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골프장은 무엇을 주는가
“남코스는 10타 이상 더 치니까 멘탈 무너지지 마세요. 저희가 스코어는 잘 적어드려요~”
5번 홀에서 오비를 내고 턱 높은 벙커에 빠뜨렸다가 쓰리 퍼트로 ‘양파’를 한 동반자에게, 눈치 없는 캐디가 위로하며 말했다.
“보통 다섯 개 쳐요” 하던 동반자는 이미 ‘여섯 개’를 넘겨 치고 풀이 죽어 있다.
골프는 사냥과 방목의 본능을 일깨우는 운동경기다.
활 쏘고 창을 던져 짐승을 잡으며 가축을 몰아 산과 들을 헤매던 기억은, 우리 유전자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가 골프채를 잡으면 되살아난다.
문명사회를 이루었어도 사람의 심신 감각은 수렵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날것’이다.
활과 창 대신 골프채를 쥐고, 짐승이 아닌 골프장과 싸우는 것이다.
골프장은 산짐승 날짐승들처럼 움직여 달아나지 않지만 묵묵히 저항한다. 숲과 물과 덤불, 모래구덩이로 길을 막고 ‘골프코스의 수호령(守護靈)’ 같은 바람을 불러 화살(공)의 궤적을 비틀고 피한다.
미인계를 쓰듯 매혹적인 풍광으로 적(골퍼)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거나, 제갈량이 설치해서 육손(陸遜)을 가두었다는 기문팔괘진(奇門八卦陳)처럼 착시와 불안을 부르는 조화를 부리기도 한다.
토끼를 잡는 것도 맹수를 잡는 것도 매한가지로 사냥이니, 더러는 맹수 같은 골프장들이 있기 마련이다.
토끼나 노루 사냥하듯 골프를 즐기는 이가 세상에 흔하지만, 맹수와의 싸움 같은 골프에 더 홀리는 이도 적지 않다. 그것은 골퍼의 실력 급수가 아니라 사람의 본능이나 성품에 따라 다른 것이겠다.
좋은 골프장을 가리는 평가 기준에서 난도(Resistance to Score)는 심중한 지표 항목이다. 점수 잘 나오는 코스가 많은 이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더 야수 같은 코스에 도전함으로써 기쁨을 느끼는 이들이 골프의 강호를 지배한다.
세계의 이름난 토너먼트 골프장들을 사냥해 짓밟음으로써 더 사나운 맹수로 거듭나게 하고, 이윽고 골프코스 설계의 변화 흐름을 이끈 위대한 골퍼의 이름이 ‘타이거’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좋은 인생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겸양 속에서 늘 새로워지려는 사람의 것이라 믿는다.
좋은 친구와 환경이 사람의 장점과 아쉬운 점을 거울처럼 비추어 새로움을 향한 노력을 이끄는 것처럼, 어려운 골프코스는 골퍼가 보완해야 할 점을 낱낱이 드러내 주기도 한다.
웰리힐리CC 남코스는 어렵기로 이름난 골프장이다.
2007년 '오스타CC'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현대성우그룹이 주인으로 현대시멘트사업본부 ‘오스타리조트’ 개발의 일부분이었으며 '오케이(Okay)'의 첫글자와 별을 뜻하는 스타(Star)를 합친 이름의 ‘성우오스타’로 불렸다. 2012년 신안그룹(리베라CC, 신안CC, 그린힐CC 등 운영)이 사들여 ‘웰리힐리’로 이름을 바꿨다.
‘웰리힐리’는 Well Being과 Hill을 합쳐 만든 이름일 것이라 추측한다.
이 코스를 설계한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RTJ.)는 이 남코스를 두고 “내가 설계한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스의 하나가 될 것”이라 말했다는데, 세간에는 “RTJ가 마음먹고 어렵게 만든 코스”라 소문났었다.
강원도 횡성 술이봉(888m) 중턱 650미터 지점, 웅장한 산중 분지에 남코스는 자리 잡았다.
자연 지형을 살린다는 설계철학의 발현인지 산줄기의 흐름이 코스 모양에 잘 드러난다.
그 흐름을 타고 오르막, 내리막, 긴 홀, 짧은 홀, 도그렉 홀 등이 번갈아 배치되어 긴장을 점증시킨다.
페어웨이는 울퉁불퉁해서 평탄한 곳에 티샷을 안착시키기 쉽지 않으며 그린 주변은 거의 연못이나 낭떠러지, 깊은 벙커로 둘러싸인 채 솟아오른 거북 등짝 모양이라 관용성이 적다.
이 코스에서 ‘KEB인비테이셔널’과 ‘동부화재프로미오픈’ 남자프로 정규대회가 열렸을 때, 특히 16번 파4 홀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악몽 같은 홀’로 이름 높았다. 2008, 2009년 우승 스코어가 4라운드 합계 5~6 언더파였는데 선수들이 점차 코스 공략법을 깨달았는지 2010년에는 14언더파, 2012년 15언더파 우승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니 프로선수들의 능력은 놀랍다. 짧거나 쉬운 홀에서만 버디를 노리고 길고 어려운 홀에서는 철저하게 겸손을 지켜서 그런 결과를 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코스가 장타 능력과 정교한 기술샷에 더하여 경기 운영 전략 능력까지 골고루 시험한다는 뜻이겠다.
본디 파72였던 코스를 지금은 파75로 운영한다.
8번 파5 홀(오르막 541m)이 파6로 조정 되었고, 9번 파4 홀(오르막 430m)이 파5로 너그러워졌다. 최고 난도로 악명 높던 16번 파4 홀(오르막 435m)도 파5로 변했다. 이곳에서 정규 대회가 다시 치러진다면 파72로 환원 운영될 것이라 본다.
하지만 파75로 라운드해도 일반 골퍼들에게는 여전히 쉽지 않다. 여북하면 캐디가 “10타 더 나오니 멘탈 무너지지 말라” 했겠나.
3번 파3 홀(184m)에서 커다란 연못가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듯한 그린은 비장미 넘쳐 보인다. 4번 파5 홀 물위에 비스듬히 떠있는 듯한 그린 주변의 구도, 13번 파5 홀 티잉 구역에서 보는 길고 경사진 페어웨이와 그 오른편의 세이빙 벙커 군락에서도 승부를 넘나드는 잔혹미가 엿보인다.
(이 글은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집필을 위한 탐사 후의 단상이다. 개별 홀들에 대해서는 책에 실리는 본격 탐사기에서 살펴 보려 한다. 이 골프장 북코스를 마저 답사한 뒤 함께 다룰 것이다.)
좁은 과녁에 화살을 명중시키듯 공략하라고 이 코스는 요구한다. 긴 오르막 홀들은 장타와 정교함(Far & Sure), 그린에서 볼을 세우고 굴리는 기술력과 상상력까지 집요하게 주문한다.
이 코스의 난도 밖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책에 실릴 본격 탐사기에서 되도록 상세히 다루려 한다.
이곳이 한국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특히 이천십년 전후 들어 생긴 골프장들 가운데는 이에 버금가는 난도를 갖춘 곳들도 더러 있다. 이런 코스들은 골프의 본령을 느끼려 하는 골퍼의 원시적 수렵 본능을 일깨운다.
그런 가운데서도 웰리힐리 남코스는 예민한 맹수 같은 위엄을 품고 있다. 어렵다는 원성이 드높더라도 파72를 유지하여 운영할 수는 없는지 모르겠다.
맹수는 집짐승이 사냥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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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골프장이야기] 둘째 권 집필을 위한 골프장 탐사 중의 '워밍업' 단상입니다.
첫째 권이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