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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석무 Dec 10. 2021

블랙스톤이천 골프클럽 - 한국의골프장이야기

2013년 봄, 블랙스톤이천 골프클럽에서 열린 유러피언투어 발렌타인챔피언십 대회를 현장에서 구경했다. 대회 3,4일차 이틀통안 주로 15번 홀에서 18번 홀을 오가며 지켜보았고, 특히 15번 홀 플레이를 눈여겨보았다. 내겐 매우 길고 어려운 이 파5 홀을 유럽 선수들은 어떻게 공략하는지 궁금했는데, 예상 밖으로 3번 우드 티샷 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15번(서코스 6번) 파5 홀 그린


유러피언투어 선수들은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안전하게 페어웨이를 지키려 노력했다. 아이언 어프로치도 그린 위에 핀이 꽂힌 단과 면의 생김새를 꼼꼼히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플레이했다. 15번 홀은 티잉 구역에서 시야가 탁 트인 최장 거리 파5 홀인데도 안전하게 우드 티샷하는 선수들이 적지 않고, 18번 파5 홀은 티샷 시야가 오른쪽 숲에 가려진 도그렉 형인데 오히려 드라이버 샷으로 숲을 넘겨 투온 승부를 거는 선수들이 많았다.

300야드 이상 장타를 칠 수 있는 선수들이 홀마다 다른 전략으로 여우같이 티샷하고 파도처럼 출렁이는 그린에 사뿐사뿐 고양이처럼 낙하시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대회에서 호주 출신 브렛 럼포드(Brett Michael Rumford)가 총 11언더파로 우승했다. 이 까다롭고 역동적인 코스를 우아하게 풀어 나가는 그의 플레이를 흉내 내려다가 나는 그해 골프를 다 망쳤다.     


2011년 발렌타인챔피언십 우승자 브렛 럼포드


“10타 이상 더 치십니다

골퍼의 플레이 스타일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거나, 어렵고 쉽게 느끼는 골프장이 각각 다르다. 그런데 이 골프코스가 쉽다고 느끼는 골퍼는 거의 없는 듯하다.      


매년 이 코스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남녀 프로골프투어 대회 최근 성적표를 보면. 2021년 KLPGA 투어 ‘KB 금융스타챔피언십’ 대회에서 장하나 선수가 4라운드 합계 10언더파로 우승했는데 2위와는 점수 차가 7타였다. 언더파를 친 선수들이 드물었다. 2020년에는 김효주 선수가 4라운드 합계 9언더파로 우승했으며 그때 2위는 (8타 차이)1언더파였다. 남자 프로대회인 KB금융 리브챔피언십 우승자 성적은 2021년(3라운드로 치름) 문경준 선수 8언더파, 2019년 서형석 선수 4라운드 합계 11언더파였다. 다른 대회들의 우승자 성적에 견주면 블랙스톤이천은 선수들에게도 어려운 골프코스임을 알 수 있다.     



최근 대회들의 평균 기록으로 보면 정상권의 여자 선수들은 대략 10타(매 라운드 2~3타) 정도 더 치고, 남자 우승권 선수들도 5타(매 라운드 1~2타) 이상 더 친 것으로 나온다. 남자 대회 예선 통과 스코어가 4~5 오버파 정도였으니 평균 성적의 선수들에게도 꽤 어려운 코스다.  

일반 골퍼들이 느끼는 난도는 훨씬 더 높다. 이 골프장은 코스 난이도를 객관 수치로 표시하는 ‘코스레이팅/슬로프레이팅’ 자료를 제공하고 있지 않은데 골프장 관계자는 “처음 오시는 분은 10타 이상 더 치십니다.”라고 말했다.     


블랙스톤제주에 이은 마스터피스

‘블랙스톤이천 골프클럽(이하 ‘블랙스톤이천’)’은 ‘블랙스톤제주’와 함께 브라이언 코스텔로(Brian E. Costello)가 빚어낸 그의 ‘인생 작품(Masterpiece)’이다. 2005년 제주도 한림 곶자왈 야생 숲에 ‘블랙스톤제주’가 들어섰고 2010년에 ‘블랙스톤이천’이 문을 열었다. 미국 골프코스 설계가 협회(ASGCA, American Society of Golf Course Architects)에 등록한 주요 실적 목록에도 그는 블랙스톤 연작을 자신의 대표적 설계 작품으로 앞세우고 있다.      



2009년 봄에 블랙스톤제주에서 라운드하고 코스의 신비로움에 매혹되었던 나는, 그 이듬해 이천에도 브라이언 코스텔로 설계 코스가 문 연다기에 큰 기대를 했다.

이천과 붙은 여주의 외가에서 나는 유년의 한 시절을 지냈다. 넓은 평야에 낮은 구릉이 완만한 곡선으로 드문드문 이어지고 논밭 사이로 흐르는 실개천이 저수지에 머물다 남한강의 게으른 물결로 흘러나가는 풍광이 내가 그리는 이천, 여주 땅의 모습이다.

그러나 2012년 가을에 블랙스톤이천에서 처음 라운드 하면서, 나는 내 유년의 추억이 부서져 나가는 듯한 당혹감 느꼈다. 평화로운 서정의 산들길 산책의 아니라 도산검림(刀山劍林)의 전장을 헤쳐 나가듯 플레이했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이천 땅, 드라마틱 코스

블랙스톤이천이 위치한 곳은 소박한 구릉(정상 190미터)의 해발 90미터에서 140미터에 이르는 기슭이다. 바로 가까이에 솔모로CC와 자유CC, 트리니티클럽, 아리지CC가 있다. 이들 골프장들이 자리 잡은 산마루들보다 블랙스톤 이천이 들어선 터는 결코 높거나 험하지 않다. 오히려 더 넓은 들판에 접하고 있으며 코스와 맞닿은 평야의 해발고도가 85미터쯤이니 이 골프장 터는 정겨운 동네 뒷산 모양이다.

그런데 블랙스톤이천 골프코스는 주변의 어느 골프장들보다 역동적인 길들을 드라마틱한 변화로 펼쳐낸다.      


브라이언 코스텔로는 “블랙스톤 이천에서 ‘현대의 고전(Modern CLassic)'을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평화로운 이천 작은 마을의 뒷동산에서 그가 빚어낸 ’클래식‘이란 무엇일까.

 

브라이언 코스텔로의 설계 스타일

브라이언 코스텔로는 우리나라에 4개의 코스(블랙스톤제주, 블랙스톤이천, 여주의 360도CC, 경남 사천의 타니CC)를 설계했다. 이들 모두가 독특한 모습으로 화제가 된 ‘문제작’들인데도, 그에 대한 코스 설계자로서 정보는 국내에 별로 소개되지 않았다.      



브라이언 코스텔로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JMP 골프 디자인그룹’의 대표 설계가다. JMP는 1985년 이래 미국 캘리포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 활동해왔으며, 중국에 22개 코스, 일본에 15개 코스, 인도네시아에 7개의 코스를 설계하는 등 아시아 지역에서도 주목할 만한 실적을 남겨왔다.

미국 메릴랜드의 위스키크릭(Whiskey Creek Golf Club, 어니엘스와 협업), 노스캐롤라이나의 헤리티지클럽(The Heritage Club)을 비롯해서, 브라질의 파젠다(Fazenda da Grama Golf Club), 일본 가고시마의 골든 팜 컨트리클럽, 중국 하이난의 블루베이(Jian Lake Blue Bay Golf Club, LPGA 블루베이 대회 개최 코스) 등 유명 골프코스들을 설계했다. 실적 코스들 가운데는 주요 평가 기관으로부터 높은 랭킹으로 선정되었거나 프로골프 토너먼트를 개최한 곳이 많다.  


브라이언 코스텔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Landscape Architecture)을 공부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조경 전문회사(Hargreaves Associates)에서 경력을 쌓고 1989년 JMP에 합류하여 1994년에 대표가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매우 도전적이며 다양한 변화를 담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는 10살 때부터 아버지와 게임으로 경쟁하면서 골프를 익혔다는데, 그가 설계한 코스에서는 매 홀마다 게임 승부를 부르는 요소들이 뚜렷이 보인다. 이 요소들이 거의 모두 자연 그대로의 형태를 소재로, 독특한 자연 미감(美感)으로 등장하는 것도 예술적 특징이다.      


그가 설계한 코스들은 평지에 만든 것도 매우 다이내믹한 도전성을 띠는데, 블랙스톤 코스를 만든 이천의 구릉에서 그는 마치 땅 속에 잠자던 용을 깨워내듯 꿈틀대는 길을 찾아냈다.     


북코스 4번 파4 홀


수비와 공격을 함께 품은 코스

블랙스톤 이천 코스의 난도가 높은 것은. 무엇보다도 코스가 수비와 공격을 함께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코스의 길은 교향곡처럼 장려하지만 플레이를 시작하면 골퍼의 공격을 방어함을 넘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골퍼에게 도전해 오는 느낌을 준다. 목표점 없이 보면 아름다운 자연풍광이지만 플레이어가 공략을 시작하면, 이른바 ‘도전적인 코스’로서의 ‘도전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도전적이라 평가되는 골프장에서 이런 느낌을 가끔 만나는 데 견주어 이 코스에서는 자주(거의 홀마다) 마주치게 된다.  


이런 성격은 이곳과 비슷한 지형에 기댄 여타 코스들과 사뭇 다르다. 위성사진을 보면, 이 코스는 부근 골프장들과는 뚜렷이 다르게 자연 지형을 거의 보존하면서 길을 냈음이 선명히 드러난다. 근처 골프장들은 여주·이천의 완만한 능선을 펴고 다듬어 ‘평화로운 모험’의 스토리를 빚어낸 것이 많은데, 이 코스는 이곳 지형의 근본 흐름을 찾아내서 더 역동적으로 강화하고, 자연 생명력이 골프 게임에 강렬하게 참여하도록 했다.      


북코스 2번 홀 그린


생명체와 싸우고 교감하다

설계자는 낮은 동산 전체의 뼈대와 근육, 실핏줄 등을 짚으면서, 그 흐름과 결을 다듬고 강조해서 코스를 냈다. 바람 길의 모양을 땅의 굴곡과 거친 벙커에 새겨 넣고, 물을 흘려 풀과 나무로 새로운 생명 흐름을 깨웠다,

코스가 플레이어에게 도전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그런 ‘생명감’ 때문일 것이다. 골퍼는, 그 흐름 속을 모험하며 생명체와 싸우고 교감하는 것이다.

“조심스럽고 철저한 반복 답사를 통해 이곳의 '터' 와 조화를 이루어온 나무와 바위 그리고 숨겨진 드라마틱 라인들을 발굴하고 다듬어 완성했다”고 설계자는 말한다.    

  

이렇게 쓰니 마치 창조주의 작업을 닮은 듯하지만 설계 예술가의 일은 당연히 이런 것이다. 여주·이천 땅의 서정을 사랑하는 내 눈에, 이 설계자의 작품은 이채롭고 통렬해 보인다. 골프코스 설계가들은 “코스 설계는 코스를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찾아내는 것”이라는 말을 흔히 하지만 우리나라 산중지형에서 ‘자연적인 코스를 찾아낸’ 코스를 만나기는 매우 어렵다. 이 코스는 그 드문 사례의 하나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코스의 각 홀들은 독립적으로 다른 공간 세계에 있으며 저마다 다른 성격이다. 골프가 태어난 스코틀랜드 링크스 코스에서 북해의 변덕스러운 바람이 맡는 공격성을, 이천의 숲에 자연 지형으로 홀마다 빚어놓은 도전성이 대신한다.        


북코스 8번 홀 그린 주변


“Thinking Golf!”

이 코스는 티샷, 어프로치 샷, 그린 플레이 등 각 부분에서 플레이어에게 여러 과제를 낸다.

티샷 낙하지점에는 장타자들의 강력한 샷을 무력화하는 장해가 숨어있고 그린을 향하는 샷에는 플레이어의 샷 기술과 전략적 사고력을 시험하는 그린콤플렉스 조형이 기다리고 있다. 그린 주변 숏게임 공간은 변화가 많은 조형으로 수많은 플레이 상황을 빚어내 창조적인 어프로치를 집요하게 주문한다. 그린 위에 공을 올려놓았다 해도 상상력과 집중력을 잃지 않아야 홀에 이를 수 있다.

우리나라 유명 골프코스 설계가와 이 코스에서 라운드 했는데, 남이 설계한 코스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지 않는 그가 플레이 중에 무심코 말했다.


“티샷, 세컨샷, 어프로치, 퍼팅에서 모두...... 깜빡 졸면 잡아먹혀!”        


그래서인지 이 코스를 좋아하는 사람과 꺼리는 사람은 극명히 갈린다. “좋은 점수가 나오는 곳이 좋은 코스”라고 생각하는 골퍼는 다시 방문하기 두려울 수도 있다. 상급자에게도 까다롭지만 초급자에게 가혹한 코스라는 이야기도 듣는다. “욕심 안내고 보기(Bogey)만 하기도 어려운 홀들이 많다”는 초·중급자들의 볼멘 후일담도 들린다.

‘발렌타인챔피언십’ 대회에서 현장 진행을 맡았던 책임자에게 유러피언투어 선수들은 이 코스에 대해 어떻게 말하더냐고 물으니, “사려 깊게 쳐야 하는 익사이팅한 코스”라는 평이 많더라고 답했다.     


브라이언 코스텔로는 이러한 전략적 특성을 완곡하게 말한다.

“모든 수준의 골퍼들이 플레이를 즐길 수 있도록 수백 년 전통의 골프 전략과 철학을 바탕으로 조성했습니다. 전략적인 코스 디자인이 플레이 할 때 발생하는 여러 가지 상황과 선택의 갈림길, 기회 등을 경험하게 하므로 'Thinking Golfer'들의 플레이를 더 빛나게 합니다.”     


북코스 8번 파4 홀


코스 이야기와 인상적 홀들     


블랙스톤이천은 43만여 평(1,433,527m2)의 땅에 18홀의 회원제 코스와 9홀의 대중제(퍼블릭) 코스로 구성되었다. 파72, 7,314야드의 토너먼트 규격을 갖춘 북·서코스가 회원제로 운영되며 이곳에서 매년 프로골프 정규 대회가 열린다. 퍼블릭코스인 동코스도 3,608야드의 9홀 파36 규모이며 회원제 코스와 같은 수준으로 조성·관리된다.   

북-서-동의 순서로 진행하며, 토너먼트에서는 북(아웃) -서(인) 구성으로 플레이한다.     



북코스 이야기


북코스는 계곡으로 빨려드는 듯한 1번 파5 홀로 시작하는 ‘숲의 모험’이다. 라운드를 시작할 때 나는, 이 부근 숲에서 승냥이와 범이 나온다던 외할머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구릉과 계곡을 넘나들며 호수와 폭포를 돌아가고 넓은 평원을 조망하다가 고지에 오르기도 한다. 서구적인 영웅담 모험 동화에서 소년이 역경과 모험을 거쳐 영웅으로 일깨워지는 스토리의 전반부 ‘수련기’를 담은 듯하다.     


블랙스톤 코스 특성의 쇼케이스 - 1번 파5

북코스 1번 파5 홀

1번 파5 홀(블랙티 535m, 레귤러티 491m, 레드티387m)은 신비로운 숲으로 모험을 떠나는 영웅 신화의 서막 같다. 왼쪽으로 길게 휘어지며 숲으로 빨려드는 듯 수려하지만, 플레이어가 선택하는 전략에 따라 다양한 상황을 만나게 된다. 러프와 벙커를 전략적으로 잘 읽고 페어웨이의 미묘한 비틀림과 언듈레이션을 파악하며 플레이해야 한다. 오르막 언덕 위에 놓인 그린의 굴곡이 크기에 핀의 위치에 따라 어프로치 방법이 크게 달라진다.

1번 홀 어프로치 지점

블랙스톤이천의 전략적 특성을 쇼케이스처럼 두루 보여주며 시작하는 홀이다. 이 코스의 파5 홀들에서는 자신의 샷 능력을 벗어나는 선택은 큰 어려움으로 연결되기 쉽다. 핀 위치를 확인해서 역순으로 한 샷 한 샷의 전략을 정하고 플레이해야 한다.     


아름다운 호수와 폭포의 초승달 홀 - 4번 파4 홀        

북코스 4번 파4 홀

4번 파4홀(블랙티 390m, 레귤러티 356m, 레드티265m)은 높은 티잉 구역에서 탁 트인 평야와 먼 산들의 겹겹능선을 마주한다. 내려다보면 초승달 모양의 페어웨이가 호수를 감싸 돌고 있다. 호수에는 폭포가 흘러내린다. 전설 속의 공간으로 문득 접어 들어온 것 같은 홀이다.

4번 홀 그린(가운데 협곡 같은 굴곡)

휘어진 페어웨이의 어느 위치에 티샷 볼을 떨어뜨릴지를 정확하게 선택해야 한다. 호수 너머 가로 형 그린은 한가운데가 협곡처럼 움푹하기에, 핀 위치에 따라 어프로치 난이도가 크게 달라진다. 그린에 볼을 올렸다 해도 핀이 협곡 너머에 있다면 퍼팅 상상력을 극한까지 발휘해야 한다. 티샷, 어프로치샷, 퍼팅의 기술적 정밀성과 전략적 사고력을 골고루 시험한다. 북코스의 시그니처 홀이라 하겠다.

8번 파4 홀도 이와 비슷한 모양을 띤다. 인상적인 홀들이라 닮은 홀도 새롭다.      


똑바른 홀 생명체적 미학 - 진정한 “3-Shot

북코스 5번 파5 홀

5번 오르막 파5 홀(블랙티 490m, 레귤러티 442m, 레드티377m)은 티잉 구역에서 홀 전체가 똑바로 바라보이지만 곳곳에 역동적인 변화가 있다. 플레이어를 마주보는(페이스드) 벙커는 샷 길목 정면을 가로막고, 깊은 러프는 페어웨이와 선명한 경계를 이루며 물결치듯 들락거린다. 패스큐 러프와 억새밭이 이루는 조화가 강렬하다. 그린으로 갈수록 풍성해지는 언듈레이션은 미스샷을 걸러낸다. 이 코스의 생명체적 느낌을 (똑바른 길에서) 날것으로 맛보는 홀이다. 블랙스톤에서는 이 홀을 “진정한 3-Shot홀”이라 내세운다.

     

5번 홀 페어웨이 옆 억새밭
5번 홀 러프

7, 8, 9번 홀의 흐름도 게임 승부의 변수를 다양하게 만들어낸다. 9번 홀 그린 뒤의 폭포를 감상할 겨를이 있다면 행복한 플레이를 한 것이다.          

  

서코스 이야기


서코스는 숲을 헤치고 커다란 호수를 건너 높은 성에 이르는 영웅 신화의 완결 서사를 담은 듯하다. 길고 웅장한 느낌의 홀들이 지중해 같은 호수를 돌아가는 구간은 압도적으로 장엄하다. 이천의 산과 평야를 비현실 세계의 신화적 공간으로 빚어낸 작품이라 생각한다. 기승전결 스토리 전개의 ‘서사성’, 마음을 흔드는 풍광의 ‘서정성’, 골퍼의 힘과 기술 및 전략 능력을 시험하는 ‘기능성’ 들을 드라마틱하게 갖추고 있다.     


짧은 홀들의 보이지 않는 모험

서코스 2번 파4 홀

서코스 2번 파4 홀(블랙티 377m, 레귤러티 334m, 레드티 189m)은 계곡 맞은편에 빽빽하게 군집한 벙커들 너머의 보이지 않는 언덕으로 티샷한다. 계곡을 왼쪽으로 넘길수록 그린에 가까워지는 ‘좌 도그렉’ 형으로, 모험에 따른 보상과 실수에 대한 응징이 선명하다.

서코스 5번 파4 홀

5번 파4 홀(블랙티 326m, 레귤러티, 287m, 레드티 235m)도 벙커 너머 보이지 않는 곳으로 티샷한다. 가장 짧은 직선형 홀이지만 티샷 낙하지점을 잘 선택해야 (뒤쪽으로 흐르는) 그린을 공략하기 쉬워진다. 다소 편한 홀에서는, 페어웨이를 조금만 벗어나면 가파른 경사의 러프에서 어드레스 하게 된다.            


서코스 3, 4, 5, 6...,,, 블랙스톤이천의 아멘코너

서코스 3번 파4 홀

3번 파4 홀은 높은 데서 좁아 보이는 페어웨이로 티샷하는 부담이 있고, 4번 홀은 가장 긴 파3 홀(블랙티 226m, 레귤러티 182m, 레드티 126m)이다.

서코스 4번 파3 홀

커다란 호수 너머에 반도형 그린이 있으며, 핀이 그린 오른쪽에 꽂히면 자비가 없다. 남자 프로 대회에서는 도전적인 페이드샷을 볼 수 있으나, 여자 선수들은 어려워하는 홀이다. 위에 설명한 5번 홀에서 다소 숨을 고른 뒤에 이르는 6번 파5 홀이 이 코스의 클라이맥스다.     


6번 파5 - 지중해 넘어 대회전의 장

서코스 6번 파5 홀

신화 속의 영웅들이 지중해 너머 전장으로 나서는 듯 장엄한 파5 홀이다. 566미터(레귤러티 528m, 레드티 425m)로 긴 편인데 그린이 큰 호수 너머에 있기에 실제 거리보다 훨씬 길게 느껴진다. 티샷, 세컨샷, 어프로치샷이 세 번 모두 정타로 맞춰야 호수를 넘겨 파를 기록할 수 있다. 글 들머리에서 유러피언투어 선수들이 우드 티샷을 많이 했다고 적었던 그 홀이다. 단 한 번의 실수라도 한다면 보기를 해도 만족해야 한다.

6번 홀 그린

샷밸류와 난도, 심미성, 기억성 등 모든 면에서 두드러지며, 블랙스톤이천을 다시 찾게 하는 시그니처 홀이다.      

9번 파5 - 전략적 승부

서코스 9번 파5 홀(장타자는 오른쪽 숲을 넘긴다)

7번 파3 홀과 ,8번 파4 홀은 2단 그린의 굴곡이 승부를 가른다. 9번 홀은 토너먼트에서 18번 홀이 된다. 높은 언덕에서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페어웨이로 티샷하는 도그렉 형 홀인데 장타자들은 티샷에서 “보이는 곳까지 칠 것인가, 오른쪽 숲을 넘길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남자 프로 대회에서는 (특히 대회 최종일에)숲을 넘겨 투온(On in two)하는 선수들이 많고, 여자 대회에서는 대개 쓰리온 전략으로 플레이 한다. 전략적 선택에 따라 승부가 뒤바뀔 수도 있는 마지막 홀이다.           


동코스 이야기


동코스는 북·서코스보다 다소 짧지만 주변의 다른 골프장들에 견주어 결코 짧지 않고(3,608야드) 도전적이다. 호수와 공격적인 벙커, 극적인 언듈레이션 등 전략적 조형 요소들을 풍부하게 배치하여 게임의 흥미를 높였다.

동코스 1번 파5 홀

플레이어의 실력에 맞는 티잉 구역을 선택하면 14개의 클럽을 사용하면서 다양한 기술샷을 모두 시험할 수 있다. 북·서코스에 견주어 시야가 다소 좁고 오르내리막이 많은 느낌이 들지만 전략성이 뛰어나며, 매우 극적인 재미를 주는 게임 코스다.    

 

재미있는 반전의 마지막 승부’ - 9번 파5

동코스 1번 파5 홀

9번 파5 홀은 마지막 홀의 게임 재미를 한껏 끌어올려 조성했다. 전체적인 오르막 지형에서 오른쪽 도그렉 모양으로 꺾였다가 다시 왼쪽으로 살짝 비틀어서 그린은 오른쪽 대각선으로 놓인 삼중 비틀림 홀이다. 장타자들은 티샷할 때 페어웨이 오른쪽 언덕의 위협적인 3개의 벙커들을 넘기려 할 것이며(거의 벙커에 빠지기 쉽다), 전략적으로 왼쪽 페어웨이로 티샷하면 안전할 수 있지만 세컨샷에서 소나무들을 피해야 한다. 세컨샷 낙하지점과 그린 앞 벙커들도 변수가 된다. 아쉬움과 도전, 승부의 반전 등을 담아,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을 부르는 ‘마지막 승부’ 홀이다.       

   

관리와 시설     


늘 푸른 양잔디 - 토너먼트 코스 관리

이 골프장 페어웨이에는 켄터키블루그래스 양잔디를 심었다. 추운지방이 고향인 켄터키블루그래스가 고온다습해지는 우리나라의 내륙지방에서 잘 관리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많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 골프장 잔디 전문가들도 한여름 혹서기 대처 방법을 많이 모색한 듯하다. 이른 봄에서 늦가을까지 변함없이 푸른 잔디가 계절에 따라 변하는 숲의 색깔과 조응하며 빚어내는 풍광은 이국적이고 아름답다.      



페어웨이는 11mm~13mm 길이로 관리하여 공을 맞추는 타감이 좋다. 세미러프는 없으며 러프는 보통 때 40mm, 대회를 치를 때는 65mm로 기른다. 헤비러프는 보통 때 70mm, 대회 때 120mm까지 길러 변별력을 높인다.

그린스피드는 스팀프미터 계측 기준으로 보통 때 2.8미터, 대회 때는 3.4미터 까지 높인다. 그린의 언듈레이션이 워낙 크고 다양해서, 핀을 꽂을 위치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기에 그린 관리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가끔은 아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도 처음의 설계를 지키며 관리하고 있다.       


거친 러프와 고운 꽃밭

제주도의 블랙스톤 골프장에서는 팽나무와 때죽나무 등 제주의 바람을 견디고 자란 교목들의 생명력 강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이 코스에서는 거친 패스큐 러프와 억새 등이 그 느낌을 대신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처음 문 열 때는 안보이던 알록달록한 꽃들이 골프장 곳곳에 피고 있다. 제멋대로 자란 야생화들이 드문드문 피고 티잉 구역과 클럽하우스 주변에는 외래종 꽃들의 꽃밭 정원을 곱게 가꾸어 놓았다.

서구의 코스 설계자들은 철마다 꽃이 피는 꽃나무들은 코스에 심더라도 야생화 이외의 조경 초화류는 설계에 반영하지 않으려 한다. 아마도 이 정원 조경은 골프장 소유주의 취향 작품일 것이라 짐작한다. 골프장에서 사진을 남기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골퍼들을 위한 서비스이기도 할 것이다.      


클럽하우스

클럽하우스의 웅장한 캐노피와 작고 고풍스러운 목재 출입문은 이 골프장이 폐쇄적인 멤버십 클럽임을 드러낸다. 실내의 넓고 높은 로비 천정은 아치가 교차된 궁륭(vault)의 고딕양식인데, 위압적인 기둥들과 함께 권위를 강조하는 미장인 듯하다. (이용 후기를 보면) 이 육중한 분위기에 압도되거나 매료되는 이들이 많다.

클럽하우스 안에 미술관이 있어서 전시회가 쉬지 않고 이어진다. 클럽하우스의 고풍 지향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취향의 미술품들이 주로 전시되고 있어서 이채롭다.      


    

덧붙임 - 한국 자연을 해석하는 창조성     


나는 이 골프장을 그동안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몇 년 전에는 어느 여성 골퍼와 이곳에서 라운드 한 뒤 “레드티가 해저드 건너 놓인 데가 많다. 여자 대우를 해주는 건 좋은데 불합리하다.”는 헛소리까지 했었다. 이천의 평화로운 산들길을 낯설게 해석한 설계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다시 하나하나 짚어보니 그동안의 내 생각은 짧았다.


블랙스톤이천은 국내 골프랭킹 선정기관들의 평가에서 대략 10~20위권 대의 순위에 들고 있다. 여러 전문 패널들이 전문적인 평가 항목에서 객관적인 점수를 매기고 합산한 결과이겠으나, 이 코스의 장점은 평가 항목들에 모범답안 같은 답을 내는 코스들 너머에 있다. 한국 산중 자연의 생명력을 본질적으로 재발견해서 살려내고 강렬한 개성으로 표현해낸 창조성은 평가받지 못한(평가되지 않은) 것이라 본다.      

어쩌면, 한국 자연을 새롭게 해석하는 창조적 개성 같은 것은 한국의 골프코스를 평가하는 기준에 아직 포함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Breathing Inspiration”


블랙스톤 이천의 슬로건이다. 자연의 생명력과 싸우고 교감하면서, 영감 넘치는 골프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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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은 [한국의골프장이야기] 제3권 수록을 위한 소통용 초안입니다.

좀더 상세하게 보완한 뒤 책에 싣고자 합니다.

글로 적힌 생각과 표현들은 지은이의 고유한 저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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