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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Jan 12. 2021

'H에게', 또 다른 가해자 바로 '나'

가장 약한 곳으로 향한 폭력.

  이 편지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안녕이라는 말을 하기엔 너무 염치없고,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한 행동을 담기에 너무 작으니까. 그래서 이 편지를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무거운 마음으로 펜을 들었어. 용서를 구하진 않을 거야.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다만 조금이라도 상처가 치유되었으면 좋겠다.


 네가 태어났을 때가 생각나. 정말 작고 귀여운 생명체였지. 신기하게도 얼굴은 찐빵처럼 통통한데 몸은 뼈에 딱 살가죽만 붙어있었어. 처음으로 조심스럽게 널 안으면서 꼭 잘 돌봐주겠다고 다짐했지. 언니지만 엄마의 마음으로 돌봐주고 싶었어. 고작 열 살 밖에 안 된 꼬맹이였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다짐을 전혀 지키지 못했지. 엄마의 마음은커녕 좋은 언니조차 되어주지 못했어. 부모한테, 학교에서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너한테 풀었잖아. 솔직히 말하면 다 생각나지도 않아. 분명 무의식 속에는 기억이 있을 텐데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아주 깊은 곳에 묻어둔 거겠지. 생각나는 것들만이라도 적어볼게.(부디 네게 고통이 되지 않길 바라.)


 첫 폭력의 시작은 부모가 외출하고 집에 너와 단둘이 있을 때였어. 계속 우니까 짜증이 났나 봐. 순간 이성을 잃고 네 얼굴을 가슴팍에 꽉 끌어안고 숨 막히게 했지. 잔인하게도 마음에 강 같은 평화가 찾아왔어. 모기가 앵앵대는 것 같았던 울음소리를 작게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거든. 마음속 악마가 깨어나는 순간이었지. 어린 네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울까 생각은 하지 않았어. 오직 ‘나’만 있었지. 그 이후로 둘이 있을 때마다 종종 그랬어.


 네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서는 숨 막히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지. 화날 때마다 엉덩이를 새빨개지게 손바닥으로 때렸어. 목이 터져라 우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지. 부모의 학대, 학교폭력으로 생긴 분노를 엉뚱하게 너한테 표출했어. 내가 약자라서 받은 피해를 또 다른 약자인 너한테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었지. 누구보다 그 고통을 잘 알면서 그랬어. 마치 폭력이라는 언어밖에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시한폭탄 같은 머리를 해결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가장 쉬운 선택을 했어.


 심부름도 많이 시켰지. 고작 대여섯 살 밖에 안 된 아이한테 말이야. 말을 듣지 않으면 마구잡이로 때렸어. 널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했던 거 같아. 사람이 아니라 로봇처럼 대했어. 그 와중에 내가 얼마나 영악했냐면 사정없이 때리면서도 최대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부위를 골라가면서 때렸다는 거야. 제대로 울지도 못하게 했지. 울면 더 때릴 거라고 했잖아. 퉁퉁 부은 눈과 눈물자국을 감추기 위해 매번 찬물로 세수도 시켰어. 얼마나 길고 큰 고통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날 사랑해주더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참 많이 말해주었잖아. 번번이 그 사랑을 배신했는데도. 가족이라 그랬던 거겠지. 아마 너처럼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사람은 평생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폭력의 대물림은 끊임없이 지속됐어. 네가 지역아동센터에 다니게 돼서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이번엔 집착으로 괴롭혔지. 학교 끝나고 지역아동센터에 바로 가야 하는데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오라고 했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버리겠다고 온갖 협박을 일삼았지. 심지어 지역아동센터에 직접 찾아가기도 했어. 선생님들 앞에서는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너를 불러냈어. 소름 끼쳤을 거야. 나중에는 네가 집에 가기 무서워서 친구 집에 있었는데 문자메시지로 온갖 욕을 하며 가만 안 두겠다고 했어. 친구 집을 무작정 찾아다니기도 했지.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고 미쳐있었던 거 같아. 부모의 폭력성을 혐오하면서도 똑같은 사람이 되어갔어. 아니다. 사람이 아니고 괴물이었어.


 네 18년을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 아마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이 안 되겠지. 이 죗값은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거야. 여기에 적은 것 외에도 네게 폭력을 행사한 적이 무수히 많으니까. 네가 때때로 가위에 눌리고 악몽을 꾸는 거 나 때문인지도 몰라. 지금 꽤 건강하게 자란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그때의 상처가 있을 거야. 그게 널 오래 갉아먹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잘 먹고, 잘 자고 좋은 꿈만 꾸고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서 행복하길 바라. 행복을 누릴 자격 넘치게 있는 사람이잖아. 마법을 부려서 네 아픈 기억과 고통만 모두 사라지게 하고 싶다. 가증스럽겠지만 진심으로 그런 능력이 생겼으면 해. 그렇다면 더 바랄 게 없어. 기억은 잘못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만약에 네가 살다가 어느 순간 잊어버리게 돼도 절대 잊지 않을게. 약속해.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 무척 이기적인 고백이라 겁이 많이 나네. 하지만 꼭 하고 싶었어. 18년 동안 제대로 주지 못했던 사랑 지금이라도 주고 싶을 만큼 사랑해. 보호자의 나이 차이를 가지고 서도 보호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제야 이런 편지를 쓰게 된 것도…. 내 죄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게 많이 무서웠거든. 길고 긴 시간 기다려줘서 고마워.  


 평생 반성하며 살아갈게.


어느 겨울.



* 이 세상 모든 H들에게도 진심으로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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