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서에 명령이 떨어졌다.
“정순왕후 가례에 사용할 그림을 그려라.”
영조의 왕비였던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죽은 지 3년 만이다.
영조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재혼을 사양했다. 하지만 신하들의 성화를 이기지 못했다.
이때 영조의 나이는 66세였다.
계비로 간택된 정순왕후의 나이는 15세로 무려 51년의 어마무시한 나이 차이가 났다.
“이번 간택 심사는 임금께서 직접 하셨다지. 좋은 가문에서 온 아리따운 처녀들이 많이 참여했다더군.
그중에서 정순왕후가 군계일학이었다네.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총명하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
영조가 여러 처녀에게 질문했다.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깊은가?”
처녀들이 대답하길 산이나 물이 깊다며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정순왕후가 앞으로 나오며 대답했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사옵니다.
산과 물은 측량하고 예측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 깊이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네 말에 일리가 있다.”
영조가 다른 문제를 내어 물었다.
“세상에서 어떤 꽃이 가장 아름다우냐?”
처녀들은 모란, 복사꽃, 매화가 가장 아름답다고 대답했다.
이때 정순왕후가 옆 처녀들을 제치며 나왔다.
“목화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모란, 복사꽃, 매화도 아름답지만, 그저 멀리서 바라볼 뿐이지요.
하지만 목화는 솜과 실로 아름다운 옷을 만듭니다. 이 옷으로 사람의 꼴을 갖추고 백성들을 따뜻하게 입힐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꽃이 진정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답을 들은 영조는 마음을 굳혔다.
‘그래. 백성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 처녀야말로 진정한 왕비의 자격이 있다. 다시 보니 참 곱게 생겼구나.’
정순왕후는 성리학을 깊이 공부하고 체득한 여성이었다.
앞서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방석에 앉지 않은 것은 효심이 깊다는 의미이고, 빗방울을 보고 기왓장의 숫자를 맞춘 것은, 성리학의 핵심 내용인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이해한다는, 반증이다.
산이나 물보다 사람의 마음이 깊다고 한 것은, 인간의 우주적 본성인 ‘인의예지’를 말한 것이며, 모란이나 매화보다 목화가 아름답다고 한 것은 민본정치를 핵심을 알고 하는 말이다.
[목화/심규섭/디지털 그림/2023. 정순왕후와 목화를 소재로 그렸다.]
어린 정순왕후 이야기는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정순왕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목화를 지명한 사건은 유명하지.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 아닌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여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지.”
“세상의 모든 사물은 사람과 사회의 가치와 연결되어야 상징을 얻는다네. 흔한 목화를 백성의 삶과 연결하여 상징으로 만들다니...총명하군.”
“그런데 매화, 복사꽃, 모란보다 목화가 중요한가?”
“매화는 선비의 꿋꿋한 양심을 의미하고, 복사꽃은 신선 세계를 뜻하지 않는가. 아무래도 백성들의 직접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지.”
“논란의 여지가 있네. 매화, 복사꽃, 모란은 그냥 꽃일 뿐이지.
하지만 목화는 옷감을 만드는 재료이자 곧 돈일세.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욕망을 자극하거나 옹호할 수 있다는 말일세.
자칫 희생과 절제를 바탕으로 하는 양심과 충돌할 수도 있네.”
얼마 후, 도화서의 수장인 별제가 화원들을 모아놓고 힘주어 말한다.
“이번 행사는 규모가 크다. 따라서 도화원 전체가 총동원되어야 한다. 화원부터 학생까지 빠짐없이 명령을 기다려라.”
기록에는 40여 명의 도화서 인원 중에서 17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17명이면 도화서 화원 모두가 동원된다는 의미이다.
[도화서는 궁궐 밖에 있었다. 출입이 잦고 그림이라는 특수업무를 반영한 것이다.]
여기서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서]에 대해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자.
[도화서]의 역사는 1000년이 넘는다.
삼국시대에는 [전채서], [한림도화원], [화국]이 있었다고 삼국사기나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까지 고려의 [도화원]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규모나 비중을 축소하고 [도화서]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도화서 수장은 제조(提調)라고 하는데, 예조판서가 겸임했다.
/도화서를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사람은 종 6품의 별제(別提)이다. 별제는 화원 중에서 뽑았다.
/화학교수(畵學敎授)은 그림을 배우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조선 후기에는 별제를 대신했다.
/화학학생(畵學學生)은 도화서에서 그림을 배우는 학생들이다. 다른 말로 사습생도라고도 한다.
도화서는 화원을 양성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경국대전]에는 15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교육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영조(22년)에는 업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30명까지 증원했다.
/그림을 그리는 정규 화원은 시취(試取)라는 시험을 통해 선발한 직업 화가이다.
종 6품인 선화(線畵) 1명, 종 7품인 선회(善繪) 1명, 종 8품인 화사(畫史) 1명,
종 9품인 회사(繪史) 2명, 평화원 12명과 서반 체아직 화원 3명이 있었다.
공을 세우면 종 6품의 벼슬까지 얻을 수 있다.
화원은 하급 공무원이기에 중인계층에 속했다.
도화서의 정규 화원을 궁중 화원이라고 하며 대략 20~30여 명이다.
어떤 이는 화원이 세습된다고 주장하지만, 근거 없다. 화원은 시취라는 특별시험을 통해 선발했다.
화원 출신 중에는 화실을 운영하면서 체계적 미술교육을 했다.
따라서 자녀나 친척 중에서 미술 재능이 있는 아이를 선발, 교육하여 시험에 응시하게 했다.
아무래도 체계적인 교육의 받은 학생이 시험에 합격할 확률이 높았고, 이를 중심으로 화원 가문이 만들어졌다.
/잉사화원(仍仕畵員)은 서반 체아직(西班遞兒職)으로 정규 화원직이 아닌 임시직으로 3명이 있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경험이 많고 노련한 종 6, 7, 8품의 화원이 바쁠 때 지원역할을 했을 것이다.
/근수노(根隨奴)는 시중을 드는 몸종으로 수행비서의 역할을 하는데 2명이 있었다.
/차비노(差備奴)는 그림 업무에 필요한 재료의 준비와 관리 따위를 보조하는 일을 했으며 5명이 배속되었다.
/배첩장은 작품을 배접하여 병풍이나 족자를 만드는 일을 하는 장인으로 2명이 있었다.
/특별히 영조 때 전자관(篆字官)이라는 특별 임무를 맡은 2명이 도화서에 배속된 적이 있었다.
전자관(篆字官)은 전자(篆字)는 한자 서체의 하나로 예서(隸書) 이후(以後)에 다양한 서체가 발명(發明)되기 전의 가장 오랜 서체이다.
이 전자를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을 전자관이라고 한다. 그림과는 관련이 없지만, 전자라는 고체는 일상적으로 쓰는 서체가 아니었기에 그림으로 여겼다. 전자관도 글자를 마치 그림 그리듯이 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정순왕추 반차도의궤의 일부분이다. 이 반차도나 의궤를 제작하는 일은 도화서의 주요 업무였다.]
궁중 화원이라고 모두 [십장생도]나 [궁중모란도]같은 멋진 그림만 그리는 것은 아니었다.
왕실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나 그릇에 들어가는 그림부터 수레나 기계 그림, 궁궐 단청 그리기, 지도 제작, 가례에 관련한 의궤 따위를 그렸다.
심지어는 편지지에 줄을 긋는 일도 했다.
“이번 임금의 가례에는 반차도(班次圖)를 그릴 것이다.”
“반차도라고 하면, 참가하는 모든 사람과 각종 기물뿐만 아니라 행사 장면 전체를 그려야 하지 않소?”
“그뿐만 아니다. 왕실 종친들이 앉을 자리에 필요한 [십장생도], [화조도], [모란도] 병풍도 새롭게 제작해야 한다.”
화원 신한동이 나지막이 투덜거린다.
“당분간 제시간에 퇴근하기 글렀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