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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나은 Aug 31. 2022

100명의 학부모를 만나며 깨달은 애정 총량의 법칙

나는 왜 굳이 그냥 엄마가 되려 하지 않는가


8년에 걸쳐 약 100명의 학부모들을 만났던 경험은

내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행운이다.


나는 대학에 갓 입학한 스무 살 때부터 첫 취업을 한 스물여덟에 이르기까지 약 8년 간 교육분야에서 일했다. 개인 과외, 학원 강사, 진로 강의, 교재 제작, 교회 선생님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아이들을 만났고 자연스럽게 학부모들과 접촉했다. 그 경력을 살려 지금도 청소년 분야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전보다는 빈도가 줄었지만 이따금 학부모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유아기에서 청소년기까지 다양한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통해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고, 나아가 나는 어떠한 부모가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약 8년간의 고민 끝에 나는 '애정 총량의 법칙'이라는 나만의 이론을 도출해냈다.

사실 이 이론은 내 맘대로 지어낸 것이지만 그 기원은 우리 엄마의 교육철학에 있다(참고로 나는 25년간 교육 잡지를 만들어온 엄마 손에 자랐다).


"부모가 할 일은 충분히 사랑해주는 거야. 충분히 사랑받은 아이들은 자연스레 부모 손을 떠나가지."


엄마가 늘상 하던 말이다.

약 100명의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만나며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 명제는 마치 '근의 공식'처럼 정확했다.


엄마의 철학에 경험을 덧붙여 만든 '애정 총량의 법칙'은 부모의 역할을 크게 두 개로 나누는데, 나는 이를 육아의 난제라고 부르고 싶다.




첫 번째 난제는 '아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누구나 타고난 '애정의 총량'이 있다. 여기서 '애정의 총량'이란 본인들이 '충분히 사랑받았다'라고 느끼는 기준점이다. 사실 이 총량을 채워주는 것부터가 부모의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한다. 아이들은 절대 "나는 사랑이 더 필요해요."라고 곧이곧대로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주로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방식으로 부모의 사랑을 갈구한다. 내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면 어린 시절 나는 '애정'을 갈구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아팠다. 내 의지로 그러기를 선택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던 것 같다. 아픈 것만큼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말이다. 조금 더 크고 난 다음에는 모진 말들을 쏟아냈고, 더 크고 난 다음에는 수능을 앞두고 돌연 공부를 놓아버렸다.


한 가지 무서운 점은 '충분한 애정'을 채우기 위한 아이들의 본능은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것이다. 경험상 제 때에 지불되지 않은 '애정'은 혹독한 이자를 붙여 돌아오는 것 같다. 유년기에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사춘기에 무차별적인 '애정 갈구 폭격'을 가하는 것이 그 예시다. 사춘기까지 이와 같은 본능을 억눌러온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 한 차례 홍역을 겪기도 하는데 최근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지며 '대춘기(대학생 때 오는 사춘기)'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두 번째 난제는 '자녀의 손을 놓아주는 것'이다.


'자녀의 손을 놓아주는 것'이란 자녀와 부모의 독립을 뜻한다. 자녀의 온전한 독립을 위하여서는 자녀도 부모도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흔히 "아이에게 부모는 곧 세상이다"라고 한다. 아이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5살 자녀를 둔 부모의 세상은 어떨까. 부모의 세상 또한 온통 자녀로 가득 차있지 않을까? 자녀의 독립은 이렇게 서로로 가득 차 있던 세상이 서서히 분리되어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녀의 독립은 곧 부모의 독립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성인이 되었음에도 '애정의 총량'을 채우지 못해 부모 곁을 떠나지 못하는 자녀들도 많지만, 부모가 자녀의 손을 놓지 못해 서로가 독립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자녀의 손을 놓아주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자녀의 홀로서기가 부모의 눈에는 너무나 위태롭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으로 키운 자녀를 쿨하게 떠나보내 주기에 인간은 너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번째 난제를 풀어가기 위해 부모는 자녀에게 강한 믿음을 보내주는 동시에 스스로도 누군가의 부모가 아닌 독립된 개체로 홀로 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두 가지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내 경우를 예로 들자면 엄마와 나는 거의 3년에 가까운 시간을 고군분투했으며 가족 상담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건강한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엄마 되기 프로젝트> 이야기하며 뜬금없이 육아에 대한  철학을 쏟아낸 이유는 '엄마가 되기  스스로를 위한 충분한 준비 시간을 가져야겠다'라고 결심한 밑바탕에는 바로 오늘의 주제 '애정 총량의 법칙'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시기에 지불되지 않은 '애정'은 반드시 언젠가 부모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리고 경험상 뒤늦게 지불하는 '애정'은 이자율이 꽤 높다. 늦으면 늦을수록 더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적절한 때에 충분한 '애정을 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동시에 나는 언제든 아이가 떠나가고 싶을 때 뒤돌아 보지 않고 떠나보낼 수 있는 '준비된 엄마'가 되고 싶다. 자녀에게 애정을 쏟아붓는 것에 몰두하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 자녀의 독립이 두려워지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코로나로 인해 지난 2주간 <엄마 되기 프로젝트>는 내 일상에서 완전히 지워졌었다. 살아 숨쉬기 바쁠 정도로 고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자연스럽게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내가 계획했던 모든 것들에 "굳이..?"라는 물음표가 붙기 시작했다.


침대에 멍하니 누워 "그냥 되는 대로 살아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 탐색하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육아에 대한 나만의 철학이 이 프로젝트의 기저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막연히 생각으로 떠돌던 것들을 글로 옮기고 나니 이제 좀 움직일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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