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규섭 Jan 17. 2024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 2화

조선에는 5,000여 마리의 호랑이가 살았다고 추정한다.

우리나라에 서식했던 호랑이는 두 종류이다.

‘참호랑이’라고 부르는 줄무늬 호랑이이고, ‘개호랑이’로 부른 점박이 호랑이, 이른바 표범이다.

이 중에서 표범이 줄무늬 호랑이보다 개체 수가 대략 4~6배 정도 많았다.     


이렇게 많은 호랑이가 서식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산이 많으며 골짜기가 깊고 먹이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조선 땅은 호랑이에게 천국 같은 곳이었다.     

백성들은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호랑이와 싸웠다.

둘 다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호랑이와의 일대 전쟁을 벌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착호갑사는 당번, 하번을 모두 20인으로 정하였으나, 유독 전함 착호갑사만 아직도 정액이 없으니, 바라건대 20인으로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세종 3년 3월 14일]     

[조선 착호갑사는 중무장을 했다. 목과 팔을 방어하는 두터운 갑옷을 착용하고 창, 활, 칼, 방패로 무장했다. 특수부대였기 때문에 정규 인원의 2~3배에 이르는 보급부대와 몰이꾼이 배속되었다.]


세종대왕은 호랑이만 전문적으로 잡는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특수부대를 만들었다.

착호갑사는 팔도에 분산 파견되어 지역 병력을 지원받아 호랑이를 잡았다.


매년 각 고을에 3마리의 호랑이 가죽을 중앙에 납품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300여 개의 고을에서 매년 1000여 마리의 호랑이 가죽이 한양으로 보냈다.

매년 1000여 마리의 호랑이를 잡아 죽인 것이다.

이 행정명령은 영조 임금 때 폐지된다.     


지금까지 그림의 소재였던 동물은 고작 참새, 학, 사슴, 거북, 매 정도였다.

이에 비하면 덩치도 크고 강력한 힘을 가진 호랑이는 매력적인 그림의 소재였다.     

천재 화가였던 정홍래는 호랑이의 매력을 단번에 알아봤다.     


“사람을 압도하는 엄청난 덩치, 범접하지 못하는 눈빛, 세상의 모든 것을 찢어버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아름다운 무늬의 털...

아,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런 호랑이를 그릴 수만 있다면...”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은 정홍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여보게 친구, 밤새 호랑이 꿈을 꾸었네. 산길을 걷는데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호랑이가 내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지 않겠나.     

오금이 저려 털썩 주저앉았는데 나를 한참이나 노려보더라고. 내가 정신을 차려 붓과 종이를 꺼내 그리고자 하니 몸을 돌려 후다닥 숲속으로 사라졌네.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나를 쳐다보던 호랑이의 눈길을 잊을 수가 없네.”   

  

“자네, 제정신인가. 꿈속이라도 호랑이를 그리려 하다니.

얼마 전에도 호랑이가 궁궐 담장을 넘어 들어오는 바람에 초비상이 걸리고, 많은 경호무사가 징계를 받은 사실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산군포효도/정홍래(鄭弘來, 1720~?)/종이에 수묵/30.2×23.8㎝/조선 후기/간송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책자 크기의 작은 작품이다. 부리부리한 눈, 날카로운 이빨, 세운 발톱은 호랑이의 강인함이나 포악성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이 작품은 정홍래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숙종 연간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얼굴과 앞다리를 뺀 등과 몸통은 뒷다리, 꼬리는 김홍도의 송하맹호도와 거의 같다. 정홍래의 천재성과 사회적 위치, 김홍도보다 25년이나 나이가 많은 점을 고려한다면, 김홍도가 정홍래의 그림을 모방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친구의 말은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호랑이를 그렸다가 자칫 사간원(司諫院)에게 탄핵을 당하거나 의금부에 끌려가 문초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좋은 그림 소재라도 사회적 분위기가 받쳐줘야 한다.

당시 많은 백성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기에 증오의 대상이었다.

호랑이가 증오의 대상이듯, 호랑이 그림도 사회적 응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일단 무조건 그려보기로 했다.

호랑이는 한 번도 그려진 적이 없었기에 참고할만한 작품은 없었다.

호랑이의 생태를 관찰하여 최적의 형상을 찾아내야 했다.     


착호갑사를 만나 호랑이의 특성을 물었고, 죽은 호랑이를 보고 사생을 했다.

범보다는 덩치가 크고 사나운 줄무늬 호랑이를 선택했다.

호랑이의 온전한 몸통을 그리고 튼튼한 네 개의 발과 커다란 눈,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그려 넣었다.

줄무늬가 잘 드러나도록 넓은 등을 그렸고, 살아있는 느낌을 주기 위해 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포악함을 줄이기 위해 포효하는 호랑이 얼굴을 좌측으로 살짝 틀었다.

낮은 언덕을 중심으로 앞에는 암석을 그리고 배경에는 소나무를 그렸다.     


이렇게 해서 소박하지만 단단한 호랑이 그림이 완성되었다.

정홍래의 호랑이 그림은 금방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도화서 수장을 겸임하고 있는 예조판서가 정홍래를 불렀다.

옆에는 깐깐한 눈빛의 사간원 관리가 서 있었다.

   

“이 호랑이 그림은 왜 그린 것이요?”    

 

“아, 네. 그냥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포악한 호랑이를 그린 것뿐이옵니다.

이 그림을 통해 백성들이 경각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정홍래는 이 상황을 충분히 예상했다.

행여 문제 삼으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작품의 제목이 [산군포효도, 山君咆哮圖]이지만 이것은 후대에 붙인 것이다.

[산군포효도]를 별생각 없이 보면, 그냥 호랑이가 산에서 울부짖는 모습이다. 표정도 포악하다.  

   

그림을 한참 동안 이리저리 살펴보던 사간원 관리가 말한다.

     

“이렇게 실감 나는 호랑이 그림은 처음 보오. 탁월한 실력이오. 작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사람들에게 보이진 마시오.”    

 

이렇게 정홍래의 호랑이 그림은 폐기되지 않고 화실의 한구석에 처박혔다.

김홍도가 다시 꺼내 보기까지는. (계속)

작가의 이전글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1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