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홈 스위트 홈』리뷰와 에피소드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살 섞고, 애 낳고 함께 20년을 함께 산 남자는 침묵했다. 진심일까? 남자는 말하기 싫은 걸까? 차마 말 못하는 것과 불편해서 하기 싫은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비겁하다'라고 말한다. 남자는 계절이 지나도록 병실을 빙빙 돌면서 몇 분 이상 앉아 있지 못했다. 어쩌다 들렀을 땐 술에 젖은 상태였고 그마저도 잠깐이었다. 간호사와 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내게 의논했다.
의사의 입가가 움직이고 있다. "주변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게 도리 아니겠어요?"
어렴풋이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맞는 말이다.
"오늘 중으로 해결할게요." 내가 대답했었나? 아마도.
*
"말씀하시죠"
내 말에 남자는 고개를 수그렸다.
다시 한번 남자에게 말했다. "이제는 말씀해 주셔야죠."
남자는, 그런 말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잔인하다며. 울먹거렸다.
"네……그럼 내가 할게요.
참, 원무과에서 병원비 중간 정산해 달라던데요.
내 마음속에는 남자에 대한 분명한 적의가 들끓고 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왜, 아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동네병원에서 소화제 따위나 처방해 줬느냐고?
의사가 큰 병원 가보라 할 때 데리고 가봤어야 하지. 그게 맞지. 맞지?
터져 나오던 외침은 지루한 그의 뒤꼭지와 함께 잠겨버렸다.
*
병원 옥상은 환자들이 외부의 낙인을 피해 혹은 내부의 감시나 시선을 피해 숨어드는 공간이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그녀는 초점 잃은 눈길로 나를 올려다봤다. 눈길을 피하지도 호응하지도 못한 채, 난간 모퉁이에 끼어 우두커니 서 있는 나. 점점 더 모퉁이 속으로 끼어들어가고 싶은 욕구를 참는 중이다. 잘하면 내가 이 모퉁이 안으로 스며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담벼락의 서늘한 촉감과 부딪치고서야 깨닫는다. 나는 말할 준비가 덜 되었다. '너는 나의 눈빛에서 무얼 확인하고 싶은 거니?‘
"나 그만 집에 돌아가면 안 될까? 내가 집에 가면 식구들이 불편하려나?"
"아픈 사람이 그딴 걸 왜 걱정해?"
나는 그다음 말은 삼켜야 했다.
’다른 사람들 배려하지 말고 당당히 말해.
아프면 아프다고, 그리고 병실이 아닌 집에서 죽을 거라고.‘
오후의 늙은 햇살이 마지막 숨을 할딱대며 버텨내고 있었지만, 점점 사위가 칙칙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꺼져가는 햇살이 쥐어짜 보는 한 소끔의 빛마저 짙은 구름이 훑어내 버렸다. 곧 비가 떨어질 것처럼 어둑해지는 하늘은 병색 짙은 환자의 낯짝 같았다. 비가 오려나? 거짓말처럼 한낮의 더위를 잊은 듯 소슬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암 병동에서 화학 치료를 받는 여자 환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소곤대다가 옷깃을 여몄다.
나는 선택하고 싶었다. 나의 미래를. 나의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는 생각이 아닌 살아 있다는 감각에 충실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치료는 그런 것이었다.
……
비 오는 날 여기에 앉아 부추전을 만들어 먹었어. 텃밭을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이 텃밭에서 부추를 가위로 잘라와서.
어진이 물었다. 언제?
나는 대답했다. 미래의 어느 여름날.
……
좋다. 부추전 말고 또 뭐가 있어? 무언가를 먹은 기억.
콩국수. 채 썬 오이랑 당근 얹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는 김치볶음밥. 계란 지단 얹어서.
잠시 그림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는 이 집에서 죽어.
그 순간, 내 주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미래와 희망을 느꼈다.
그럼 나는?
어진이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나와 같이 여기서 살지.
이 집은 어디에 있어?
완치하리라는 희망보다 훨씬 단단한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이제 우리가 찾아낼 거야.
(최진영, 『홈 스위트 홈』 2023 제46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작품집, 문학사상, 2023년 2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다 낫고서', '다음에', 그런 건 말도 안 돼'라며 고유한 삶의 루틴에 급 브레이크를 건다. 보호자의 조급은 환자도 한 사람의 인격체라는 배려를 눈감게 한다. 그런 말들은 사실상 환자에게 '나는 아픈 사람이야'라는 자각을 일깨워 주고, '병이 다 낫기 전에는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고 미래도 올 스톱이야'라는 좌절감을 안겨준다.
아픈 사람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병실 밖 누구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환자의 가까운 미래를 저축하려 든다. 만약 그가 회복 불가능이라면?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생의 중요한 부분을 흐지부지 실험실의 모르모트처럼 소비시키게 된다. 이 지구에 아무런 감정 없이 소모되는 비인간적 처우라 할 것이다. 여타의 다른 사람들처럼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수많은 현실을 갈아 넣으며 살아왔지만, 그건 어느 정도 선택의 문제였다.
『홈 스위트 홈』에서 주인공의 엄마와 남자친구 역시 처음에는 "네가 할 일은 건강을 되찾는 거야."라는 말로 건강을 어딘가 맡겨둔 것처럼 여느 보호자의 반응과 다를 바 없었다. 결말 부분에 이르러 엄마는 그녀의 영혼을 만나면 반가울 거라는 말로 사랑하는 딸의 죽음과 작별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그래야지 하는 태도가 아니라 진짜 마음의 변화로 느껴진다.
질병이라는 무서운 명제를 들이대면 병에 걸린 것이 오롯이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는 자책으로 입을 다물게 된다. 아픈 사람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그들의 권리는 자주 잊고, 무심한 발상은 환자를 위협한다. 젊은 사람이 대체 어떻게 살았으면 그런 병에 걸리냐는 둥, 정기검진만 제대로 받았어도 초기암은 손쉽게 고칠 수 있는데라는 말로 병에 걸린 것이 오롯이 환자가 잘못 살아온 인과응보인 양 이야기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평생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갈 것처럼 득의양양하다. 언제든 자신과 가십거리였던 이의 위치가 바뀔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바보의 웅변이다.
어떤 이들은 환자에게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어서 암이 생겼다고 말하며 안됐다고 위로하는 척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 굉장한 비난이다. 사회가 무서워하고 설명되지 않는 질병들은 그 환자의 성격에서 유래한 것이라 쉽게 치부된다. 이런 편견 속에 성장한 병자는 병의 원인을 또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 한다. 명확하지 않은 병변의 이유를 자기 스스로에게서 찾는 것, 즉 죄책감으로 치부하는 것이 오히려 더 편안한 것이다. 불확실성보다는 죄책감이 더 편하다고 결론짓는 것이다. 사회가 주는 이 대단한 모욕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라고 목청을 내보는가는 우리의 선택이다.
1, 2차의 화학 치료를 마치고도 재발 확률이 70%인 암 환자. 그녀는 긴긴 화학 치료와 이것저것 반복되는 모르모트 같은 치료 과정에 기대기보다는 남은 생을 인간답게 살겠다고 결정한다. 불확실한 치료로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꿈꾸던 미래를 실천하며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 미래가 내일뿐일지라도. 오랫동안 꿈꿔왔고, 이제는 더 절실해져 버린 홈 스위트 홈을 현실에서 맛봐야겠다고 결정한다.
비 오는 날 텃밭에서 직접 기른 부추를 가위로 잘라와서 부추전을 만들어 먹고, 여름이면 채 썬 오이와 당근을 얹어서 시원한 콩국수를 말아먹고,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이면 노랗고 이쁜 계란지단을 얹은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는다. 그녀의 곁에는 사랑하는 이가 함께 밥을 먹어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눈을 뜨면 손을 마주 잡거나 눈을 마주칠 수도 있다. 병자로서 부당한 삶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나의 자연스럽고 행복한 삶의 시간이 이어진다. 이런 날들과 함께 어느 시간 이 집에서 나는 죽는다.
굳이 만들지 않아도 그려지는 미래가 이 집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녀는 폐가를 수리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보고 기억하게 된다. 미래의 삶 속에 살아가는 내가 있고, 미래에 남겨진 사랑하는 이들이 있고, 남겨진 사랑의 기억이 남는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가 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안정되지 않고 계속 커지는 발산하는 시간에서 미래의 기억은 충분히 예측 가능해진다.
우리의 감각은 죽어간다는 걸 자각할 때, 어느 때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죽음을 눈앞에 두면 두려움이 더 클까 아니면 슬픔이 더 클까? 두려움보다는 슬픔이 더 클 것이다. 두려움은 다가올 미래의 불확실함에 대한 감정이지만, 슬픔은 상실한 것, 혹은 앞으로 상실할 수 있는 모든 것들과 헤어짐에 대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가족, 지인과의 유대가 깊은 사람일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떠난 것이나 앞으로 떠날 것들에 대한 슬픔이 더 클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떠날 때 내가 편안히 두고 갈 집을 찾았다. 죽음도, 두고 가는 자에 대한 슬픔도 천국일 수 있는 홈 스위트 홈을 찾은 것이다. 슬픔이 죽음보다 더 구체적이라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구나 싶다. 죽음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에서 따뜻하고 태산 같은 위로를 받았다. 나에게는 하나의 도전일 테지만,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나도 이 도전을 기쁘게 행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