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내 이름은 태양꽃』리뷰와 에피소드
그런 것들이 있다.
아무리 절망하려야 절망할 수 없는 것들.
오히려 내 절망을 고요히 멈추게 하며,
생생히 찰랑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열어 보여주는 것들.
이를테면, 갓난아이의 얼굴만 한 복숭아 다섯 개를 선물 받은 뒤
차마 먹지 못하고 식탁에 올려놓고 있다가
용기 내어 한 조각 베어 물 때 느끼는 황홀함
아, 눈부신 맛이구나! 황홀하게 달콤하구나.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할 만큼
한강, 『내 이름은 태양꽃문학』동네, 2003년 3월 11일
작가 한강은 심각했던 건강 상태에서 성인 동화책 내 이름은 태양꽃을 집필하였던가 보다. 연약하고, 불평 많고, 의심 많던 꽃에서 태양 꽃이 된 후 느끼는 소회를 대변한달까? 태양꽃처럼 살아남은 자신의 경험을, 그림처럼 눈부신 동화 한 편으로 대변한다고도 느껴진다. 누구라도 자신과 꽃의 모습을 대입해 보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삶에는 늘 예상치 못한 지독한 절망이 있고 그 고통 속에서도 삶은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 그러나, 생생하게 빛나는 대자연의 순환 속에서 꽃이 교훈을 얻듯이, 우리는 삶의 통찰을 통해 절망에 갇히지 않고, 미욱했던 내 잘못을 뉘우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아니 오히려 모진 시련의 시간을 겪어낸 삶은 더욱 단단해지고 순수해진다.
나에게도 태양꽃의 연약한 성장기처럼 매사에 억울하게만 느껴지는 시절이 있었다.
시퍼런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새벽, 몸과 마음에 과중한 스트레스가 체증되어 있는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은 게 실수였다. 인적 드문 빙판길을 회전하던 중 내 차는 가드레일을 받으며 전복했고, 다니던 직장에 출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기적처럼 살아남은 나는 당연히 기나긴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 당시 나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최고 정점을 찍는 시기여서인지 아이러니하게도 몸의 통증이 정신적 통증을 이겨내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주사 꽂을 때가 없어 목에 대표 주사줄 하나를 걸고, 대여섯 대의 약물 주사를 매달고 지내야 했고, 생리적 흐름이 원활치 않은 몸 상태에서 나의 몸은 모든 음식물을 거부하였다. 이래저래 병원생활은 아무리 적응할래도 적응되지 않는 또 다른 미지의 시간이었다.
병실은 신장병으로 투석하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주일에 몇 차례씩 혈액투석을 하면서도 이들은 먹방과 미용을 주제로 끊임없이 재잘댔고, 때로는 말도 안 되게 자신들의 신장투석 이야기를 웃으며 중계하기도 했다. 고통이 주는 귀찮음 속에서도 현실을 충분히 즐기는 그들의 모습은 가히 충격이었고 삶은 절망과 고통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찬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마치 내 이름은 태양꽃에서 얼굴 모를 풀이 얼마나 많은 꽃들이 살아남기 위해 대자연이라는 고통을 통과하는지 태양꽃에게 넌지시 알려주듯이 말이다. 유머지만, 삶이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면 긴 병실생활을 체험해 볼 것을 추천한다.
저 꽃밭에서 다들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니?
진딧물이 잔뜩 달라붙어 단물을 빨아먹는 바람에,
예쁜 봉숭아들이 밤낮으로 숨죽여 앓고 있는 걸 모르니?
여린 줄기를 뚫고 날카로운 가시들을 돋워 내보낼 때마다
장미꽃들이 몰래 울음을 참는 걸 모른단 말이니?
한강, 『내 이름은 태양꽃문학』동네, 2003년 3월 11일
어느 날 내 옆 침실의 신장병 환자가 퇴원하고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다.
자주 커튼을 치고 조용히 소곤거리던 환자와 딸은 밤마다 슬쩍 마실을 다녀오는 것 같았다. 그들이 조용히 귀가할 때는 늘 진한 커피 향이 병실 안을 떠돌거나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음식 냄새가 났다. 이들이 살금살금 기어나가 돌아올 때까지 잠들지 못하던 나는 종종 즐거운 상상을 하곤 했다.
조명이 밝고 예쁜 카페에 앉아 바리스타가 내린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끝도 없는 대화와 웃음을 짓지 않을까?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흡족하게 한 점 잘라먹지 않았을까?
대리만족이랄까? 2주 뒤 그들이 퇴원할 때까지 기분 좋고 맛있는 나의 상상은 이어졌다. 결국 입맛을 되찾기 시작한 나는 가족들에게 맛있는 커피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먹거리를 사 오라 주문하기 시작했다.
기를 쓰고 모진 비바람을 이겨낸 뒤에라야 삶과 세상이 얼마나 강렬하게 살아보고픈지, 또한 더할 바 없이 멋지고 아름다운지 치를 떨며 깨닫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연후라야 일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소중함이 온전히 느껴지는 것이다. 복숭아 한 조각이 황홀한 맛으로, 눈부시게 달콤한 맛으로 체감되는 것이다.
동화이기에 그동안 읽어왔던 한강 작품들처럼 읽어 내리기 고심되는 문장은 없었으나, 일편 담백하고 천진한 글 속에 담긴 감동은 그 크기가 작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너무도 쉽사리 경도되어 책을 읽고 연달아 세 번을 거푸 보고 난 뒤에야 아쉬워하며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끝으로, “우리들의 중요한 임무는 멀리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가까이 있는 분명한 것을 보고 실천하는 것이다.”라는 칼라일의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