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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Apr 20. 2022

우리를 괴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비평문

  문학동네 출판 『프랑켄슈타인』은 이 구절로 시작한다.

 제가 청했습니까, 창조주여, 흙으로 나를 인간으로 빚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끌어올려달라고?-「실낙원」

 인간의 입장을 대변한듯한 아주 흥미로운 구절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이 구절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는 그 누구도 창조주에게 청하거나 애원하지 않았다. 선택권 없이 태어나 선택권 없이 죽는 존재들이다. 『프랑켄슈타인』 속 피조물도 마찬가지다.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빅토르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빅토르가 한 행위를 감히 창조라 일컫고 싶지도 않다.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빅토르는 그러지 않았다. 때문에 창조보다는 배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빅토르는 왜 이 배설에 가까운 행위를 하게 된 것일까.

 빅토르는 열일곱에 성홍열로 어머니를 잃었다. 연인인 엘리자베트도 잃을 뻔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잃을 뻔한 경험은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그의 무의식에는 아마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다는 강한 집착에 가까운 열망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따라가던 나는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지금은 불가능해도) 시간이 지나면 겉보기에는 죽음으로 부패된 육신에도 새 생명을 줄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P.66~67)

 이 대목만 봐도 그 기저에 깔린 생각들을 알 수 있다. 죽음으로 부패된 육신에 새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를 잃는 삶으로부터도 해방됨을 의미한다. 빅토르는 그런 삶으로부터의 해방이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신의 그런 열망이 뒤틀린 채 표현된 피조물이었다. 이상은 창대했으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본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하지만 빅토르는 비겁하게 회피하는 걸 택한다. 피조물을 다시 대면했을 때도 본인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피조물을 비난하는데 주력한다. 그리고 아직 다 만들어지지도 않은 여자 피조물의 품성을 제멋대로 재단한다. 방어기제로 일종의 투사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추측한다.

 이런 빅토르를 바라보는 피조물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름도 없어서 피조물 혹은 괴물이라 불리는 이 존재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마 죽고 싶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흉측하게 여겨지는 자신을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다 왜 자신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야 하나 싶었을 것이다. 그 분노는 공격성으로 발현되었고, 끝내 사람들을 해치고 말았다. (피조물의 서사를 따라가 봤을 때) 삶 본능이 충족되지 않아 죽음 본능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피조물에게는 생리적 욕구 외에 그 어떤 쾌락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조물이 마지막에 망설임 없이 죽음을 택하겠다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삶으로 자신이 이룩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다. 책에서는 로버트 월턴과의 마지막 대화 이후 피조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살인의 끝은 자살이라고 감히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확신한다. 피조물은 스스로를 죽였을 것이다. 드디어 본인에게 다가온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곧 이 타오르는 아픔도 끝날 것이다. 의기양양하게 장작더미에 올라, 고문하는 불길의 고통 속에서 희열을 느끼리라. 그 화염이 잦아들면 나의 재는 바람에 휩쓸려 바다로 날아가리라. 내 영혼은 평화로이 잠들 것이고, 행여 영혼이 생각을 한다 해도 설마 이렇지야 않겠지. 이만 안녕히.”(P.303)

 이 마지막 말에도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쳐있는 피조물의 심정도 알 수 있다. 사실 이건 철저히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빅토르와 피조물의 내면을 분석한 결과다. 다른 관점에서 빅토르와 피조물의 관계를 본다면 어떨까.      


 이번에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프랑켄슈타인』을 읽어보고자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빅토르는 부르주아, 피조물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가깝다. 빅토르와 피조물의 관계가 철저히 착취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빅토르는 피조물을 위해 피조물을 만든 게 아니다. 철저히 자신의 영광과 이득을 위해 만들었다.

 내가 최초로 돌파해 어두운 세상에 폭포수처럼 빛이 흘러들게 만들었기에. 새로운 종種이 생겨나 조물주이자 존재의 근원인 나를 축복하리라.(P.66)

 이것만 봐도 피조물을 만들고 난 후 빅토르 자신의 영광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막상 만들고 나서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 같지 않자 무참히 버린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서는 사람이 기계화되고, 필요하지 않으면 언제든 버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절규를 듣다 보면 자신은 그런 소모품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는 듯하다.

 빅토르가 피조물의 행복할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는 것도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렵기 때문이다. 무엇이 두려울까.

 이제 나는 또 다른 존재를 창조하려 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 성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짝보다 천배 더한 악의에 불타 살해와 불행 자체를 즐길지도 몰랐다.(P.224)
 후대가 나를 종족의 역병과 같은 존재로 저주할 거라는 생각에 온몸이 떨렸다. 일신의 평안을 구하는 대가로 전 인류의 생존을 주저 없이 팔아버린 이기적인 인간으로.(P.225)

 책 속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맞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것이다. 전 인류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존재를 절대 만들 수 없다는 인간으로서의 양심.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기서 말하는 전 인류가 정말 전 인류일까. 나는 아니라는데 한 표를 던진다. 빅토르 같은 지배 계급의 생존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만약에 피조물이 여자 피조물을 만나서 생식을 하게 되어 세력을 넓혀간다면, 빅토르 같은 지배 계급은 언젠가 도전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피조물이 본인은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고 해도 말이다.) 어쩌면 피지배 인류도 피조물의 편에 설지도 모른다. 빅토르 입장에서 그것이 전 인류가 망가지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다. 자신이 가진 계급과 사회적 지위로 지금까지 행복을 누려왔고, 그것이 정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이 믿어왔던 정의를 뒤집는 것보다는 피조물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게 쉬웠을 것이다.

 ‘악은 선을 알지만, 선은 악을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좀 바꿔보고 싶다. 어쩌면 선은 악을 알 필요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선은 그저 고결한 위치에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고결한 위치에 앉아서 악을 비난만 하면 된다. 악이 만약에 자신을 이해받기 위해 투쟁한다면 그 이유도 알 필요가 없다. 그냥 무조건 나쁜 거니까. 빅토르의 자세가 이와 많이 닮아있다. 이는 악을 더 거대한 악으로 만든다. 우리는 이걸 막기 위해 악을 더 깊이 탐구할 필요가 있다. 피지배 계급이 악이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배 계급이 억압과 착취를 일삼고 권리를 침해한다면 피지배 계급은 악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마지막으로 페미니즘 관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을 해석해보고자 한다. 『프랑켄슈타인』에는 여성들이 많이 나온다. 카롤린, 엘리자베트, 유스틴, 아가타, 사피. 그리고 이 책을 쓴 메리 셸리도 여성이다. 한데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역할을 하기보다는 헌신과 희생, 사랑의 이미지로만 소비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이것이 당시 시대상을 반영했다고 보았다. 여성들의 역할이 어떻게 제한되어 있는지 보여준 것이다. 또, 남성들에 의해 구해지고 사라져 갈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얼굴도 반영했다고 봤다. 이 작품에서 아가타를 제외하면 여성들은 전부 구해지거나 죽임 당하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조물의 흉측한 외모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피조물의 외모는 흉측하기도 하지만 불완전하기도 하다. 창조주에 의해서 완벽하게 창조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이런 존재가 한 명 나온다. 바로 하와다.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 인해 만들어진 부산물 같은 존재다. 메리 셸리는 당시 여성으로서 자신의 몸에 대해 느낀 부분을 피조물에 담아낸 것은 아닐까. 온전히 사랑받을 수 없고 남성들에 의해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몸에 대한 생각 말이다. 안타까운 건 메리 셸리가 살았던 1800년대와 지금의 현실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여성의 몸은 엘리자베트처럼 사랑스럽거나 피조물처럼 흉측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하나의 개성을 가진 몸으로서는 존재하지 못한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 틀을 깨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말이다. 슬프지만 『프랑켄슈타인』이 명작인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관점으로 분석해보았다.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고 싶다. 홀로 태어나는 괴물은 없다. 오직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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