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쓰는 즐거움, 빠르게 떠오르는 생각들

나는 왜 종이에 만년필로 쓰는 걸 좋아할까?

by 롱러너

요새 업무할 때, 외출할 때면 항상 들고 다니는 건 메모장과 만년필이다. 업무 노트에 만년필을 들고 다녔는데 여기에 메모장을 추가했다. ​번거롭게 왜 두 개를 들고 다니냐고?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업무 노트는 나에게 할당된 일들을 우선순위에 따라 차례대로 적고, 완료하면 제거하는 공간이다. 메모장은 무언가가 떠오르면 생각나는 대로 휙휙 적는 공간이다. 업무 노트는 뭔가 경건한 마음으로, 메모장은 놀 듯이 적는다. 원래 업무 노트에 두 목적이 통합되어 있었는데 두 개가 점점 섞이더니 아주 개판이 되었다. 그래서 들고 다니기 귀찮더라도 나눠봤는데 나에게 꽤 잘 맞는다.

여전히 회의록을 정확하고 빠르게 작성하기 위해 랩탑을 들고 다니고, 녹음하여 스크립트로 옮겨주는 앱을 가끔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손으로 슥슥 쓸 때면 뇌의 가동 범위가 달라진다. 랩탑과 녹음은 완결성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으나, 그저 옮겨 놓아서인가? 스스로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의존해서 그런지 집중력이 약간 떨어진다. 어차피 전문을 읽을 일이 거의 없었다. 미팅 후에 궁금한 게 있다면 상대방에게 다시 물어보면 된다.

손으로 쓰면 쓰고 듣는 감각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도 깨운다.

쓰기는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리니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긴장하고 집중하게 된다. 회의 또는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양하게 접근‘이 중요하지 그대로 옮기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어 또는 핵심 문장만 적으면 완결성은 떨어지지만 그만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더 좋은 방법을 떠올릴 수 있게 되어 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물론 내용을 그대로 옮겨야 하는 회의도 있다.)

그리고 만년필과 볼펜도 비교하자면, 만년필은 볼펜에 비해 쓰는 속도가 더 느리다. 그러니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하게 만든다. ​단어만 뚝뚝 끊겨 쓰여있는 메모장을 볼 때면, 머릿속에선 회의에서 나오지 않았던 단어를 이것저것 붙여가는 생각의 컨베이어 벨트가, 용광로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대체재인 아이패드를 들고 다녀봤지만, 종이의 물성, 사각사각 쓰고 쉭쉭 넘기는 순간을 거쳐 도출되는 생각은 뭔가 다르다. 확연하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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