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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Jan 23. 2024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3화

국오(菊塢) 정홍래(鄭弘來) 선생이 돌아가셨다.

정확히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른다.

하지만 60세 이후의 작품이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환갑 전후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정홍래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배웠고, 탁월한 미술적 능력을 발휘하여 조선 후기 미술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도화서 화원이자 종 6품의 벼슬을 지냈으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남을 가르치는 교수를 할 정도로 학문이 깊었으며 성품 또한 예의 바르고 진중했다.     


상가((喪家)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시끌벅적했고, 간간이 곡소리가 날 때는 정적이 흘렀다.     

단원 김홍도는 동료 화원들과 함께 조문을 왔다.


습관적으로 집에 딸린 화실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상주인 큰아들이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님께서 단원 선생님께 꼭 전하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정홍래 선생께서 제게 무슨 말을 남기셨습니까?”   

  

“이리로 오시지요.”     


큰아들은 단원 김홍도를 화실로 안내했다.

특유의 먹과 물감 냄새가 났다. 화지와 붓, 물감과 같은 미술도구 따위가 잘 정돈되어 있었고 벽 한 면에는 그리다 만 산수화가 걸려있었다.     

상복을 입은 큰아들은 화실 구석에 있는 오래된 목가구에서 그림 한 점을 꺼내왔다.     


“이 작품을 단원 선생에게 꼭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그림을 받아 든 김홍도의 눈이 빛나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호랑이 그림이었다.


정홍래 선생이 호랑이 그림을 그려 탄핵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선배 화원에게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림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도 없고, 행방도 묘연했다.


김홍도가 다급하고 애절한 목소리로 간청한다.

    

“이 그림을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묘연했던 정홍래의 호랑이 그림이 김홍도의 손에 들어왔다.

  

계절이 몇 번 지나고 어김없이 매화가 피었다.

김홍도가 화실에 처박혀 나오지 않은 지 며칠이 지났다.  

   

이인문(李寅文)이 찾아왔다.

이인문은 도화서 화원이자 단원의 동료이자 친구로 허물없는 사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도화서나 규장각에도 자네가 보이지 않아 걱정했네.”    

 

안부를 묻고 화실을 둘러보는데 여기저기 습작을 한 화지가 나뒹굴고 있다.

이인문은 벽면 중앙에 걸린 정홍래의 호랑이 그림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말한다.     


“안 보이던 며칠 동안, 호랑이 그림을 그린 건가?”     


“정홍래 선생의 호랑이 그림을 보고 또 보았네. 그렇지만 나의 재주로는 도무지 감당되지 않아 한탄하고 있었네.”    

 

“자네가 그깟 호랑이를 그리는 것이 어렵다니, 이해가 되지 않네.”  

   

“호랑이의 외형이 문제가 아닐세. 내가 찾는 것은 호랑이의 본 모습이네.”     


“호랑이의 본 모습이야 포악함, 두려움, 산중지왕(山中之王) 따위가 아닌가? 보기만 해도 두려움에 떨도록 그린다면 장안이 떠들썩할 것이네.”    

 

“그게 아닐세. 포악한 호랑이를 포악하게 그려서 뭣 하겠는가, 안 되겠네. 사부님을 찾아가야겠어.”  

   

표암 강세황은 김홍도가 7~8세 무렵부터 그림을 배운 스승이다.

습작을 살펴보던 강세황이 묻는다.    

 

“단원, 단호하게 묻겠다. 호랑이 그림을 왜 그리고자 하는가?”   

  

“지금까지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갈증은 커져만 갑니다.

제가 모든 갈래의 그림에 뛰어나고, 특히 신선도를 잘 그린다고 하나 중국에서 나온 그림이고 실존하지 않는 허상의 인물일 뿐입니다.

일찍이 겸재 선생은 조선의 산하를 그려 동국진경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정홍래 선생께서는 조선 매를 그려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저 또한 겸재 선생, 정홍래 선생과 같이 조선만의 그림을 창안하고 싶습니다.”    

 

“그림에는 많은 소재가 있네. 꼭 호랑이여야 하는가?”     


“호랑이는 조선에서 으뜸인 짐승입니다. 엄청난 덩치에, 압도하는 눈빛,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따라올 짐승은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만큼 강력한 그림의 소재를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작품은 전통에 바탕에 두어야 하네. 그 뿌리가 중국이면 더욱 확고하지. 그렇다고 자네가 하찮은 중국 호랑이 그림의 전통을 따르겠나?”     


“일찍이 정홍래 선생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의 호랑이를 그렸으니 전통이 생긴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홍래의 호랑이 그림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선례일 뿐이다.”   

  

“저는 그 선례를 따라 조선 호랑이 그림의 전통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암/가응도/견본채색/98.1x54.9cm/보스턴미술관. 발목에 줄이 묶인 채 횃대에 앉아 있는 사냥 매를 그린 것이다. 꼬리 부분에 하얀색 띠는 주인의 표식인 시치미이다.]     


“그러고 보니, 정홍래 화원의 유명한 매 그림이 생각나는군. 정홍래는 사냥 매를 그리는 전통을 바탕으로 조선의 정서를 담은 새로운 매 그림을 창안했네.

사냥 매의 시치미와 밧줄을 제거한 그림을 보고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네.”    

 

“왕손이신 두성령 이암께서 그린 가응도(架應圖)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정홍래 선생이 사냥 매를 자유롭게 풀어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려 시대 사냥 매를 기르고 관리하던 응방(鷹房)이란 국가조직이 있었고, 조선은 사냥 문화를 이어받았다. 사냥 매는 건국 초기부터 임금의 용맹함이나 조선의 군사력을 상징했네.

하지만 선비들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았다. 군사력보다는 학문을 통해 통치하기를 바란 것이지.

하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전쟁 때문에 군사력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선생과 같은 분들의 노력으로 성리학이 자리를 잡고, 청나라와의 관계도 안정되면서 숙종 임금 때 응방이 폐지되었네.

정홍래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여 사냥 매의 밧줄을 푼 그림을 그릴 수 있었네.”  

   

“상당히 정치적입니다. 백성들은 여전히 사냥 매에 익숙해져 있었을 텐데요?”     


“백성들은 처음부터 매를 길들여 사냥하는 것은 사치라고 여겼다.

더 간략하게 말하면, 사냥 매는 넓은 평원의 사냥법이다. 수풀이 많고 골짜기가 많은 조선 땅과 맞지 않았다.”    

 

“철학적으로 옳더라도 백성들의 정서와 어긋난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정홍래 선생은 백성들의 생활과 마음까지도 면밀하게 알고 있었군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조선에서는 소중화 사상(小中華思想)이 태동한다.

중국의 철학적 전통이 조선으로 옮겨와 중심이 되었다고 여긴 것이다.

따라서 조선의 땅을 이상향으로 그린 진경산수화가 창조될 수 있었다.     

[정홍래/욱일호취도(旭日豪鷲圖)/비단에 채색/118.2×60.9㎝/국립중앙박물관 소장/18세기 조선. 거친 파도는 현실의 어려움, 바위는 영원성, 아침 해는 양심을 뜻한다. 매는 선비 군자의 상징이며 어려운 현실에서도 양심을 키워나가는 강인한 군자의 표상이다.

이암 선생의 매 그림을 바탕으로 그렸다. 매의 자세와 표정이 동일하다. 이런 전통을 바탕으로 시치미와 밧줄을 제거하고 대신 거친 바다와 괴석을 그려넣었다. 이 작품의 핵심 요소는 매와 아침 해이다. 아침 해는 양심을 뜻한다.

강인한 사람은 곧 양심을 키우고 실천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성리학적 가치를 정확히 표현했다.]     


정홍래는 이런 시대적 흐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냥 매를 묶고 있는 밧줄을 풀어낼 수 있었다.

여기에 국가기관인 응방(鷹房)의 폐지는 매 그림에 대한 정치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정홍래의 대표 작품은 ‘욱일호취도(旭日豪鷲圖)’라는 매 그림이다.

이렇게 창작한 매 그림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다.

새해 왕이 왕족이나 관료들에게 하사하는 세화(歲畵)에 선정될 정도였다.   

  

“정홍래 선생은 포악하고 집요한 날짐승을 강인한 양심을 가진 군자의 상징으로 바꾸었습니다. 두성령 이암의 전통을 이어받아 중국에도 없는 새로운 형식을 창안했습니다.”    

 

“그렇다. 겸재 선생도 중국의 남종화, 속화 따위를 수용하여 중국에는 없는 진경산수화를 창안하셨지. 단원, 자네가 호랑이에 집착하는 이유가 그것인가?”  

   

“정홍래 선생은 선비 화가인 겸재 선생과 달리 중인인 도화서 화원이셨습니다. 정홍래 선생도 세계적인 매 그림을 창안하고 발전시켰는데, 저 또한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는 자부심이 강했다. 그림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 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배워 자신만의 화풍으로 만들었고, 도화서 과제였던 풍속화에 배경을 없애는 획기적인 구도법과 내용을 창안했으며 십장생도, 모란도와 같은 채색화의 혁신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과거의 전통을 잘 배워야 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을 통해 새로움을 창조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전통을 제대로 배운 후에야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연암 박지원의 말이다.     


“좋은 말이다.

법고창신은 단지 철학이나 사회에만 적용하는 개념이 아니네. 세상 모든 예술은 과거의 전통으로 바탕으로 시대의 흐름을 담지. 세상의 모든 화원이 과거의 전통그림을 모사하고 배우는 것은, 새로운 그림을 창조하는 밑바탕이기 때문일세.

나는 오랫동안 그림을 감상하고 비평하는 일을 했지. 좋은 작품, 명작을 선별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완성된 전통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판단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대의 흐름(철학)을 표현했는지를 심사하지.”    

  

“그렇습니다. 스승님. 전통이 없는 그림은 그냥 물감이 묻은 쓰레기일 뿐입니다. 이제 그 전통을 바탕으로 조선 백성의 삶을 이끄는 새로운 호랑이를 그리고 싶습니다.”   

  

강세황은 김홍도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았다.

다만 천재가 뿜어내는 거침없는 기운이 두려웠을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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