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삼각형>+<콘크리트 유토피아>, <헝거>, <괴물>
*스포가 있습니다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선할 수 있고 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할 수도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기심에, 욕심에, 본능에, 또는 본심에 모양이 입혀진다면 그건 어떤 형체를 하고 있을까?
오늘의 세 편(+1)의 영화는, 인물들을 영화적 상황에 밀어 넣고 그들이 갖고 있는 가장 날것의 본심을 조명한다. 상황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극적이다. 무인도에 조난하기도, 성공에 집착해 모든 걸 쏟아붓기도, 오해에 휘말려 삶의 안위가 흔들리기도 한다.
낯선 상황의 계급 전복을 주목하라. 여객선이 전복되고 일상적 상황이 무인도라는 새로운 공간에 삽입되면서 관계 권력, 지배 권력, 성 권력 역시 전복되고 계층이 재편된다.
예컨대, 영화는 세 개의 파트로 나뉘는데 part 1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과 위계에 '공평'을 외치던 칼은 part 3에서 캡틴 애비게일에게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고 성 상납을 자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권력과 계층의 재편은 무인도와 생존이라는 극한의 상황과 맞물리며 개연성을 부여한다. 호화 여객선에서는 돈의 힘으로 떵떵거리던 사람들이 무인도에선 생존에 필요한 어떤 것도 할 줄 모르는 쓸모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반면 여객선 화장실 청소나 하던 필리핀 여성 애비게일은 무인도에선 풍부한 식량과 생존 능력으로 "캡틴"이 되었다.
그럼에도 무인도라는 특별한 상황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이다. 자본 사회의 권력자인 부자와 인플루언서는 지극히 당연하게도 탈출을 염원한다. 야야는 이 무인도 저 산 너머에 호화 리조트가 있다는 걸 알고 구조를 요청하러 가면서, 그 마지막까지도 애비게일에게 '비서'를 시켜주겠다고 말한다. 무인도에서 실질적으로 비서 노릇을 한 건 야야였음에도 야야 스스로 자신을 비서다웠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오만함의 파편이기도 하다.
임시적 상황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영화는 애비게일이 얼마나 이 생존에 크게 기여했든지 간에 우리 사회에서 비서의 자격 정도가 부여될 뿐이리라 암시한다. 그의 피부색과 인종과 성별과 나이를 이유로. 그러니 애비게일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 않을 수밖에 없다. 권력자로, 캡틴으로,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무인도에 벗어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돌덩이를 든다.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앉은 야야를 향해.
<슬픔의 삼각형>의 '극한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계층 구조의 혼동과 서스펜스'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닮아 있기도 하다. 위기와 불안 속에서 분산되고 재조직되기를 반복하는 계급과 계층, 그 인간 군상을 면밀하게, 그리고 한국적으로 발견하고자 한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함께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슬픔의 삼각형>이 지배 구조와 그 구조의 위선에 주목하고자 했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내야 할 선함과 참됨, 위로와 사랑같은 것을 향한 소망에 대해 말하기를 잊지 않는다.
혹자는 그것들에 대한 강조가 비현실적이라 할만큼 이상적인 것이라 말하겠지만 결국 살아가면서 잃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던가. 바보같은 희망과 실낱같은 정의. 욕심과 이기가 우리를 집어삼킬지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 것에 대한 선언과도 같은 영화다.
‘hunger’ 욕망의 굶주림과 허기를 의미하는 다의어. 영화의 제목이다. 음식이라는 방식으로 표출되는 욕망의 서술.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가 많은 것을, 영화의 전부를 요약한다.
폴 쉐프의 요리를 찾는 이들은 부자들, 폴 쉐프의 입을 빌려 설명되었듯 부자들의 식사는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식사는 자신의 부를 보여주고 위치를 확립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나 폴 쉐프의 요리를 통해 그들의 '먹는' 모습이 얼마나 게걸스럽고 탐욕스러운지 묘사된다. 영화는 포장된 프로페셔널함이 반영된 폴 쉐프의 요리들이 어떻게 밑바닥 본능에 가까운 욕망을 고급스러운 것으로 포장하게 되는지 말한다.
어린 폴은 주인 집 사람들이 캐비어를 빵에 발라 먹는 모습을 본다. 캐비어는 얼마나 맛있을까, 그는 몰래 캐비어를 훔쳐 먹는다. 폴은 어릴 적 훔쳐 먹은 캐비어 떠올리며 말한다. 캐비어는 더럽게 맛이 없었다고.
유력 인사가 모인 파티에서 오이와 폴 쉐프는 각자의 요리를 선보이게 된다. 오이가 어떤 요리를 하든 그게 정말로 맛이 있든 말든 더 유명한 폴 쉐프가 그럴듯한 뭔가를 내놓자마자 관심이 바뀐다. 이름 붙여지는 대로. 명성이 붙는 대로. 본질과 상관없이. 곧 폴은 불법적인 일로 파티에서 연행된다. 관심은 바로 오이의 요리에 쏠린다. 오이의 요리는 드높여진다. 맛있다고. 최고라고. 역시, 본질과 상관없이.
성공과 유명세를 좇던 오이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결국 '본질'을 찾아간다. 나의 요리를, 나의 허기를, 나를 채우는 가장 근본적인 곳. 징징이 국수를 만드는 우리 집, 우리 집의 가게로. 욕망에 감추어져 보잘것없이 여겼던 본질의 그곳으로.
참 허상과도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은 저마다의 입장을 갖고 산다.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을 구성하는 어떤 조각들이 두드러져서 드러나기 마련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 따라 같은 상황을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극에서 호리 선생은 반 학생이 말한 "무기노 군이 죽은 고양이랑 놀고 있었어요."를 "무기노 군이 고양이를 죽였다."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여태껏 다소 이성적이고 바른 판단을 할 것이라는 그의 성정에 대한 극의 묘사와 사뭇 다른 양상으로, 수세에 몰리면 사람은 누구든지 누구라도 본인의 입장에 충실한 이해를 하게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식의 표현은 영화 내내 서로 다른 인물과 서로 다른 대사를 통해 등장한다.
인간은 자기만을 생각할 때 얼마나 불쾌하고 역겨워질 수 있는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듯이 자기만을 생각한 판단들이 타인에게 어떻게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입히게 되는가. "사실은 교장 선생님이 손녀를 죽였죠?" "걸스바 같은 데나 다니는 사람이". 나를 방어해 내기 위한 공명에 진위는 상관이 없다. 상황에 대한 어떠한 맥락도 사라진 채로 주관적인 응답은 정량화되고 이는 곧 사실이 된다(호리 선생님이 무섭습니까?를 묻는 설문조사처럼). 진실과는 상관없다. 자, 누가 '괴물'인가?
영화는 이 질문을 요리의 '병'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으로 치환한다. 날 때부터 돼지의 뇌를 가져서 병이 있다고 가스라이팅 당한 요리는 아버지로부터 동급생들로부터 괴물 소리를 들어왔다. 알고 보니 그 병이라 함은 동성애‘일 수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고, 이에 앞서 등장인물 각자의 관점에서 서술된 인간스럽지 않은 개개인의 일면들을 보여주면서 정말 인간이 갖고 있는 괴물성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말하자면, 사회가 '병폐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정말 병폐적인가, 또 그러한 것들을 병폐적인 것으로 취급한 우리는 정말 당당하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지금 여기 죄 없는 자가 있는가?
세계를 좁게 만드는 건 이미 좁아질 대로 좁아진 우리의 편협함 때문이다. 아이들보다 더 자유로이 무언가를 할 권한이 있는 사람들이 자꾸 자기만의 좁은 세계로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는 세계를 구겨 넣는다. 인간의 편협함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극에서 등장하는 돼지의 뇌인가? 극에서 되묻는 것처럼 외계인이기 때문인가? 아니. 인간이. 인간이 그렇게 한다.
*‘일 수도 있음’이 중요할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나이는 정체성을 확립하기에는 어린 나이다. 그러니 이들의 관계는 얼마든지 우정일 수 있는데, 그걸 이분법적으로 먼저 재단해 버린 아버지(어른)의 시선을 꼬집는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