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채만 잡으면 먹이를 좇는 야수처럼 공만 보며 돌진하는 나의 친우는, 이 골프장에서는 ‘사피엔스’로 진화한다.
포천의 물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산맥은 북에서 남으로 걷는다.
쥬라기의 조산 운동으로 격렬하게 솟아오른 화강암층은 바람에 식어 구릉이 되고 물을 만나 분지를 이루었다.
함경도 추가령에서 인왕산 쪽으로 억년 세월 내달려온 한북정맥의 운악산 구릉에, 1995년 이 골프장이 들어섰다.
원로 프로골퍼이자 골프코스 설계가인 김승학(1937~) 선생이 설계와 조성 공사를 총지휘했다.
당시의 땅 주인이 직접 개발하던 것을 SK그룹(당시의 선경)이 인수하여 문을 열었고, 2001년에 ‘농심’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같은 해 문을 연 화산CC와 함께 ‘북일동 남화산’이라는 말로 칭송되어 온다.
화산CC가 용인 땅 육산(肉山)의 고운 품에 안겨 있다면 일동레이크는 ‘포천석’으로 유명한 화강암의 정순한 금(金)기를 딛고 서 있다.
페어웨이 언덕에서 포천 일동 분지를 내려 보면 쩌렁쩌렁한 바위 소리가 호령하는 듯하다. 이렇듯 강한 기세를 섬세한 조경과 정교한 설계 조형으로 가두어 빚은 공력이 도저하다.
일동레이크는 여러 면에서 기념비 같은 골프장이다.
우선, 한국 골프장에 ‘원 그린’ 바람을 일으킨 코스이다.
한국인이 설계한 것으로는 최초로 문을 연 원 그린 골프장이다. 고 임상하(1930~2002) 선생이 설계하여 비슷한 시기에 공사한 화산CC가 같은 해에 원 그린으로 문을 열었으나 일동레이크가 몇 달 빨랐다.
그 이전에는 일본 코스들을 본받아 골프장 그린이 두 개씩이어야 하는 줄로 알았다. 1988년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가 설계한 용평CC, 1993년 페리 오 다이가 설계한 우정힐스CC가 원 그린으로 문을 연 바 있으나 이들은 ‘서양식 코스’라고 예외로 보았다.
‘투 그린’은 “공이 놓여 있는 그대로 플레이 한다”는 골프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며,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있는 관리 편의적 방식이다. 일동레이크와 화산이 문을 연 뒤로 국내 골프장들은 거개가 원 그린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바위를 노출하여 코스 조경에 끌어들인 것도 나라 안에서 이 골프장이 처음이었다.
그 전에는 산중에 골프장을 만들면서도 바위 봉우리를 깨부수고 감추려 했거나, 산을 깎아 평평한 계단식으로 만들던 것이 보통의 사정이었다.
일동레이크는 자연 지형을 살려 코스 길을 내고 산의 속살인 바위를 노출하였으니, 한반도 산중 지형의 개성을 살린 한국적 코스 미학의 한 갈래 시작점이라 할 만하다.
특히 힐코스 9번 홀 왼편 호숫가 암벽은 자연 암반을 절리(節理) 형태로 가공하여 노출시킨 인상적인 조경이다.
이후 많은 골프장들이 바위 조형을 시도하였으되, 이 골프장의 화강암 조경만큼 자연의 기운이 생동하는 것은 보기 드물다.
산에 있던 나무들과 구릉의 선형을 그대로 살리고 연못의 물 흐름을 몇 개 홀에 걸쳐 흐르게 함으로써 자연의 본디 모습인 듯한 생태를 재구성한 것 또한 새로운 시도였다.
지금은 클래식으로 추종되는 방법들이다.
또한 이 골프장은 국제대회를 치를 수 있는 토너먼트 규격으로 만든 코스로 주목받아 왔다. 코스 설계자인 김학영 선생은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활약한 프로골퍼 출신이다. 한국 최초의 프로골퍼 연덕춘 선생에게 골프를 배우고, 제일모직 이병철 사장의 배려로 일본과 영국의 골프장을 탐사한 뒤 일본의 골프장 설계회사에서 전문 실무를 익혔다. 안산의 ‘제일CC’가 그의 첫 작품이며 일동레이크는 ‘국제 토너먼트 규격’을 적용한 야심작이다.
(그는 뒤에 양산 ‘에이원’, 제주 ‘크라운’과 ‘테디밸리’ 등을 설계했다)
문을 연 이듬해인 1996년에 이 골프장에서 ‘삼성월드챔피언십여자골프대회’가 열려, ‘원조 골프여제’ 애니카 소렌스탐이 우승했고 19세의 박세리 선수가 3위에 올랐다. 박세리 선수는 그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1998년 US오픈에서 우승했다.
SK텔레콤오픈, 우리투자증권레이디스챔피언십 등의 많은 대회가 이곳에서 열렸으며, 정일미, 신지애, 유소연, 김세영 선수들이 우승했다.
1998년부터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테스트 본선대회가, 2002년부터 KPGA시니어 대회와 KPGA 프로 신인왕전이 치러지기도 했다. 이 코스가 한국의 대표적인 선수들을 길러낸 변별력 있는 토너먼트 코스라는 것에 골프인들 대부분이 동의한다.
남자 프로 정규 대회가 열릴 때는 7,209야드 파71로, 여자 프로 정규대회에서는 6,500야드 전후의 파72로 세팅하여 14개 규정 클럽을 모두 사용하는 기술을 시험한다.
이 골프장은 클럽하우스부터 코스의 조형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1995년 개장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클럽하우스 내외장재를 일부 교체하였고 18번 홀 그린 주변 마운드의 난도를 다소 낮추었을 뿐이다.
개장 당시 “너무 강해 보인다”는 말도 듣던 바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에 동화되는 모습이며, 수천 그루의 조경 소나무와 느티나무들은 세월만큼 심원해져 간다. 어떤 나무는 ‘스타워즈’에 나오는 ‘요다’를 닮은 것 같다.
원래 지형의 특성을 살려 ‘마운틴힐GC’라 이름 붙이려 했는데 포근한 느낌을 주기 위해 ‘레이크’를 써 일동레이크로 지었다 한다. 마운틴코스와 힐코스로 나뉘었으니 본디 이름은 남은 셈이다. (‘일동’은 지역 이름이다. 일동 북쪽에는 ‘이동막걸리’, ‘이동갈비’로 유명한 ‘이동’이 있다.)
마운틴코스는 남성적이고 힐코스는 여성적이라고 흔히 소개되지만, 요즘 세상에 그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마운틴은 장쾌하고 힐코스는 섬세하다 할까.
시야가 탁 트인 홀들에서 포천 들판 너머 먼 산맥의 겹능선이 유장한 원경으로 이어가는 가운데, 바위의 웅장미를 시각의 중심으로 잡고 기묘한 정원 소나무들로 정원 스타일의 근경을 꾸몄다.
각 홀들은 저마다 다른 개성이 있어서 기억에 쉽게 남는다. 다녀간 사람마다의 추억도 홀마다 다르게 서려 있을 것이다.
2번 파5 홀에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이글 기념 나무가 서 있으며 3번 파3 홀에는 이 신춘호 농심 회장의 홀인원 기념 나무도 있다.
인상적인 곳을 고르라면 사람마다 다를 만큼 극적인 홀들이 즐비하다. 전반(마운틴)코스 7번, 8번, 9번 홀은 아름답기 그지없을뿐더러 복선과 반전으로 드라마틱하다. 길이가 짧지만 욕심과 실수를 유발하는 8번 파5 홀과 버디를 노리려 최대한 왼쪽으로 붙이려다 바위 절벽 호수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9번 파4 홀이 토너먼트 코스다운 승부의 반전을 유발한다.
후반(힐)코스에도 극적인 홀들이 많으나 18번 파3 홀이 가장 인상적인 승부처로 꼽힌다. 마지막 홀을 어려운 파3로 배치한 것은 토너먼트 코스로서 개성이 돋보이는 구성이다.
큰 호수와 깊은 가드벙커를 넘어 그린 오른쪽 끝의 핀을 향해 205야드(레귤러티 173야드) 페이드샷을 해야 하는 마지막 날 마지막 홀의 드라마는 짜릿하다. 최후의 한 샷까지 승부의 향방을 따지는 것이다.
이 홀 그린 주변은 마지막 홀 갤러리 운집을 감안한 스타디움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사람에 따라 16번 홀 그린 뒤 바위산과 그 꼭대기 한그루 소나무를 명물로 꼽는 이도 있다. 16, 17, 18번 홀 모두 개성이 선명하며 극적인 승부를 부른다.
이 글은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집필을 위한 탐사 메모로 적는 단상이다.
자세한 코스 탐사기는 책에서 다룰 것이되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이 코스에는 특별히 눈에 띄게 설치한 장애물이 드러나지 않는다.
일곱 개의 호수가 아름다운 바위산을 휘감아 돌고 요소요소에 자리잡은 벙커들은 최근에 생긴 코스들만큼 깊지 않다. 핸디캡 요소들이 험난해 보이지 않고 유려하지만 저마다 제 자리에서 이유와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아마추어 골퍼인 내가 프로 대회 토너먼트 코스로서의 적합성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간 쌓인 데이터들에 기대어 엿보건대, 험난한 핸디캡 요소로 가득하여 레크리에이션 골퍼들에게는 어렵기로 소문난 코스들이 프로 대회에서는 20언더파 이상으로 맹폭당하기도 하는 데 견주어, 이 코스는 험난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쉽게 공략당하지 않는 균형과 픔격을 보여준다.)
넉넉한 크기의 그린은 요즘 코스들에 견주어 굴곡이 완만한 편이어서, 설계자 김학영 선생께 “새로 다시 한다면 그린 언듈레이션을 더 주시겠어요?” 하고 여쭈니 “다시 만든다면 요즘 추세에 맞추어 좀 더 굴곡을 줄 것”이라 하신다.
나는 지금대로 클래식하게 두어도 좋을 것 같다. 토너먼트를 치를 때 러프의 길이와 그린 스피드를 조절하는 등 난도를 높일 세팅은 많을 것이다.
김승학 선생이 문득 “챔피온 코스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 물으시기에 장황하게 답하려 했더니
“챔피온이 나온 코스가 챔피온 코스고 토너먼트를 치른 코스가 토너먼트 코스”라 하셨다.
방송중계, 숙박, 지원시설 등 모든 면을 다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으나 우선 연습장과 코스 변별력부터 갖추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었다.
글 들머리에서, 골프채만 잡으면 야수로 돌변하여 공만 좇는다는 나의 친우가 이 골프장에서는 ‘사피엔스’로 진화한 면모를 보인다고 적었는데, 그는 세칭 ‘로우 싱글 골퍼’이다.
그는 독서나 지성, 글쓰기나 은유적 수사와는 거리가 멀게 행동해온 사람인데 깨우친 현자처럼 말한다.
“일동레이크에서는 한 샷 한 샷 생각하면서 쳐야 하고 풍경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해”
그 속은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골프장이 ‘명문’이고 ‘클래식’이라는 그의 주장에 나도 적극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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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책자 제 2권 집필을 위한 골프장 탐사 중의 메모 단상입니다. 책에 실리는 탐사기에서 더 상세한 내용을 다룹니다.
첫째 권이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