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용평GC, 버치힐GC를 다녀왔다고, 친절한 구글이 알려준다.
용평을 빼고 우리나라 스포츠 레저를 말할 수 없다.
지금은 흔히 쓰는 4계절 종합 휴양지라는 말도 용평이 들여왔고, 숙박형 레저 스포츠 문화도 이곳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또한 용평이 씨앗이요 뿌리였다.
‘강원도’ 라고 하면, 나는 아직도 대관령을 넘어 내려가는 아흔아홉 굽이 길이 생각난다.
그 대관령 턱밑에 1975년 ‘용평’이 문을 열었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스키장이었고 리조트의 시작이었다.
80년대에도 90년대에도 용평은 꿈같은 해방구였다. 지금은 ‘드래곤밸리호텔’이라 부르는 ‘주화호텔’ 로비의 페치카 앞에 겨울 밤마다 모여들어 몸과 마음을 녹이던 청춘들은 어디에서 얼마나 늙어가고 있을까.
1988년 문을 연 용평컨트리클럽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 유명 설계자가 디자인한 골프코스다.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Robert Trent Jones Jr.)가 설계한 이 골프장은 최초의 양잔디 코스, 최초의 ‘원 그린’ 코스인 동시에, 최초의 도전적인 스타일 코스로 기록된다.
그 이후 페리 오 다이(Perry O. Dye)가 설계한 ‘우정힐스(1993)’를 비롯한 많은 골프장들이 서양 설계자들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고, 국내 설계자들도 이에 영감을 얻어 전략과 도전성을 중시하는 현대적인 코스들을 빚어내게 된다.
버치힐GC는 2004년에 문을 열었다.
코스 설계자는 제주의 클럽나인브릿지를 설계한 이로 잘 알려진 로널드 프림(Ronald W. Fream, 미국 골프플랜 사)이다.
그는 나인브릿지에서 데이비드 데일(David Dale)에게 조형설계를 맡긴 바 있는데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버치힐 또한 데일이 조형을 맡았지 않았을까 싶다.
용평GC는 개장 당시에 혁신적인 코스였으나 지금은 버치힐GC를 중심으로 써서 책에 담아야 할 것 같다. 용평 코스가 아직 매력 있기는 하지만 버치힐이 더 많은 이야기를 코스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코스는 발왕산(1,459m)과 고루포기산(1,238m)에 둘러싸여 있다. 대략 해발 730~780미터 지대에 조성되었는데 이 높이에서 사람의 생체리듬이 가장 활발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높은 산 중턱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이렇듯 다이내믹한 코스를 만들어낸 것에 감사한다.
우리나라 설계자가 맡았다면 아마 봉우리 몇 개는 쳐냈을지도 모르겠다.
서양 설계자들은 성토(盛土)와 절토(切土)의 개념을 거의 머리에 두지 않는 듯하다. 자연 그대로 길을 내는 그들의 스타일은 “점수가 잘 나오는 코스가 좋은 코스”라 여기는 골퍼들을 당혹스럽게 하지만, 세계에서 드문 개성을 지닌 산악형 코스를 가끔 빚어내기도 한다.
이 글은 버치힐GC 탐사기를 쓰기 위한 워밍업 차원의 단상이다.
홀들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책에 실릴 본격 탐사기에서 다룰 것이되 대략 보아도, 장쾌하고 모험적이며 정교하고 전략적인 요소가 산중턱 능선들을 타고 탐험소설처럼 펼쳐진다.
오르막 좁은 지형을 그대로 두고 모험적인 길을 낸 힐코스 3번 파5 홀, 발왕산의 7개 봉우리들을 한눈에 보며 플레이하는 버치코스 6번 홀 등은 이곳의 자연 풍광과 향기를 날것으로 맛보게 한다.
클럽하우스에서 내려다보는 버치코스 1번 홀의 장쾌한 풍경과 버치코스 2번 홀 페어웨이의 구상나무는 꿈속에서 가끔 나를 찾아온다.
버치코스 3번 파3 홀은 아름다움과 위태로움 사이에서 절묘하다. 티잉 구역의 커다란 느릅나무는 무언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데 다음에 가면 조용히 다시 듣고 싶다.
골퍼의 기량과 두뇌와 인내와 체력 등을 골고루 시험하는 코스이니 골프가 자연과의 교감이자 투쟁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맑고 아름다운 곳은 드물다.
90년대 어느 해 유월, 나는 이곳에서 한 달 남짓 지냈었다.
프로젝트 기획에 전념하라는 임무를 준 클라이언트는 나를 용평에 구금하였다.
“대관령에서도 잘 터지는 애니콜” 핸드폰을 광고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나는 486DX 노트북으로 작업해서 천리안에 접속해 전송하며 일했다.
지내다 보니 호텔 로비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사진가, 작가들이었는데 그들과 횡계 읍내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는 칠흑처럼 깜깜한 도암호에 가서 별을 보기도 했다. 그 순간 우리 스스로 별처럼 빛나는 청춘인 것도 모르는 채로......
그때에 견주어 지금의 용평은 훨씬 커졌다. 알펜시아 리조트 단지와 올림픽촌까지 생겼으니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 한편 오히려 어딘가 빛바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의 젊음이 기억 속에 언제나 푸르고 고운 것처럼 이곳도 영원히 푸르기를 바라며 탐사기를 쓰려 한다.
떠나는 봄, 가는 세월이 아쉽다면 지금이라도 가볼 만하다. 이곳은 이제서 철쭉꽃 봉우리가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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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골프장이야기] 둘째권 집필을 위한 골프장 탐사 중의 단상입니다.
첫째권이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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