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 이반 데니소비치처럼

by 서은

각종 향신료와 조미료로 범벅된 찐득한 마라탕의 인기는 대한민국에 혈중마라농도, 마세권이란 신조어를 양산해낸 지 오래되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이 음식에 질리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이 마라탕에 열광하는 것은 현실이 가혹해서일까? 매운맛에 취해 차가운 이성 따위는 잠시라도 내려놔야 현실의 고단함을 위로받을 수 있어서겠지 싶으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이 요리가 대한민국 사람들의 입맛을 변질시켜 나가는 것이 안타깝다.


전통 음식의 외면이 염려돼서와 같은 뭐, 그런 시의적절치 못하고 거창한 생각 같은 건 없다. 단순히 마라탕처럼 자극에 자극을 더한 음식을 찾는 사람들의 위장과 정신건강이 염려스러워서다.

위장이야 본인들이 알아서 책임을 져야 하겠으나, 마라탕은 먹을수록 짬뽕보다 한 수 위의 불편한 음식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소스의 맵기와 짠맛은 먹을수록 올라가고, 먹기 불편한 것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육해공군 내가 먹고 싶은 것만 편식하게끔 조합해서 넣기 때문에 불편한 위장을 감수한 데 대한 가벼운 승리의 맛이 바로 마라탕인 것이다. 점점 더 좋아하는 것들로만 꽉 채운 욕심 한 그릇이 마치 유튜브의 알고리즘 같다는 생각도 든다.


채식이나 생식을 하자는 게 아니다. 단순하고 심플한 바게트나 러시아의 흑빵 같은 것도 귀하게 먹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영국에서 가난한 학생으로 지낼 때 주중 2, 3일은 거의 바게트만 먹으며 버텼던 적이 있다. 에피쿠로스처럼 빵과 물만 먹어서 질렸냐고? 아니 조금도 그렇지 않다. 바게트는 아직도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빵이다. 귀하게 조금씩,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기 때문에 아직도 귀한 맛을 느끼는 것이다.




"수용소에 들어온 후부터 슈호프는 전에 고향마을에 있을 때 배불리 먹던 일을 곧잘 생각하곤 했다.

감자를 무쇠냄비에 몇 개씩이나 넣고 채소를 넣은 죽을 몇 대접씩이나,

그리고 식량 사정이 좋았던 옛날에는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닥치는 대로 먹어 댔었다.

게다가 우유는 질리도록 마셨다.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었다고 슈호프는 지금에야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음식을 먹을 때는 그 진미를 느끼며 먹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이 조그만 빵 조각을 먹듯이 먹어야 한다.

조금씩 입 안에 넣고, 혀끝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양쪽 볼에서 침이 흘러나오게 한다.

그렇게 하면 이 설익은 검은 빵이나마 얼마나 달콤한지 모른다.

수용소 생활 8년, 아니 이제는 9년째로 접어들지만, 그동안 슈호프가 먹어 봤던 게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전 같으면 입에 대지도 못할 것들뿐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에 이제는 질렸다는 건가? 천만에!"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동현 옮김, 문예출판사, 2024년 11월)





우리가 처음으로 투뿔 한우 안심을 먹었을 때의 감동처럼, 슈호프가 소중하고 다정다감하게 먹은 검은 빵의 정체는 사연 많고 역사 깊은 러시아 흑빵이었다. 흑빵은 추운 날씨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베고 잘 정도로 딱딱하고 거친 빵이지만, 수많은 러시아인의 눈물과 한숨, 때로는 정을 느끼게 하며 식탁 위를 지켜왔다.


흑빵은 가난한 농민들이 수확한 밀을 교회나 지주 등에 바치고 난 뒤, 추운 러시아 땅에서도 생산이 잘 되는 호밀과 잡곡을 넣어 빵을 만든 데서 기원한다. 러시아 고전 소설 속에 수없이 등장하며 단순한 빵 이상의 서사를 만드는 흑빵의 정체가 독자들은 아리송할 것이다. 오로지 호밀과 잡곡만 들어간 빵을 직접 한번 만들어본다면, 이 거칠고 딱딱하며 가슬 거리는 식감이 바로 제정 러시아에서 소련까지 달려온 이들의 굴곡진 삶임을 느낄 수 있다.


요즘은 탕종이니 뭐니 재료나 기술이 좋아져서 잡곡빵의 맛이 부드럽고 세련돼졌으나, 그 당시 흑빵은 이도 안 들어갈 만큼 딱딱하고 견고했다. 그러나 흑빵이 가난한 서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으니 충분히 귀하고 달게 느껴졌을 것이고, 오늘날에는 흰 밀가루 빵보다 더 비싸게 팔리는 건강빵이 되었으니 흑빵에 승리 한 표.


단순하고 심플하지만, 그 민족을 상징하면서 발전한 음식들은 어느 나라고 존재한다. 반지나 고리를 뜻하는 유대인의 대표 음식인 베이글은 현재 뉴욕의 대표 음식이고 수많은 뉴요커들이 다양한 배리에이션으로 스터핑한 베이글로 아침을 연다. 최초의 베이글은 종교적 율법을 피해 가기 위해 밀가루, 소금, 이스트, 물만으로 만든 궁여지책의 음식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살벌한 유대인 차별정책인 포그롬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한 유대인들이 베이글을 선두로 세계를 주무르는 신화를 다시 쓰게 되었으니 베이글에도 한 표.


나는 지금 우리 동네 할머니들을 다 홀려버린 술빵을 찌며 들큰한 막걸리 향에 젖고 있다. 술빵은 밀가루와 막걸리, 약간의 설탕과 소금만을 넣고 장시간 발효하여 만든다. 오븐도 필요 없다. 시장이나 길모퉁이 한 켠에서 비닐에 덮인 채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은은한 막걸리 향이 나는 술빵. 이 술빵은 쌀 보기 힘든 일제 강점기부터 미군정을 거쳐 6.25를 관통하며 기쁜 일도 힘들고 고달팠던 일들도 함께해온 추억의 빵이다. 막걸리빵이라고도 하는 이 보잘것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술빵이 할미들의 위보다는 마음을 더 크게 위로해 주니

워매. 나에게도 한 표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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