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우리를 살아있게 하지."
-트리니티, <매트릭스>
그런데 살아있다고 느끼는 게 안락함을 동반한다는 것은 아니다.
- 그런데 살아있다고 느끼는 게 편안함을 동반한다는 것은 아니다.
- 그런데 살아있다고 느끼는 게 쾌적함을 동반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안락함 대신에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 오히려 편안함 대신에 거슬림을 느끼게 한다.
- 오히려 쾌적함 대신에 춥고 괴로운 고독감을 느끼게 한다.
거의 아무도 사이퍼를 욕할 수 없다. 거의 누구라도 사이퍼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기억을 모두 지우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다시 안락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그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모든걸 다 바쳐서, 무슨짓이라도 해서 염원하는 것은 거의 누구라도 그렇게 바라마지 않았을 것이다.
말은 쉽다. 저 사람은 모범적이지 않다고, 올바르지 않다고, 이상적이지 않다고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데다 쾌락까지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정말 당사자가 자신이 된다면 그러지않을 수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오히려 이 물음에 자신조차도 인정하지못하기에, 내가 됐어도 면치못했을 그 상황을 자신은 피해갔기에 안도하는 마음에 더 그러는것일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은 그것을 이루기 어렵기에, 흔치 않아서 가치가 있다고 느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눈 앞에 주어진 반영구적인 비단과 쿠션으로 포장된 안락의 길, 당장 배불리 먹여주는 울타리, 달콤하고 편안한 사탕발린 말들을 기꺼이 포기할 사람은 정말 정말 극히 드물다.
기꺼이 포기하기는 커녕 기필코 붙잡기 위해, 점점 더 좁아지는 성문을 뚫는 소수의 '생존자'가 되기 위해 가장 값진 젊음의 시간을 365일이 들든, 730일,이 들든, 1095일이 들든 마다하지 않고 갈아넣는다.
그것을 모두 마다하고 나서 눈 앞에 펼쳐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 황야, 황무지, 살을 에는 추위, 모래바람, 굶주림, 고통, 괴로움, 절망, 어둠의 연속이며 언제 끝날지 알수도없는 끝없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 선택을 함부로 할 수 없다. 함부로 했다가는 고통스러운 대가를 아주 오래 치르게 된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딱 그만큼, 무언가를 외면하기에 행복할 수 있다.
행복한 사람에게 이런 말은 조심스럽게 할 필요가 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인지영역에서조차 물러나있던 그것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로 괜히 행복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어선 안된다. 그럴 권리가 내게는 없다.
실상은 그게 아니지만 대다수가 정의와 유사하게 취급되므로 실상은 별로 중요하지않은지도 모른다. 다수가 찾는 것을 정답으로 여기며, 다수가 인정해주는 것을 잘 사는 삶이라고 여긴다면.
삶은 무엇일까?
삶은 그저 몸의 생명유지 기능이 작동하는 한 되도록 편안하고 덜 고통스럽게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하는 어떤 것일까?
삶은 내가 죽더라도 영원히 기억될 무언가를 남겨둘 수 있도록 주어진 유한한 시간일까?
정신을 이루는 기초단위가 무엇인지에 따라 답은 달라질 것이다. '만점 답안'은 하나가 아니다.
나는 답이 하나가 아님을 알고있으면서도 왜 마치 하나의 답이 있다는듯이 답을 찾으려 하는가? 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가?
그렇게 결론을 도출해내는 순간과 그런 의문을 갖고 외롭게 어둠에 머무는 것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을 가질 틈도 없이 그저 주어진 일만 쳐내고, 돈만 벌 때 나는 그것이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느낀다. 돌고래가 바다를 헤엄치다가도 필수적으로 수면위에 올라와야 숨을 쉴 수 있듯이, 그리고 기왕이면 언제든 숨을 쉴 수 있는 수면 근처에 머무는 걸 좋아하듯이 나도 언제든 아무도 없는 대기질로 고래를 내밀 수 있는 이 야생의 영역 근처에 살기를 택했다.
다수의 의견을 따른다면 깊은 생각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다수의 위에 본능과 감정이 있고, 본능과 감정의 위에 유전자가 있고, 유전자 위에 장대한 진화의 시간이 있다.
나는 왜 그 장대한 진화의 시간으로부터 파생된 거대한 흐름에 녹아들지 못하고 튕겨져나와 홀로 무에서 유를 만들고자 하는가?
어쩌면 나도 사실 조종받고있는 것이다. 장대한 진화의 시간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또다른 소수 특이 케이스를 위해서.
이해관계, 이해득실을 고려해서 타인이 원하는 걸 준다. 심리모델을 연구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더욱 잘 주기 위함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주었으니, 받고자 기대하는 심리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받고 나면 목표는 충족되기에 대중은 그 이상의 아무런 행동, 특히 자신의 어떤 것을 소모하고 희생해서 해야하는 행동은 더더욱 하지않는다. -대조적으로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서 해온 것임에도.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것은 영원히 받지 못할지 모른다. 그냥 그것이 내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체념한지 오래이기에 그것은 이젠 더이상 떠올리고 건져올려봤자 정신공간만 차지할 뿐이다.
'살아있으니 만족해?' 라고 누군가 물을지 모른다.
내겐 이것이 숨을 쉬는 사람에게 '숨을 마음껏 쉴 수 있으니 만족해?'라는 말로 들린다.
타인의 정신구조의 이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경우의 수를 통합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기초 단위의 이해는 나를 더 덤덤하게 만들고, 폐활량을 늘려준다. 숨을 참고 더욱 깊숙이 잠수해서 원래부터 바다에 살던 이들과 오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