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고문은 사람 피 말리게 합니다만
어릴 때부터 꿈과 희망을 가지라는 소리를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곤 했다. 당연히 이제 한창 자라날 새싹들은 희망과 꿈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성취를 위한 노력도 부단히 할 것이며 그에 대한 합당한 결과로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돈을 아무리 번다 해도 꿈과 희망의 범위는 슬프게도 협소해진다. 희망을 가지란 말이 아름다운 응원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희망 고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게 만드는 경우도 더러 볼 수 있다.
한창 임신을 계획하며 매달 기계처럼 호르몬을 계산하며 그놈의 확률을 따지는 사람에게는 희망 고문이 반가우면서 어쩐지 달갑지 않다. 이번엔 잘 될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봐, 조급해하지 마, 다음엔 잘 되겠지 등의 위로와 인사는 1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스스로 희망 고문을 포기할 순 없기에 그만큼 희망이란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와 동시에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다가온다.
스무 살 성인이 되어 술과 담배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재수를 해야 하는 수험생에게도 희망 고문은 어쩌면 쓸모없는 대사일지도 모른다. 다시 십 개월 넘게 봤던 거 또 보고 여전히 모의고사에 시달리며 한 끗 차이로 본인의 원하는 대학에 붙을지 말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는 10번 중 0.5번 정도만 효과적일 뿐일 수 있다. 그렇다고 옆에서 현실적인 조언 따위나 날리란 소리는 아니다.
기타 등등 좀처럼 남들처럼 잘 풀리지 않는 거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희망은 사치처럼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염없이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이 동아줄 일지 모른단 생각에 꽉 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괜스레 울컥하기도 한다. 얼마나 절박하면 희망이 본인의 몫이 아니란 생각을 하면서도 희망을 꿈꿀까 싶어서.
희망 고문을 조금 더 발전적으로 사용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 고문의 주인공이 되지 않고 나 스스로를 제삼자처럼 객관화시키는 연습이 필요하다. 너무 절박하지 않되 감정 이입 없이 긍정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면 우린 충분히 희망 고문 앞에서도 작아지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