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컨트리클럽은 1975년 경기도 수원에서 용인, 이천, 여주로 가는 국도변 구릉에 문을 열었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분지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낮은 야산에 산림녹화 조림사업으로 형성된 숲이었다.
수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여주 외가에 갈 때면 시외버스를 타고 이 앞길을 지나곤 했다. 검은색 토요타 크라운과 포드20M 승용차가 이 골프장으로 들어가던 장면을 기억한다. 입구에서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골프장 안으로 차가 사라질 때까지 거수경례 자세를 빳빳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이 골프장 입구에 들어설 때면 그 기억 속 아저씨에게 마음속으로 고개 숙여 인사한다.
어제와 오늘
수원컨트리클럽을 만들어 처음 문 연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장으로 현존하는 한양컨트리클럽을 세웠던 조봉구(당시 삼호개발)회장이다. 그는 1964년 경기도 고양에 한양컨트리클럽을 만들어 운영하다가 1972년 서울컨트리클럽 사단법인에 매각했다(이 과정은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제1권 서울·한양컨트리클럽 편에 적었다.) 그리고 1975년에 수원컨트리클럽을, 1979년에는 제주에 오라컨트리클럽을 세웠다.
그 뒤 수원컨트리클럽은 1984년 삼흥개발이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오라컨트리클럽은 대림산업에 인수된 뒤 2021년부터 골프존이 임차 운영 중이다.
70년대 수원CC 개장 직후의 모습
구코스 18홀 - 연덕춘 설계
수원컨트리클럽(이하 '수원CC') 창립 당시 (구)코스 18홀 설계자는 연덕춘(1916~2004) 선생이다. 그는 한국인 첫 프로골퍼이자 최초의 골프코스 설계가였다.
연덕춘은 일제 강점기이던 1930년 지금의 서울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있던 군자리코스(당시 경성컨트리구락부)에서 캐디 보조로 일하면서 골프를 배우기 시작하여,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20세에 프로골퍼 자격을 얻었으며 1941년 ‘전일본오픈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광복과 한국전쟁 후 그는 군자리코스가 ‘서울컨트리클럽’의 ‘능동코스’로 재건될 때 코스 조성 공사를 맡았다. 전쟁으로 허물어지고 농지로 개간되었던 땅을 골프코스로 되살리는 과정에서, 연덕춘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프로골퍼로서 경험한 일본 골프코스들을 참고하여 복원 설계·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설계자 연덕춘 선생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 건설된 한양컨트리클럽 (구)코스도 연덕춘이 설계했다.(안중희와 공동 설계). 이때 업무 인연을 맺은 조봉구 회장이 그 후 수원CC와 제주 오라CC 설계를 잇달아 그에게 맡겼다.
연덕춘이 설계한 골프코스들은 서울CC 능동코스(복원, 1954년), 한양CC(1964년), 태릉CC(1966년), 제주CC(1966년), 부평 시-사이드CC(1970년, 현 인천국제CC), 수원CC(1975년), 여주CC(1975년), 오라CC(1979년), 태광CC(1984년), 경주보문GC(1987년), 팔공CC(1987년), 양주CC(1990년) 등이다. 그에 의해 우리나라 프로골프와 골프장 설계의 초기 역사가 쓰였다고 할 수 있다.
가토 후쿠이치가 설계한 신코스
1975년에 문 연 구코스 운영이 점차 자리 잡아가던 1981년에 9홀, 95년 9홀이 증설되어 신코스 18홀이 구성되면서, 36홀의 수원CC가 완성되었다.
신코스는 일본의 골프코스 디자이너 가토 후쿠이치(加藤福一)가 설계했다. 그는 일본 효고 현의 마스터스 골프클럽을 비롯하여 JLPGA 산토리레이디스오픈이 열리는 고베의 명문 로코 국제(六甲國際)골프클럽과, ‘리조트트러스트 레이디스’ 대회 등을 치른 도쿠시마현의 명문 ‘랜디나루토 골프클럽’ 등 수많은 코스들을 설계한 유명 코스 디자이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 문 연 도고CC를 시작으로 한성CC(1975년), 가야CC(1988년), 천룡CC(1995년)를 설계했다.
수원CC 홈페이지에서는 설계자를 가토 후쿠이치 한 사람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현재 소유회사인 (주)삼흥이 이 골프장을 인수한 1984년에 이미 구코스 18홀과 추가 9홀이 운영되고 있었던 사실을 보면, 가토 후쿠이치가 90년대 중반에 신규 9홀을 설계하면서, 81년부터 운영하던 9홀을 재설계하여 신코스 18홀로 완성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시대적 배경 - 골프 환경
수원CC(구코스)가 처음 문 열었던 때, 골퍼들은 대다수가 사업가였다.(금융인, 정치인과 관료, 군인도 일부 있었다) 골프가 경제 상류층의 비즈니스를 위한 사교 운동이었던 시절이었기에 골프를 즐기는 이들의 나이는 오십대 이상이 대부분이었다. 프로 선수들은 매우 적었고 수준 높은 프로골퍼들의 플레이를 볼 수 있는 기회도 거의 없었다.
드라이버의 재질이 감나무였고 지금처럼 탄성 높은 샤프트는 상상도 못하던 때였으므로, 비거리는 상대적으로 짧았으며 일반인들이 높은 탄도의 아이언샷을 구사하기는 어려웠다. 지금 골퍼들은 누구나 세계 최고의 프로골퍼들이 그린 위 핀 근처에 화살처럼 적중하여 세우는 샷을 영상으로 보고 따라하려 하지만, 당시는 공을 핀 가까이 떨어뜨려 바로 세우기보다는 굴려서 어프로치 하는 샷이 애용되던 때였다. 평범한 골퍼들이 인식하던 샷의 개념이 ‘화살 쏘기’보다는 ‘창던지기’에 가까웠던 때였다고 할까.
관리 기술의 한계와 극복
코스 관리 기술도 지금과는 달랐다. 양잔디는 물론 중지 잔디품종도 보급되기 전이었고, 잔디를 짧게 깎기 어려운 들잔디(야지)를 페어웨이에 심었으므로 긴 풀 위에서 아이엇샷 한 볼에는 스핀이 잘 먹지 않았다. 그린은 벤트그래스를 식재했으나 한지형 잔디 관리 기술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기에 그린을 두 개 만들어(투그린) 번갈아 썼다. 벙커의 턱과 사면은 장마철이면 무너지고 유실되었기에 깊고 경사진 벙커를 만들기 어려웠다.
수원CC 구코스는 70년대의 그러한 골프 환경을 감안하고 극복하며 조성한 골프장이다. 세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지속적으로 개선되어 왔지만 큰 틀에서 보면 처음 만들었을 때의 역사적 특성들을 고유하게 간직하고 있다.
구코스 17번 파5 홀
신코스는 80년대 초반에서 90년대 중반에 조성된 코스여서 페어웨이에 중지 잔디를 심었다. 중지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던 들잔디(야지) 중 잎 폭이 좁고 직립성이 강한 것을 골라낸 품종으로 병충해에 강하고 들잔디보다 촘촘하게 길러 짧게 깎을 수 있다. (최근 들어 구코스 잔디도 점차 중지로 교체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지에 대해서는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제1권 ‘안양CC'편 등에서 적었다. 중지와 야지를 ’조선 잔디‘라 적는 이도 있더라만, 굳이 그런 식으로 부르려면 ’한국 잔디‘로 통칭하는 게 낫다고 본다.)
구코스와 신코스 - 다른 개성과 난이도
신코스가 구코스보다 20년 뒤에 완성되었으니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겠으나 구코스와 신코스는 서로 다른 개성과 매력이 있다. 구코스는 짧고 아기자기하며 신코스는 넓고 길다고 하는 이가 많은데 실제로 페어웨이는 신코스가 시원하게 넓은 편이며 그린 콤플렉스(그린과 그 주변) 플레이 공간 조형도 신코스가 풍성하다. 반면에 구코스는 자연 지형의 흐름을 유지하고 이용하여 변별력을 살려낸 조형이 클래식해 보인다.
구코스 총 길이가 6,813야드(화이트티 6,431야드, 레드티 5,326야드) 신코스가 6,967야드(화이트티 6,661야드, 레드티 5,297야드)이니 신코스가 구코스 보다 (총 전장으로는 154야드, 일반 골퍼들이 주로 사용하는 화이트티는 230야드) 길다.
코스레이팅/슬로프레이팅 평가 수치로 보면, 핸디캡이 0인 스크래치 골퍼들에게는 신코스가 구코스보다 약간 어렵고, 실력이 평범한 골퍼들에게는 비슷하거나 구코스가 미세하게 어렵다고 측정된다.
코스레이팅은 구코스 블루티 73.8(화이트티 71.7), 신코스 블루티 74.7(화이트티 72.8)이니 평균적 난도 측정된다. 슬로프레이팅으로 보면 구코스 화이트티 134, 신코스 화이트티 132이다. 기대 타수를 계산해 보면 핸디캡 18인 골퍼가 구코스(화이트티)에서는 93(93.3)타, 신코스(화이트티)에서는 93(93.0)타를 치게 된다는 뜻이다. (골퍼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난도가 높은 편이다.)
"구코스는 클래식하고 신코스는 우아하다."
연덕춘 선생이 구코스를 만들 때, 그 이전에 만든 몇 개 코스의 설계 경험 위에 프로 투어 챔피언으로서의 의욕을 얹어 변별력을 높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연의 굴곡과 흐름을 이용해서 배치하되 인공 장해물들이 적극적으로 그린을 방어하는 홀들이 나타나곤 한다. 1번 파5 홀에서 커다란 인공 연못 너머 벌크 헤드 형으로 바투 붙은 그린과 14번 홀에서 오르막 그린을 방어하는 직벽 벙커는 뒤에 수정 완성한 것이라는데, 옛 설계 원형을 어림해보아도 골퍼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모양이었을 듯하다.
구코스 1번 파5 홀 페어웨이에서 본 그린
신코스는 전체적으로 티샷을 마음껏 칠 수 있을 만큼 넓으면서 홀마다의 길이와 벙커 등의 장해물, 그리고 그린 주변의 변화를 기능적으로 구사하여 은근한 변별력을 심어놓았다. 다양한 코스를 설계한 경험이 많은 가토 후쿠이치가 이곳 지형의 완만한 특성을 감안하여, 그린을 시원하게 조망하며 공략할 수 있는 편안함과 관리의 편의성, 그리고 우아한 조형에 중점을 두어 설계한 듯하다.
이 골프장 회원들 중에서 나이 많은 이들은 주로 구코스를 좋아하고 젊은 층은 신코스를 좋아하는 편이라고 한다.
구코스 이야기, 인상적인 홀들
이 골프장 구코스는 한양컨트리클럽 신코스와 부분적으로 비슷하면서도 좀 더 업다운이 있는 가운데 역동적인 느낌이 든다. 70~80년대에 만들어진 투그린 골프장들은 그린과 그 주변 플레이 공간이 작고 그린의 경사가 한쪽 면으로 기울어 단조롭거나 벙커가 형식적으로 배치된 경우가 많은데 이 코스의 그린 콤플렉스는 단조롭지 않다. 특히 원그린으로 조성한 몇 개 홀들은 그린 주변 장해물의 존재감이 뚜렷하고 그린 위 언듈레이션도 풍부한 편이다.
대부분 홀들에서 페어웨이 양 옆의 숲과 나무들이 위협하며 게임 승부의 변수로 작용한다. 장타를 노리기보다는 그린을 공략할 어프로치샷 할 각도와 거리를 계산하여 티샷 해야 수월하게 플레이할 수 있다.
구코스의 시그니처 - 1번 홀
구코스 1번 파5 홀 그린
1번 파5 홀은 클래식한 느낌 속에 스타일리시한 조형과 샷 변별력을 고루 갖추고 있다. 높은 티잉 구역에서 드넓은 페어웨이로 마음껏 티샷 할 수 있지만, 세컨샷 위치에서 보면 그린은 오른 쪽 숲 뒤 연못 품에 안겨 있다. 연못은 바이올린 곡선 모양으로 그린을 감싸고 그린 뒤에는 키 큰 소나무들이 직선으로 늘어서 구도와 리듬감을 완성한다. 장타자들도 투온에 도전하기에는 거리와 각도가 까다롭다. 연못을 넘겨 어프로치샷 할 때의 긴장감이 잘 조율된 현악기의 줄처럼 팽팽한 홀이다.
연못 주변에 심은 영산홍과 벚꽃이 흐드러지는 계절에 더 극적이다. 2016년 부분 리모델링하여 이 그린 주변 조형을 완성했다고 한다.
클래식한 운치의 긴 파3 - 3번 홀
구코스 3번 파3 홀
224야드(화이트티 195야드)의 긴 파3 홀로, 그린 앞에 꽃잎 모양의 연못이 있다. 긴 클럽으로 티샷을 해야 하니 그린 위에 공을 세우려면 낙하지점을 잘 계산해야 한다. 연못을 건너가는 다리는 2009년에 만들었다 한다. 티잉 구역에서 내려다보면 그린 뒤 키 큰 소나무와 억새, 연못에 뜬 연잎이 어울려 고전적인 운치를 자아낸다.
직벽 벙커와 원그린 - 14번 파4 홀
구코스 14번 홀 그린 가드벙커
수원CC는 투그린을 적용한 골프장이지만 구코스에는 4개의 원그린 홀이 있다. 1번, 9번, 14번, 15번 홀인데 그중 14번 홀은 깊은 직벽의 가드 벙커가 그린을 왼쪽 면을 방어하고 있다. 난도가 높지 않으면서도 욕심이 화를 부를 수 있게 만든 홀이다.
구코스 15번 홀 그린 주변
15번 홀도 원그린으로 짧고 쉬운 편인데 그린 앞 가드 벙커가 깊고 그린의 굴곡이 다른 홀들보다 크고 역동적이다. 원그린 홀들의 그린 콤플렉스는 리모델링한 것으로 보이는데 게임의 리듬에 변화와 균형감을 준다.
계절의 변화를 담은 16번 파3 홀
구코스 16번 파3 홀
16번 파3홀에서는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미를 공들여 담은 조형이 돋보인다. 가을이면 왼쪽 비탈의 억새밭이 금빛으로 일렁이고 그린 뒤 상록수는 짙푸르며 그 너머 활엽수림은 노랗고 붉게 타오른다. 봄이면 홀을 감싸며 피어오른 벚꽃과 진달래꽃이 흐드러진다. 그린을 두르고 있는 네 개의 큰 벙커는 티잉 구역에서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공을 잘 빨아들인다. 그린의 굴곡도 은근한 변화를 담고 있어서 상상력 있는 플레이를 부른다. 2008년에 리모델링한 홀이라 한다.
신코스 이야기, 인상적인 홀들
신코스는 처음 조성할 때 광활한 대자연의 구릉 위를 비행하는 듯한 스토리를 품었을 터인데 지금은 아파트 숲이 코스의 절반 홀에서 보인다. 해발 100미터 남짓 낮은 구릉과 완만한 기슭을 마음껏 종횡하며 조성했으니, 산등성이에 얹은 홀은 하늘로 향하는 활주로처럼, 골짜기로 흐르는 홀은 드넓은 평원처럼 펼쳐진다. 유려하게 이어지는 코스의 조형 곡선이 우아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호쾌하다.
신코스에서는 첫 홀에서 마지막 홀까지 호쾌하게 칠 수 있다. 티샷이 까다로운 듯한 홀에서도 마음껏 치고나갈 수 있는 길이 보인다. 페어웨이는 넓고 티잉 구역에서 그린까지 쭉쭉 뻗은 느낌으로 눈이 시원하다. 완만한 지형에 앉힌 코스라 그린 위에서 착시를 일으키는 숨은 경사도 거의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매 홀마다 지형의 특성을 선 굵게 반영하여 지루하지 않고, 끝까지 호방한 재미가 있다는 게 이 코스의 큰 매력이다.
신코스 1번 파4 홀
코스에서 변별력을 중요하게 보는 일부 전문가들은 ‘똑바로 치면 되는 코스’라고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토 후쿠이치는 편안하게 보이지만 막상 쉽지만은 않은 코스를 만들곤 한다. 이 코스도 페어웨이가 넓지만 공이 놓인 위치에 따라 그린 공략 방법이 달라진다. 좌그린과 우그린의 공략 루트가 다를 수밖에 없는데, 다양한 전략으로 페어웨이를 폭 넓게 사용하며 마음껏 때려보라는 뜻이겠다. 페어웨이의 은근한 언듈레이션은 지형의 완만함과 어울린다.
벙커와 연못 장해물들이 그린에 바투 붙어 가로막지는 않지만 헤프게 문을 열어놓은 것도 아니다. 베스트샷만 골라내지는 않으나 미스샷은 걸러낸다고 할까.
이른바 ‘코스랭킹’에서 높은 등위에 오른 우리나라 골프장 중에는, 일반 골퍼들에게는 매우 어렵고 프로골퍼급 실력자들에게는 쉽게 무너지는 코스들이 적잖이 보인다. 수원CC 신코스는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넉넉하게 제공하여 어렵지 않은 한편, 웬만한 실력자에게 마냥 호락호락하게 점령되지도 않는다.
아파트 숲을 빗질러가는 브로드웨이. 신코스 4번 파5 홀
신코스 4번 파5 홀
코스를 둘러싼 얕은 구릉보다 훨씬 높은 아파트 숲이 자연경관을 해치기도 하지만, 오히려 고층 아파트의 수직선과 스카이라인이 코스의 자연 곡선과 어울리면서 인상적인 경관을 만들기도 한다. 14번 파5 홀 티잉 구역에서 보면 페어웨이가 마치 마법의 양탄자처럼 건물 숲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곳 지형과 거주 환경에서만 나올 수 있는 독특한 장면이다.
아파트 숲 너머로 노을이 붉을 때, 영화 속 장면 같은 모습이 나올 듯하다.
577야드(화이트티 564야드, 레드티 435야드) 오르막 파5 홀이며 신코스에서 두 번째로 어려운 홀이라 한다. 티샷은 마음껏 질러갈 수 있으나 세컨샷에서 오른쪽 페널티구역을 조심해야 한다.
이 지형의 서정을 담은 12번 홀
신코스 12번 파4 홀
수원CC 신코스에서 가장 수원CC답게 아름다운 홀을 고르라면 나는 12번 홀을 뽑겠다. 왼쪽으로 천천히 휘는 432야드(레귤러티 415야드, 레드티 313야드)의 긴 내리막 파4 홀이며 페어웨이를 바라보는 시야는 이 코스에서 가장 시원하게 트여 있다. 그린 앞의 타원형 연못이 은근한 긴장감을 주는 가운데 페어웨이 왼쪽의 메타세콰이어 나무와 오른쪽 법면의 단풍나무, 그리고 그린 너머 낙락장송들이 넉넉한 모습으로 서늘한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12번 파4 홀 그린 주변
연못과 벙커가 좀 더 깊이 파고들어와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있다면 변별력이 훨씬 높아졌겠지만 수원CC에는 지금 모습이 잘 어울린다.
신코스 3번과 13번 - 석양에 빛나는 파3 홀들
신코스 3번 파3 홀
골프장 관계자에게 신코스에서 어느 홀이 인상적이냐 물으니 3번 홀을 추천했다. 커다란 연못을 건너는 190야드(레귤러티 172야드, 레드티 134야드) 파3 홀인데 그린이 넓고 시야가 웅장하며, 그린 주변의 노송에 석양이 들면 장관이 연출된다는 것이다.
13번 파3 홀(블루티 170야드, 레귤러티 155야드, 레드티 119야드)도 닮은꼴이다. 두 홀 다 서쪽을 바라고 있어서 노을 들 때 아름답고, 석양이 플레이에 영향을 줄 수도 있겠다.
수원 신코스의 아멘코너 16, 17, 18번 홀
16번 파5 홀 세컨샷 지점
신코스 17번 파5 홀은 승부를 가르는 홀로 꼽힌다. 575야드(레귤러티 558야드, 레드티 451야드)로 긴 편인데다가 레귤러티에서 220야드 지점부터 급격한 내리막 경사가 시작되고 360야드 지점에서 비교적 평평하게 숨을 고른 뒤 다시 그린을 향해 급한 오르막이 계속된다. 좌측으로 약간 굽은 도그렉 형이고 페어웨이 양쪽은 OB 구역이므로 입체적인 변수가 많은 홀이다. 그린까지 세 번의 샷을 실수 없이 쳐야 하며 특히 티샷에서부터 낙하지점을 정확하게 설정하지 않으면 연거푸 어려운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이 코스에서 매년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주최로 ‘NH투자증권 레이디스 챔피언십’ 대회가 열리는데, 이 대회 참가 선수들은 16홀 파3, 17홀 파5, 18홀 파4 홀에 이르는 구간을 '수원CC의 아멘코너'라 부른다고 한다.
관리, 지원
수원CC는 ‘언제나 최고’는 아니더라도 ‘늘 우수한’ 코스 관리를 유지한다.
잔디, 그린, 벙커 등
구코스 잔디는 야지(들잔디), 신코스에는 중지를 심었는데 구코스 페어웨이에도 중지로 바꾼 곳이 눈에 띄었다. 야지를 보급하는 잔디농장이 줄어들고 있다하니 점점 중지로 교체될 듯하다. 잔디 길이는 페어웨이 20mm, 러프 40mm를 지킨다. 정규대회를 치른다고 해서 특별하게 관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그린 스피드는 스팀프미터 측정 기준으로 대회 때 3.2미터 이상, 평소에 2.7~2.8미터를 지킨다.
신코스와 구코스의 벙커는 최근에 유행하는 깊고 스타일리시한 모양은 아니며 벙커 턱이 높더라도 모래 면은 평면으로 조성되었다. 장마철에 집중적인 폭우가 내리는 우리나라 기후에서 일정한 관리 품질을 유지하기에 적합한 스타일이다. 또한 이곳 지형에 어울리는 모양이기도 하다.
골프장과 주거 단지와의 생태 조화
수원CC가 만들어질 때, 이 구릉 언저리는 조림사업이 진행되던 곳이었다. 당시에는 산림녹화를 빨리 이루기 위해 아카시아나 잣나무 등 빨리 잘 자라는 나무들을 주로 심었는데, 이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벚나무, 단풍나무, 낙우송, 낙락장송 등 조경수와 관상용 유실수를 심어 원래 모습보다 더 자연스러운 숲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주변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골프코스를 정원 삼아 에워쌌으니 골프장이 사람들에게 이로운 자연 생태를 만든 예라 할 만 하다.
지원, 기능 시설
골프장 입구에 길이 220미터 102타석의 드라이빙 레인지를 갖추고 있다. 모든 타석에 스윙 분석기가 설치되어 있으며 골프 트레이닝센터, 타이틀리스트 피팅센터가 입주해 있다. 골프채널 방송에서 레슨하는 유명 프로골퍼들이 소속되어 골프 기술을 가르친다.
9홀 규모의 파3 연습코스도 있다. 전장 100미터 내외의 파3 홀 9개와 퍼팅 그린, 벙커샷 연습장이 있다.
클럽하우스 로비
클럽하우스는 이 골프장 신코스의 느낌처럼 여유롭다. 로비가 넓고 공간 분할이 잘 되어 36홀 골프장인데도 붐비지 않는다. 공간을 넓게 쓰고 장식을 배제한 실내 디자인과 단정한 기물들에서 고상한 취향이 보인다. 골프장 클럽하우스 건축 경험이 많은 간삼건축에서 2015년에 리모델링했다.
덧붙임
1976년 제1회 부녀아마추어선수권대회가 수원CC 구코스에서 열렸다.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 여자골프 대회였던 듯하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딸인 이인희 씨와 이명회 씨, 김우중 대우 창업자의 부인 정희자 씨 등이 참가했다고 한다.
1978년에 한국 최초의 여자 프로골퍼(고 한명현 KLPGA 부회장, 고 구옥희 선수, 현 KLPGA 투어 강춘자 대표)들이 탄생하는데 씨앗이 된 사건이 그 대회였으리라 짐작한다.
1980년에는 남녀부가 함께 치른 ‘수원오픈’ 프로골프대회가, 1988년에는 제31회 ‘한국오픈’이, 1994년에는 제37회 ‘한국프로골프(KPGA) 선수권대회’가 이곳 구코스에서 열렸다.
신코스에서는 2011년 ‘서울경제 여자오픈’을 시작으로 2015년부터 2021년까지 ‘NH투자증권 레이디스챔피언십’ 대회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수원CC를 ‘서울에서 가까운 골프장’, ‘유서 깊은 골프장’, ‘넓고 편안한 골프장’이라고 흔히 말한다. ‘전통의 명문 골프장’이라는 평도 오래 들어왔다.
그런 가운데 이천년 대 이후 이른바 ‘골프코스 랭킹’이 여러 매체에서 해마다 발표되고, 그 기준에 드는 도전적이고 변별력 높은 골프장들이 많이 생기면서, 수원CC를 비롯한 ‘전통 명문’ 골프장들을 ‘과거 스타일’로 여기는 흐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수원CC에서는 세계 최정상급 실력의 한국여자프로골퍼들이 매년 대회를 치르고, 세상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한 차림의 한국 수도권 남녀 골퍼들이 매일 36홀에 드나든다. ‘코스랭킹’ 평가에서 높은 등위에 선정되는 설계 스타일의 코스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한국 골퍼들이 좋아하는 여유로운 골프장이기도 하다.
최근 나오는 골프장들에 견주어 창의적이고 상상력 있는 플레이를 부르는 컨텐츠가 적은 코스라고 할 수는 있겠다. 그런 한편 KLPGA 투어 NH투자증권 대회에서 나오는 스코어를 보면, 변별력이 높다고 유명한 다른 골프코스들에서의 결과 수치와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나 혼자 상상으로는, 구코스는 역사성을 살려 보존에 중점을 두어 가꾸어 나가는 한편, 매년 대회가 열리는 신코스는 토너먼트 코스로서의 변별력을 보완하며 개선해 나갈 때 두 코스의 가치가 훨씬 높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그 어느 곳도 흉내 내기 어려운 ‘도심 속 초 명문 클럽’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골프코스에서 변별력이 중요하지만 변별력 높게 설계했다고 좋은 코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코스를 조금만 보완하면, 전통의 서사와 미래의 가치 모두에서 으뜸 급이 될 수 있는 골프장은 세상에 극히 드물다. 수원CC가 그 귀한 하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