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펫로스』 너의 계절은 나의 날씨를 바꾼다.

이신조, 『너의 계절, 나의 날씨』 펫로스 리뷰와 에피소드

by 서은

닥스훈트를 실물에 가깝게 재현한 인형 선물을 받았다. 녀석을 잃고 5년이 조금 지나서였다. 5년이면 강아지의 시간으로는 30세 성인을 훌쩍 뛰어넘는 긴 세월이지만, 사람인 나에게는 고작해야 녀석을 잃어버린 잠깐의 시간이다. 그리고, 5년이란 시간은 같이 살아가던 생명을 까맣게 망각할 수 있는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잊지 않았다. 잊지 못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잊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런 내게 닥스훈트 인형은 농같기도 하고 장난처럼도 느껴졌다. 무지개다리를 건넜느니, 강아지 세상으로 떠났느니 하는 어색한 위로와 정교한 강아지인형은 그네가 생각한 약이 된것이 아니라 생채기에 뿌린 하얀 소금이 되었다. 나는 슬픔을 에두르고 싶지 않았고, 내 안에 차곡히 챙겨 넣으며 녀석을 기억하기를 원했을 뿐인데, 이런 무생명체 '제품'은 내겐 모욕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10년을 함께 산 반려견이라면 '가족'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가족을 잃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상실감이다. 지독하게 다정다감하고 보호자에게 충실했던 녀석은 죽어가는 순간까지 주인 바라기였다. 녀석은 숨이 넘어가는 와중에도 귓가에 대고 이름을 부르면 기를 쓰고 고개를 들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인간에게 화답하고 싶어 했다. 나는 이름을 고만 부르면 정말 떠날 것만 같아 계속 부를 수밖에는 없었다. 가족들이 '힘들다. 고만 보내줘라.'는 채근이 없었다면 나는 녀석을 계속 힘들게 했을 것이다. 내가 더이상은 이름을 부르지 못하자, 녀석은 긴 한숨과 함께 숨을 거두었다.


노모를 돌보던 나는 녀석이 심장병을 앓기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돌봄 자체에 지쳐버렸다. 생활비의 1/10쯤 하는 고액의 병원 치료비와 약 값이 제일 무서웠고, 아픈 녀석이 밥을 잘 안 먹는 거, 기운 없는 거 보는 게 다음으로 무서웠다. 건강할 때는 종 특유의 똥고발랄함을 주체 못 해 가구를 다 물어뜯거나 산책 중 아무거나 집어먹는 식성을 극악을 떤다 꾸짖었고, 노령견으로 의젓해지자, 노령견만의 아름다움을 잘 보지 못하고 애교가 줄었다 한숨 쉬었다. 그럼에도 녀석은 끊임없이 내 해바라기였다. 녀석이 내게 온 것도 내가 강아지를 키운 것도 처음이어서라고 변명하기에는 너무나 반듯한 반려동물 보호자들이 많은 세상이다.

반려견이 나이 들면서 나는 종종 그를 친구 삼아 이야기 나눌 때 가 많아졌고 녀석은 매번 사려 깊은 노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행동이 느려지고 말수도 줄었다.(짖지 않았다.) 심지어 어리석은 주인과 달리 녀석은 죽어서도 자주 꿈에 나타나 위로를 건네었다. 자기가 무슨 굿윌 헌팅의 로빈 윌리엄스라도 되는 양 "It's not your fault"라는 식의 행동이나 뉘앙스를 전하고 싶어 했다. 내 양심의 가책이 만들어낸 꿈인지 모르겠으나 깨어서도 꿈을 생생히 기억해냈고, 실제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친구야, 너의 계절은 곧 나의 날씨가 되어 나는 수시로 웃고 울었어. 고맙다.‘




2018년 6월 15일은 12년을 키우던 강아지 몽이가 생을 마감한 날입니다.



"평평한 바위를 중심으로 나무를 몇 그루 선택한다. 크고 울창한 나무가 아니라, 작고 평범하지만 나름의 존재감을 가진 나무들. 밥공기만 한 유골함의 뚜껑을 열고 그 나무들 아래 너의 뼛가루를 조금씩 나누어 뿌린다. 물병에 담아온 물도 나누어 붓고 그 위를 낙엽으로 덮는다. 나는 샘플용 사료 봉지를 뜯어 수풀 사이 여기저기로 던진다. 이곳의 새와 곤충들이 너를 받아주었으면 좋겠다. I 산의 정령도 너를 받아주었으면 좋겠다. 이곳은 나의 장소이고 너의 자리다. 너는 내 아랫배에도 있고, 강이 가까운 집의 메모리얼 테이블에도 있고, 자동차의 조수석에도 있고, 연구실 구성의 의자에도 있고, S 섬 공원의 벤치에도 있고, 이 숲속의 나무와 바위에도 있다. 너는 동시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이신조, 『너의 계절, 나의 날씨』 펫로스, 겨울 편지, 문학동네 2025)




지구에서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자연에서 태어난 것처럼 죽은 뒤에도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올바른 순리이다. 죽은 생명은 앞으로 살아갈 생명체에게 밥이 되고 그 몸을 내주어 산 생명을 살리는 동시에 다시 태어나는 존재로서의 보람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순환의 법이다. 하지만, 인간은 종종 순리를 거스르며 생명이 다한 존재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나 과장되고 요란한 방식으로 다루곤 한다. 그래서 나는 죽기 전에 어떻게 죽고 싶은지, 죽은 뒤에 어떻게 처리되고 싶은지 꼭 밝힐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고 여긴다. 고통스럽더라고 내가 살던 집에서 내가 사용하던 물건들에 쌓여 내 채취, 가족의 물건과 채취, 반려동물의 체취까지 느껴가면서 죽고 싶은지, 아니면 다 필요 없고 병원에서 적절한 약물의 도움으로 고통을 경감해가면서 숨을 거둘 것인지, 또 죽은 뒤에는 조용하게 묻힐지 축제 같은 느낌의 장례식을 벌일지 다 생각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좋은 기억으로 끝을 마치지 못하면 산자가 고통스러운 법이다. 나는 나의 반려견을 한결같은 마음으로는 지켜주지 못하였다. 그래서 오랜 시간 마음에 커다란 짐을 지며 살았고, 함께 도와주지 않았던 가족들을 이기적이다 원망했으며 맘속으로 잠깐잠깐 괘씸해 하기도 하였다. 내가 온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오히려 마지막 남은 시간을 아쉬워하며 녀석을 독차지해서 돌보고, 산책시키고, 병원에 데려가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팻로스의 여주인공처럼 사랑했던 이 아닌 사랑하는 반려견이 여기저기 도처에서 그녀와 함께하는 자연스러운 광경을 목도했을 것이다. 반려동물과 살고 있다면, 팻로스를 경험하기 전 되도록 많은 시간을, 특히나 아픈 순간과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 반려동물 옆을 지켜주면 좋겠다. 반려동물의 생은 인간의 시간에 비해 턱없이 짧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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