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를 읽어야 하는데, 니체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탁상공론처럼 느껴진다는 것, 그러니까 현실과 너무 멀게 느껴진다는 것이고,
둘째는 니체가 대부분의 시간을 머물렀던 개인적인, 낡고 오래된, 깊고 고독한 동굴에서는 볼 수 없는 실제 리얼월드의 복잡계적인 현상, 선진화된 문명이 공통적으로 겪는 현상, 게임이론적 딜레마들, 그리고 개개인의 선호와 위임이 만들어내는 집단적인 방향성은 니체를 다 읽더라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데 니체가 전부가 아닌 것이다.
니체를 읽는 것은 물론 마음에 양식을 주고, 삶의 방향성을 재고해보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현실을 외면한 채 너무 오랫동안 이루어진다면 도움이 아니라 해악이 될 수도 있다. 현실을 잘 살아보려고 읽는 것인데 그 읽고 소화하는 과정을 얻는 대가가 현실을 외면하고 확보해야 하는 긴 시간이라면 그것은 아주 큰 사치가 되고, 더욱 중요하게 그렇게 괴리가 커지는 동안 '버스가 떠나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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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진 지인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 '힘들겠다'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성의없고 무관심한 것 같고, 내 일 아니니 태평하게 관전자가 되는 것 같고, 뭔가 도움을 주기 위해 '니체가 그랬어'라고 운을 떼기엔 니체 전도사같고(또 이런 식으로 권위에 기대어 말하는 게 싫기도 하고), '나라면 이렇게 하겠다, 그러니 너도 이렇게 하라'고 하기에는 그 사람이 그런 생각을 안해봤을까 싶기도 하고, 또 그 사람에게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싶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그 인생을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반드시 본인이 결정해야만 한다. 앞서 나열한 행동들은 모두 본인이 결정할 기회를 빼앗는 것들이다. [^9237]
[^9237]: _ 니체가 소용없다는 글을 쓰고있지만, 니체가 이야기한 것에서 힌트를 얻는다. [[니체, 쉬운 동정과 단단한 껍질 속 동정]] [^3608]
[^3608]: _ - 사실 니체의 글들은 실용적이고 소용이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그저 몇몇 사소한 부분들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진도를 나가고있는 챕터의 이야기가 특히나 구시대적이고, 현재 시대상과는 너무 다른 부분인데, 하필 이 타이밍에 현실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비추는 컨텐츠를 접해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말은 너무 쉽기 때문이다. 누구나 옆에서 이런저런 훈계질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짜 결정을 내리고 대가를 치루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은,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내빼기를 택한다.
[[실천이성과 실제 실행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살아있기를 거부한 사이퍼를 아무도 욕할 수 없다]]
이것이 니체가 말한 니힐리즘인가 싶기도 하다. 너무 오래 내적인 생각들에 둘러싸여있으면서, 너무나 많은 오돌토돌한 변수들을 고려하게 되면서 결국 완전히, 한 점의 마찰도 없이 만물을 벨 수 있는 칼은 없다는 걸 깨닫고, '그렇다면 확실한 것은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다다르는 것. 그 결론이 말해주는 건, 100%는 없단 것이다. -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목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다. 행동방침에 대한 갈증으로 이 글을 쓰고 책을 읽기 시작했던 본능이 소리친다.
## 2
구독자 1300만이 넘는 채널 쿠르트게작트에서 'South korea is over' 라는 영상이 올라왔다. 조회수는 900만이 다 되어간다. 나는 이 영상이 업로드된지 일주일 정도 된 시점에 접했다.
영상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한국은 망해가고 있다. 한국인은 멸종되고있다. 돌이킬 수 없다. 무슨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이 결말은 변하지 않는다. [^3783] 댓글에서도 이 영상의 특이점을 지적한다. '이 채널의 영상 중 유일하게 x됐어로 시작해서 x됐어로 끝나는 영상이네요.' - 주의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최악을 가정했다가 짠 하고 해소해주는 완화 기법을 쓴 게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이다. 댓글도 마찬가지다. 이미 다 알고있는 내용을 저마다의 스타일로 비관적으로 각색하고 있다. 그런 댓글을 읽는 건 쓴 맛이 나는 중독성을 갖는다. 내가 니체가 소용없다고 생각하게 된 포인트 중 하나는 이 지점이었다.
집단 역학, 대중적으로 기울어지는 결정들, 그리고 어쩌면 이런 결정에 보이지 않으면서 강력한 영향을 끼쳐왔을 수면 아래에서 진행된 광범위한 미디어 작업과 프로파간다. 이런 전방위적인 정신 해킹이 진행되는데, 한가롭게 니체의 초인 사상과 영원회귀만 볼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회학자가 말했듯, 나는 강물 속의 입자일 뿐이다. 입자는 방향도 바꾸고 또 물결을 거스를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 물결 자체를 바꿀수는 없다.
나는 아주 서서히, 1년에 1도씩 기울어지는 배에 타고있는 것이다. 그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지금이 앞으로 두 번 다시 없을 한국의 최대 절정기이기 때문이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 명의 사람이라면 지금 한국은 가장 혈기왕성한 청년기를 보내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 건 늙고 병드는 노년기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젊음은 영원할거라고 생각한다. 주름살이 생기고 몸이 하나 둘씩 고장나는 날이 오리라는 건 머리로, 이성으로 계산해보면 그렇다는 걸 이해할 수 있지만 결코 마음으로,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 무리해도 하루 자고 나면 너무나 쌩썡하고, 뭐든 하고싶고, 할 수 있는 열정이 있는 시기. 누가 이런 황금기를 살면서 녹슬어가는 황혼의 저물녁을 상상하겠는가. 그럴 에너지도 시간도 아까운 것이다.
[^3783]: _ 경고신호, 위험신호는 계속해서 있었다. 무시했을 뿐이고, 또 무시했을 뿐이다. 그렇게 작게 축적된 결과는 절대 피할 수 없는 배드엔딩이다.
현재에 대해, 미래에 대해 어떤 인식을 하고있던간에 어쨋든 그와 상관없이 미래였던 것이 현실로 변하며 현실은 닥쳐온다. 멸종한다는 것.
## 3
정말 멸종할 것인가에 대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쿠르트게작트의 영상은 뭐랄까 비트코인이나 주식 주가 예측같은 느낌이다. 당연히 그럴수밖에 없고 그러는 게 정석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토대로 앞날을 예측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2025년, ai가 공기처럼 당연해지고있는 시기에 30년 전에 나온 SF 소설을 읽는 느낌과 비슷하다. 인공지능을 아주 거대한 룰베이스 시스템으로 상상한 작가들,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인공지능을 상상해냈으면서 거기에 도달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림을 그리고 예술을 하는 능력은 장인급에 도달할 수 있다는 통찰은 해내지 못한 작가들, 또 그런 인공지능을 구동하는 데에는 정말 많은 전기가 들고 또 인공지능 고유의 할루시네이션이라는 결함이 있다는 것을 상상해내지 못한 작가들. 상상의 한계는 이런 것이다. 직접 부딪혀보면 더 주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드러나는 요소들까지 상상할수가 없다. 현실은 복잡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점을 최대한 고려해서 미래를 상상한다. 한국은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도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한국인이라는 정의가 조금은 바뀔 것이다.
옛날에는 이동수단으로 말을 사용했다. 사람의 다리만으로는, 그러니까 혼자만으로는 먼 거리를 가는게 힘이 많이 들고 느렸기 때문이다. 말의 힘을 빌리면 더 멀리, 더 덜힘들게 갈 수 있었다. 이 생물학적인 대안은 기술 발달에 따라 비생물적인 대안으로 바뀌었다. 바로 자동차이다.
나는 이 개념을 출산에도 적용하고싶다. 출산에 대한 컨텐츠를 보고, 거기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일관된 패턴이 보인다. 아이를 낳는 이유는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 어느 인생 순간에도 경험하지못한 기쁨을 느낀다는 것, 아이가 커서 내가 아플 때 수발들어주고 서포트해주는 든든함을 느낀다는 것,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다는 것 등등.. 이는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다.
말을 탈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말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말이 어떻게 느끼든 그런건 안중에 없었다. 자신이 더 멀리 갈 수 있는 방법으로서 말을 탄 것이다. 나는 이런 점이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말보다 더 멀리, 더 빨리, 더 안전하고 편하게 갈 수 있는 수단이 나온다면, 사람들은 더이상 말을 채택하지 않는다. 이건 당연하다.
자식의 소용 역시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고싶다. 자식보다 더 살뜰히, 완벽하게, 실망시키지 않고, 비행의 위험 없이 나를 기쁘게 해주고 챙겨줄 수 있는 대안이 나온다면, 사람들은 더이상 출산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가정에는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 등의 집안일들을 자동화해주는 솔루션들이 등장해왔다. 생활에서 자동화가 점유하는 비율을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보살핌이라는 영역도 결국은 비인간이 해내는 영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모두 생물학적 인간의 멸종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생물학적 인간이 멸종하면 끝인가? 문명을 주도하는 객체가 인공지능으로 바뀌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인공지능과 혼합된 형태의 제3의 인류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 디지털 세상에서 새로운 차원의 진보된 문명, 시뮬레이션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모두 꼭 출산이 필요하지 않다.
2060년에 은퇴할 나이가 되는 나는 그래서 다른 비관적인 댓글들처럼 너무나 미래가 비관적이라고 보이지만은 않는다. 나는 그 시대가 오면 모두의 예상을 깨고 누구나 더 편안하고 안온할 것이라 생각한다. 탈희소성 사회에 가까워질 것이라 믿는다.
## 4
대재앙 속에서도 생존자는 있다
빙하기가 와서 대부분의 인류가 멸종했을 때에도 생존자는 있었다.
지구상 최고의 포식자이자 지배자였던 공룡은 혜성 충돌로 순식간에 멸종한 반면, 기나 긴 동선을 그리며 깊은 심해에서 잠수하며 이동하던 작은 물고기들, 돌고래들은 살아남았다.
기울어진 배에 타고있다는 걸 강렬하게 직시했다고 해서 당장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사실 한국이 유달리 많이 기울어졌을 뿐이지, 다른 나라들도 다 기울어가고 있는 건 마찬가지이다. - 이 말은 이 문제가 모두의 문제라는 것이며, 다시말해 이 복잡계 속에서 누군가 적정한 해결책을 내놓는다면 그 파급 범위도 그만큼 광범위할 것이고, 그래서 전세가 역전되는 양상도 강렬할 것이라는 점이다.
어쨋든 나는 대재앙 속에서도 생존자는 있다는 말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하며, 그렇게 되는 게 최선이고, 그렇게 되는 게 바람직하다. 하지만 여기서 생존자라는 것은 최상위권을 뜻하지만은 않는다. 여기서 생존자라는 건 경쟁을 이겨내고 동족을 짓밟고 혼자만 살아남는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손길, 이를테면 빙하기, 혜성 충돌같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것까진 아닐지라도, 출산율 급감현상, 사상의 양극화같은 것들 속에서도 행복하고 평안한 사람들의 무리가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는 의미이다.
한국인들은 진작에 알았고, 온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제일 먼저 멸종하는 국가. 그 멸종하는 한복판에 있는 나.
할 수 있는 것은 연대인 것 같다. 최소한 저마다의 동굴에서 나와, 옆집 동굴이랑은 이웃이 되어 자주 보는 것. 그래서 같이 멸종하고있는 이 시대에 연결감이라도 느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