. 온 식구들이 난리를 치며 사흘 만에 다락에서 찾았다. 어린 이징은 다락에서 그림 그리기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부친이 화가 나서 매를 때렸더니, 이징은 흘러내리는 눈물로 새를 그리고 있더라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잘못 알고 있구나. 혹시 탄은 이정과 혼동한 것이 아니냐?”   

  

“아, 제가 혼동했습니다. 사부님. 탄은(灘隱) 이정(李霆)은 세종의 현손(5대손)입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칼에 오른팔을 다쳐 왼손으로 바꾸어 더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징이 그린 대나무는 왜국 오랑캐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댓잎을 마치 화살촉처럼 날카롭게 그린 것이 특징입니다.”  

   

“너 또한 재주를 타고났으니, 이징(李澄) 선생의 집중력과 이정(李霆) 선생의 의지를 배워 그림에 몰두하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그렇다면, 조선에서 매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사람은 누구냐?”    

 

“네, 조선 초기 왕손이신 두성령(杜城令) 이암(李巖)입니다. 이암께서는 개, 고양이, 새를 그린 영모화의 대가였습니다.

특히 사냥 매를 그린 '가응도(架鷹圖)'가 유명합니다.”   

  

“물론 이암께서도 매를 잘 그렸다. 하지만 이암의 매 그림에는 용맹함은 있어도 철학이 부족하다.

나는 만향(晩香) 정홍래(鄭弘來)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영조 대왕께서 하사하신 세화에 정홍래 선생의 매 그림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세화에 도화서 화원의 독창적인 그림이 선별되는 사례는 아주 드물다고 하더군요.”

    

“그렇다. 비록 중국의 그림을 바탕으로 했으나 정홍래 선생의 매 그림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독창적인 작품이다.”     

[김홍도/군선도/종이에 수묵담채/132.8*575.8cm/국보 제139호/1776년/리움미술관 소장. 김홍도가 31세 때인 1776년(영조 52) 봄에 그렸다.]

    

김홍도가 갑자기 한숨을 쉬며 창밖을 본다.  

   

“길동아, 솔직히 말해 보아라. 나, 김홍도가 가장 잘 그리는 그림을 무엇이냐?”

    

“세상 사람들이 신선도라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31세 그린 군선도는 조선 화단을 뒤흔들어 놓은 명작입니다.”  

   

“그렇긴 하다만...

배경을 없애고 인물도 조선풍으로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그림 속의 신선은 모두 중국의 것이 아니더냐.

무엇보다 도교의 성격이 너무 강하여 성리학의 내용을 넣기 어려웠다.

이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그림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길이 쉽게 보이지 않구나.”     


김홍도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본 길동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나의 그림공부가 부족한 것이다. 그동안 붓질이나 물감을 사용하는 방법에만 치중했다.

앞선 화원들이 독창적인 그림을 창안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시대정신이 있었다.

지금 조선 땅에 흐르고 있는 핵심 가치를 찾아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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