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해욱 Feb 28. 2020

고통의 크기는 모두 같다. 내가 니 고통을 모를 뿐

우리는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보고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자주 한다. '그래 나는 네 고통을 알아.  알겠는데 해결책이 있어. 이렇게 해봐. ' 힐링과 성공을 말하는 수많은 자기 개발서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어쨌든 결국엔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더 높은 수준으로, 더 높은 만족으로 이끌어주는 방법으로 향하게 되니까.

 한데 보통은 이런 반응을 한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도 예외는 아니다. ' 머리로는 알겠는데 내 가슴이 용서할 수 없어. 나는 그렇게 못하겠어. 그래 니 말 맞아. 맞는데 화나. '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의 고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모두 알 수 없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각자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상처를 가지고 있음이다. 다른 부모를 가지고 있음이다. 다른 성별을 가지고 , 다른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모두 다르마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의 선조들이 가지고 왔던 두려움과 공포다.  그러니 이 글을 쓰는 나도, 사랑이 넘치는 사람도. 인간관계가 풍요롭고 돈이 많고 적은 사람들 모두 정확히 누군가의 고통의 정체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모두 같은 크기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늘 친구가 많아 보이고 그들과 너무 행복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가? 어쩌면 그 사람은 거절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이 끈질기게 붙잡으려는 마음으로 나올 수 있다. 상대방에게 서운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못하는 습관을 가질 수 있다. 한데 그렇기 때문에 관계가 파탄으로 치닫는 순간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먼저 강하게 상대를 내쳐버릴 수 있다.  혹은 누구와도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모두와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안으로 들어가면 속 깊은 고독으로 늘 외로워하는 사람도 있다. 막상 그리하여 진정한 깊은 관계를 형성할 때가 되면 그 밀려오는 중압감, 무의식적인 불편함이 그로 하여금 고통을 피하게 만든다. 그래서 도망치게 된다. 다양한 유형이 있지만 포인트는 모두 같다. 우리 모두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크기는 모두 비슷하다는 것. 우리 모두 두려움은 싫고 불편함은 싫다는 것. 그래서 고통을 피하는 패턴화 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  그러니 부자인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남 녀 노 소 누구나 같은 크기의 두려움, 같은 크기의 고통을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때 난 내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인 줄 알았다. 육이오 상이용사였던 (훈장 신청이 늦어서 보훈혜택도 못 받으신) 할아버지는 술을 먹고 가족들을 늘 때렸고. 할머니는 맞으면서 (병으로 일찍 죽은 큰 딸을 비롯해 ) 6남매를 어마어마한 노력으로 길러냈다. 그렇게 해서 흔히 남들이 말하는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로 아버지는 학원 원장이 되었고 집을 샀고 돈을 많이 벌었다. 한데 폭력적이었다. 신체적인 폭력 정신적인 폭력,  화가 나면 일단 손이 나가는 아버지는 나의 고통에 큰 몫을 했다. 동시에 당연히 내성적인 어머니는 시댁살이가 고되었다.  할머니는 힘든 세월을 이겨내느라 술과 뇌선이라는 진통제의 중독이었다. 그리고 늘 엄마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화가 나면 욕지거리를 천지사방에 해댔다.  엄마는 스스로의 문제도 해결할 겨를이 없었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기에 늘 우울증이었다. 겉으로 보이기엔 마당이 넓은 서양식 복층 집에 늘 맛있는 것을 먹고살았으니 모두가 우리 가족을 부러워했다. 다만 그 이면엔 늘 폭력이 가득했고 폭력은 대물림되고 대물림되어 마지막에 있는 나까지 오게 되었다. 그래서 난 감정의 쓰레기통인 줄 알았다. " 글만 봐도 매우 고통스럽지 않은가. 내 이야기다. 이 글에서도 곧바로 느껴지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고통은 또 어떠한가?

 물론 내 관점에서는 내가 제일 고통스러운 사람이었다. (한데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 각자의 삶으로 들어가 보면 이야기가 또 다르다. 난 아버지가 부족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았다. 한데 우연한 계기로 아버지의 고통에 관심을 가져보았다. 아버지는 법대를 가고 싶었지만 동생들을 키워내야 했다. 그래서 법대 대신 수학과를 선택했고 그 마저도 제대로 수업을 듣지 못했다. 밤에는 화학공장에 나가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던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할아버지가 행하는 폭력을 받아내느라 늘 긴장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더군다나 화학공장의 약품의 독성 때문에 아버지는 20대 때 대머리가 되셨다. 상상해보라. 20대 때 대머리가 된 잘생긴 남자의 고통을!!! (와우). 동시에 아버지는 스스로를 위해 돈을 쓴 것이 없었다. 무조건 가족, 가족 가족, 비록 감정적인 폭력이 일반적으로는 그를 나쁜 사람으로 보기 쉽게 만들지만 그는 늘 스트레스, 화에 시달려서 심장병을 달고 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을 저지르거나 , 금전적으로 가족을 등진적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양육비를 만들어냈고 (사업실패로 돈도, 사람도 모두 아버지를 떠났음에도)  그것으로 형과 나는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어머니는 본인의 사업을 할 수 있었다. 다른 가족 모두 마찬가지다.  어머니는 여성으로서 누군가의 딸로서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늘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사회에서 가정에서 요구하는 책무를 다했다. 할머니는 어떠했는가. 할아버지는 어떠했는가? 형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주로 했지만 모두가 마찬가지다. 각자의 삶으로 들어가면 모두의 고통의 크기는 모두 같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렇기에 우리는 곧잘 "그래 니 고통은 내가 알겠는데. 이렇게 해야 해."라고 말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내 고통은 결코 네가 알 수 없고 나도 니 고통을 절대 알 수 없다.  (오직 자신의 고통은 스스로만이 감싸 안아줄 수 있다. 영적 지도자 두룬발로는 스스로의 초의식, 곧 스스로를 높은 목적으로 이끌어주는 우리의 이상, 초의식으로 맞닿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처로 내려가서 상처 받은 자신을 감싸 안아야만 같이, 초의식으로 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서로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고통을 아무리 내세워도 남들은 결코 알아주지 않는다. 알아줄 수도 없는 부분이다. 이렇게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는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하는 방식으로는 공감을 자아내지 못하고 영향력을 끼치기도 힘든 것이다. 무턱대고 해결책만 제시한다 해도 스스로가 그 상처를 끌어안기 전에는 해결책이 '가슴으로' 공감되지 않는 것의 이유이며,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해도 그것이 '가슴으로' 이해받기가 힘든 이유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두룬발로가 이야기한 것처럼 상대방의 상처에 관심을 가질 때.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공포를 자아내는지, 우리는 그 냄새나마 맡을 수 있게 된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비록 네 고통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 관심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대략적인 느낌이나마 알게 된다. 그리고 나면 목소리가 달라지고 화법이 달라진다. 목소리에 진심이 담기는 것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 이것이 공감이고 , 그 공감은 관심 , 곧 사랑에서 시작된다.  이 사랑은 더 이상 '니 고통은 알겠는데 그건 그렇고 이 방법으로 가야 해.'라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 나는 네가 고통받고 있는 걸 알겠어. 네가 아픈걸 조금은 알겠어.  비록 나와는 다르지만 너 역시 나와 같은 크기로 고통받고 있다는 걸 알겠어. '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것이 공감을 자아냈을 때  마음이 열리게 되고  그래서 같이 더 높은 이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상처를 보듬는데 응원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상태에서 더 이상 서로의 다름이 강조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연결되고 또 서로에게 영감을 줄 수 있고, 서로에게 사랑을 줄 수 있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관심이고 , 사랑이다. 어떤 구조의 사회이던, 대립각을 세우고 분열을 하게 만드는 이념이던,  서로에 대한 관심,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 대한 관심, 그것의 근본이 되는 사랑이 나타났을 때 , 그 두꺼워만 보이던 벽은 무너지고 마침내 모두가 화합하게 된다.  아주 간단하다.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어주면 된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면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