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의 탄생』...너와 나의 자화상

by 서은

"언니 … “


"들었구나. 나 유진 씨랑 키스했어.“


"뭘 했다고?"

괜히 물어본 기분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솔직한데.


"걱정 안 해도 돼?“


"뭐가 있을까? 연애 감정이 없었는데.

술김이든 뭐든 그 사람이 원하는데, 딱해 보여서 거절 못 하겠더라.

근데 키스하고 나니 그 사람도 날 그렇게 봤다는 느낌이 들고.

거칠어서 몰랐는데, 좋은 사람이었어.“


"서로 딱해 보였어?“


"너는 사람들 마음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사람들이 어떤 감정으로 관계를 맺는지 정의할 수 있니? 어떤 이유로도 사람들 마음속에 교집합은 생기나 봐. 나는 솔직히 그걸 발견한 게 기뻐.“


사랑의 교집합이라…?

준형과 민석이 호들갑스럽게 전해준 서사와는 좀 다르다. 준형은 누나가 여자로서 상처 입었을까 걱정했고, 민석은 누나의 신앙심이 상처 입었을까 염려했다.

술 취한 형이 뜬금없이 들이댄 상황이 어찌 보면 뜬금없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늘 미숙아처럼 말을 아꼈던 두 사람. 남자는 학교에 잘못 들어온 사람처럼 거칠었고, 여자는 다시 나가야 될 사람처럼 조용했다.


그런 두 사람이 어느 날 벼락 맞은 것처럼, 연애 감정 없이 불가해한 감정에 이끌려 사적이고, 인류애적 위로를 나누었다. 하수인 준형과 민석, 나도 이해하기 힘든, 불가해한 사랑의 교집합이었나 보다.


그날 이후 스터디 모임은 지지부진 끝나버렸다. 돌이켜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우리가 과민반응하고 실망한 것은 젊음이라는 어리숙한 과정에서 눈치 못 챈 집단적 사랑의 경계가 허물어져서가 아닐까?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폴리아모리 같은 사랑이 레이어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실, 타인의 감정을 사랑이다 아니다 측정하는 것도 기괴한 일이다. 나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히려 좋았다. 수녀님이 되겠다는 그녀가 더 기괴한 경험을 해봐도 좋지 않을까?




"나,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마."

나는 말 걸어준 학생 앞에 잔을 놓고 한잔 따라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왜요?"


"우리 선생님이랑 헷갈리잖아. 선생님한테도 선생님이라고 하고 나한테도 선생님이라고 하면."


그렇구나, 그러면 뭐라고 할까요?

나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돌렸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보고 있다가 약과를 접시에 담아 가지고 왔다. 벌건 국물이 남아 있는 식기들과 노란 조명과 흰 테이블보 그리고 다 비워진 정종병은 정말 있지도 않은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자리처럼 기이하게 처량맞았다.



나는 이 대화의 모든 것은 사실 기만이고 우리는 지금 선생님을 위로하기 위해, 그러니까 죽어버린 선생님의 결혼 생활을 위해 있고 역시 죽어 마땅한 선생님의 1년여간의 그 외도를 위해 여기 있지 않은가 생각하다가 선생님, 하고 선생님을 불렀다.


"왜?"


"선생님."


"왜?"


"걔하고 잤어요?

그 순간 바람이 지나가듯이 휙 하는 침묵이 아파트를 채웠다.

(김금희, 『기괴의 탄생』 2020 올해의 문제소설, 푸른사상, 2020년 2월)




김금희 작가의 수많은 사랑 레퍼토리 중에서도 『기괴의 탄생』은 불가해한 사랑이란 화두를 조용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아주 치열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지난한 관계의 균열을 반복하며 이 뜨거운 화두를 맞받아친다. 그 배경에는 주인공이 존경하고 애정하는 선생이 자신을 초개처럼 버리고, 와사비같이 덜떨어진 대학원생과 사랑을 선택한 데서 기인한다. 주인공은 선생과 와사비 녀석의 관계를 미뢰를 자극하는 쇄말적 맛으로 눈물 콧물 빼는 신파이며, 다분히 통속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녀 입장에서는 아주 완벽하고 촌철 살인하는 축약적 표현법이다.


그녀는 선생을 잘 지켜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여러모로 유능함이 부족하기만 하다. 사실상 주인공이 공정한 카운슬러가 되기에는 애초부터 글렀다. 첫째, 객관적 시각이나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둘째, 선생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그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어떤 감정'이 끼어있었다. 우리는 그녀와 선생, 그리고 제3자로 끼어든 리애와의 비빔밥 같은 관계 속에서 사랑의 범위가 얼마나 너른지, 복잡한 마음들이 켜켜이 가져오는 파장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인지를 보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버겁고 지난했을 과정이 독자 입장에서도 다난하지만, 동시에 흥미로우니 차근차근 곱씹어 읽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소설 속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학부시절 선생의 살뜰한 관심과 관리를 받은 애제자였다. 졸업 후에는 선생에게 폐 끼치기 싫어 강사나 단원 자리를 마다하고 내 힘으로 조용히 일반 회사에 취직했다. 사회인이 된 후에도 보름에 한 번씩은 또박또박 안부를 물었으며 각종 기념일과 선물을 챙긴다. 종이 인형에서 오려낸 존재 같은 현재 제자들과의 가벼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감. 그들도 이 진중한 무게감을 인정하는 듯, 선생과 배석한 자리에서 스스럼없이 나를 선생이라고 호칭한다. 선생님도 나를 인정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흔히 나만의 생각에 갇혀있을 때를 조심해야 한다. 누군가의 팬이 되면, 어느 순간 존경심과 사랑보다 애착이 더 커진다. 내가 어떻게 해줬는데 하는 병적인 패착까지 끼어든다. 그래서 꼭 필요한 순간에 갖춰야 할 존경심은 종종 기본적인 존중을 입지 않고 표현된다. 이때가 더러운 무지의 때가 스며드는 순간임을 본인은 잘 모른다. 선생에게 끔찍하던 애제자가 손절하고 싶을 만큼 끔찍해진다.


둘만의 모임 약속에 선생은 왜 현실의 제자들을 불렀을까? 선생은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고 수다스러웠으며 불안정해 보였다. 반면 종이 인형에서 오려낸 듯 가벼운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안도하였고 편안해 보였다. 이것은 당연하다. 선생의 입장에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머리가 굵어 자신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왈가불가 비판하고 감시하려는 제자가 부담스럽다. 이미 순수함을 잃은 눈으로 '나의 불가해한 사랑'을 비판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판단하는데 전과 같은 감정으로 대하기는 힘들다.


애정하던 제자가 어느새 완장을 두르고 사랑의 감시자가 되었다. 그 감정을 거품처럼 걷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더 이상 만만하지 않은 제자는 '무슨 종류의 사랑'인지 모를 질투의 감각까지 무장하여 누구보다 열렬하게 자신의 사랑을 폄훼한다. 종국에는 어린 제자들 앞에서 "걔하고 잤어요?"라는 지울 수 없는 물음으로 관계의 단절을 예고한다. 이들의 관계는 한동안 지속되지만, 이들 사이에 존재하던 특별한, 애틋한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불행하게도 예정된 순으로.


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마음을 붙잡아보려는 나는 새로운 조언자를 얻는다. 세련되어 보이고 무엇보다 어려운 현실 문제에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으로 보이는 사십 대 신입사원 리애. 선생과의 파국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에게 리애는 차근차근 조언을 반복한다. 리애의 조언은 사랑에 대한 일반론적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알고 보니 사실 그녀 역시 통속적 사랑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조력자이자 또 다른 사랑의 컨설턴트 역시 불가해한 사랑을 한 인물이라니, 나는 다시 한번 복잡한 수렁에 빠지게 된다. 복잡해진 머리는 중심을 잃지 않고자, 진정한 사랑이 뭐냐는 기본적인 명제를 복기해낸다.


사랑이라는 명제가 단순하지 않기에 우리는 사랑 앞에 수많은 수식어를 붙인다. 불가해한 사랑도 그 수식어 중 하나이며 그 반대편에 선 것이 진짜, 혹은 진실한 사랑이라는 수식어다. 왜 사랑이라는 명제 앞에 강조 표현 혹은 진정성이 요구되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어야만 할까? 그냥 사랑이라고 호칭하면 그 무게가 줄어들까? 선명성이, 진정성이 훼손될까 염려한 인간의 사소한 장치인 수식어들은 인간의 불안정함과 나약함만을 부각시킬 뿐 사랑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더 나아가 사랑은 연약한 인간들에게 다양성을 부여해 이성애, 가족애, 우정, 신에 대한 사랑, 인류애 등의 이름으로 분화되고 그 어디쯤인가에서는 여러 가지가 서로 섞이어 또 다른 양태의 사랑이 출현하기도 한다.


불가해한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폄훼하는 게 불가하듯이, 사랑의 다양한 양태 역시 형태만 다른 사랑일 것이다. 선생과 나의 관계를 되찾고 싶어 시작한 리애와의 관계에서도 답을 못 찾은 나는 결국 선생과 파국을 맞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물지 못하고 벌어진 상처는 더욱 크게 입을 벌리며 기괴한 탄생을 세상에 내놓았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돈수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듯 상당히 슬프지 않았던가? 결국 우리는 이 작품에서 우리 삶의 이면에는 이해받을 수 없는 기괴함이 존재한다는 인정하게 된다.


소설의 결말 부분이 다소 충격적이고 비관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읽히지 않았던 것은 김금희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적 유희의 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추냉이 같은 놈, 정종과 약과, 선생이 손님 접대용으로 끓인 토마토탕, 갈변된 샐러드상 등이 바로 그것인데,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 서사를 끊임없이 잘 읽게 해주는 외국산 고오급 엔진오일다. 이런 과한 듯, 애매한 듯 싶은 언어적 폭소 덕분에 이야기의 서사가 유연하게 반주되어 흘렀고, 불편하고 답답한 상황에도 우리가 웃음을 잃지 않게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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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뉴스에 연재중입니다 (입력 2025.06.09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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