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서이초 교사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단 그로 인해 파생된 교사에 대한 여러 찬양들을 보며 느낀 감정을 토대로 작성될 것임을 미리 밝힌다. 근데 왜 제목을 ‘서이초 교사 사건을 보며’라고 했냐고? 적당한 제목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어쨌든 서이초 교사 사건을 본 이후로 하게 된 생각들이기 때문에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요즘 많이 올라오는 교사에 대한 찬양이나 가슴 먹먹한 추모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걸 보기 위해 클릭하셨다면 지체할 것 없이 바로 나가주시면 된다. 물론 이십 대 중반이라는 어린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분에 대해서는 같은 청년으로서 가슴이 아플 따름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하지만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그게 아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올라오는 여러 콘텐츠들을 봤다. 생각보다 교사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분들이 참 많고도 많았다. 다들 하늘 같은 스승의 은혜를 찬양했고 교사는 위대하다고 했다. 솔직히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나도 훌륭한 학생은 아니었겠지만) 그렇게 좋은 선생님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그렇게 좋은 선생님을 만났나 싶어서 신기하기도 했다. 묘사하는 거 보면 천사가 따로 없다. 엄마 같고, 애정이 가득하고, 성실하고, 꿈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거의 무슨 유니콘 같다. 이런 사람은 일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다고 생각하는데 과거의 기억이 미화된 건지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매년 학생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지도하는 교사 분을 만나 지금 잘 성장했다는 분이 계셔서 놀라웠다. 일반화하는 건 아니다. 분명 좋은 선생님도 많이 계실 거다. 그렇지만 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이때다 싶은 것처럼 이런 콘텐츠들이 우수수 올라오길래 좀 웃겼다. 아니, 부러웠다는 말이 맞겠다. 요즘 학생 인권 조례에 대해 말이 많은데 한마디 보태자면 나는 제정되기 전에도 후에도 학교를 다닌 세대다. 학생 인권 조례가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권을 담고 있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이것 때문에 교사들이 제대로 교육을 할 수 없게 됐다는 건 경험상 개소리다. 학생 인권 조례가 제정되기 전에는 아니, 제정된 후에도 한동안은 학교에서 체벌이 가능했다는 거 많이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람을 때릴 수 있는 권력이 교사에게 부여되었던 시절이나 그 권력이 박탈되었을 시절이나 내가 만난 교사들은 학생들의 실질적인 삶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본인들 철밥통 지키기 바빴다. 저딴 건 왜 교사가 됐을까 싶은 인간도 있었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나를 구해주지도 않았고, 오히려 나를 싫어해 학생들과 함께 소외시키는데 동참하기도 했다. 교실에서 나를 폭행한 놈을 학폭위에 회부시키지도 않고 유야무야 넘어간 적도 있다. 학교에서 한 심리검사에서 자살 고위험군으로 나왔는데도 왜 그렇게 힘든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상담 한 번 받게 하고 끝냈다. 귀찮았던 거다. 체벌을 허용하고 교권이 올라가면 교사들이 교육에 적극적일 수 있을 거 같지만 전혀 아니다. 원래도 교육에 적극적이었던 교사한테는 희소식(?) 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들에게도 쥐어져야 하는 것은 체벌할 권리나 교권이 아니라 노동권이다. 같잖은 권위가 아니라 직업인으로서의 존중이 필요한 거다. 이번 일도 그 존중을 받지 못해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서비스직이기도 한데 일에 대한 매뉴얼과 대응 시스템이 미비했고 블랙컨슈머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이걸 그저 학생 인권 내팽개치고 교권만 올리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하니 갑갑할 따름이다. 체벌이 가능했던 시절에 만났던 교사들이 애들을 때렸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성적이 일정 기준 이상 안 나와서다. 사실상 출결을 제외하고는 성적 때문에 때리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것보다 애들 성적을 올려서 반 등수를 올리는 게 중요했던 거다. 1등이 중요하고 능력 만능 주의인 세상에서 교권이 올라간다 한들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할까. 1등은 학부모만 원하는 게 아니다. 학교도 그렇고 한국 사회 전반이 원한다. 전방위적으로 1등에 대한 압박이 있는 상황에서 교사의 지도 방향성은 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전인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렇듯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단순하게 해결될 문제 같았으면 사람이 죽지도 않았다.
나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뜯어고쳐야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전문가도 아니고 일개 시민이기 때문이다. 근데 분명한 건 있다. 인권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거다. 학생 인권 조지고 교권을 살린다? 그럼 또 악순환의 반복이다. 이번엔 피해 교사가 아니라 피해 학생이 생길 것이고 다시 학생 인권 보호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겠지. 애초에 학생 인권 조례가 왜 생겼는지부터 생각해 보라. 강력한 교권을 마구 휘두르며 학생들을 멍들게 하고 미성년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아서 생긴 것 아닌가. 부모님 세대에는 뺨도 맞고 더 심각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보면 업보이기도 한데 지금 교사들은 과거 교사들의 잘못으로 본인들이 벌 받는 것 같아 억울하기도 할 것 같다. 결론은 인권은 확장되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누구 죽이고 누구 살리는 방식으로는 오래 못 간다. 그런 건 언젠가 와르르 무너지게 되어 있다. 공존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게 현명할 것이라 사료된다.
어떤 틀을 정해놓고 글을 쓴 게 아니다 보니까 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 것 같다. 원래는 교사들에게 받은 상처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살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도 좋은 교사 덕분에 성장했던 사람보다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씁쓸하게 학창 시절을 마무리했던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이 시국에 찬물 끼얹는 행동일 수 있지만 여긴 내 공간이니까 그러고 싶었다.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사실 그들도 나도 좋은 교육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같다. 이 마음들이 모여 0.1cm만큼이라도 조금씩 나아진다면 소원이 없겠다. 모두가 안녕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