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만들어 놓은 관습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고, 내면의 욕망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레 ‘나’라는 사람이 표현되기 시작한다.
요즘 내 관심사는 ‘사업가인가, 예술가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업가로서의 표현’과 ‘예술가로서의 표현’이라는 두 가지 틀로 나를 나눠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나는 이 질문이 단순히 선택의 문제는 아닐 수 있겠다고 느낀다. 오히려 타고난 재능의 영역에 가깝고, 지금껏 내가 선택해 온 삶의 방향과 역사를 들여다보면 어렴풋이 드러나는 영역이기도 하다.
나는 평소 무언가를 수집하기보단 비워내려고 한다. 사물보단 경험으로 나를 채우고 싶어 한다. 신발이나 옷을 모으는 일에는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반대로, 체육·음악·철학·미술 같은 분야에서 어떤 경험을 쌓을 수 있을지, 그리고 그 경험이 내 몸에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상상할 때 더 가슴이 뛴다. 결국 ‘직접 생산하고 싶다’는 욕구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건을 사는 일도 있지만, 그건 단지 수집을 위한 게 아니다. 나의 경험의 질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기 위해 스피커를 산 게 아니라, 좋은 음악을 틀기 전에 그걸 잘 고르기 위해 고른 것이다. 트레일 러닝화를 고른 것도 디자인 때문이 아니라, 그 신발이 더 멀리, 더 안전하게 나아가게 해 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사업가로서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사실 그동안은 이 질문을 단순하게 넘겨왔고, 스스로가 ‘사업가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아직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보다는 표현하는 것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며, 명예와 부를 얻는 내 모습을 그리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때때로 ‘배고프게 살아갈 용기’을 가져야 할까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걱정 없이 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조금만 나를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나는 돈을 많이 버는 일보다는, 몸과 마음에 어떤 경험을 쌓아가는 데서 훨씬 더 큰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그 경험은 글을 쓰고, 몸을 움직이고,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와 깊이 대화 나누는 순간에서 온다. 그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처럼, 그 경험을 지탱할 바탕, 또는 그 경험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걸.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양 극단을 피하면서, 내가 진짜 살아있다고 느끼는 일과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길.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어쩌면, 내 삶의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그 긴 줄 위를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