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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미술쌤 옐로 Aug 20. 2021

글을 그리면서 그림을 쓴다.

02. 그릴 준비물만 열심히 준비하는



물건을 쌓아두고 사는 편은 아닌데 매번 정리했다 풀었다 반복하는 물건들이 있다. 언젠가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잘 보관해 두다가도 가끔은 다시 사용할 일이 있을까 싶어 버리기 위해 빼놓기도 한다. 이런 물건들 대부분은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마련해 둔 것이 많아서 평소 관심 분야가 무엇인지 짐작이 되기도 한다. 허약체질인 나는 건강해지고 싶은 욕구가 강해 운동과 관련된 물건들이 꽤 된다. 찬찬히 살펴보면 사용 흔적이 없어서 더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사용 흔적이 없다는 것은 관심만 가졌을 뿐 제대로 해 본 적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버리기 아까운 물 건 중에 요가복이 있다.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데 여러 곳에서 조언을 구했다. 추천받은 제품과 직접 검색한 제품을 비교해가며 기능적인 면, 색상과 디자인 등을 꼼꼼히 따져 보았다. 요가를 어디서 배울까 보다 더 고민했었다. 마음에 쏙 드는 요가복을 입고 매트에 서면 180도 다리 찢기나 물구나무서기쯤은 거뜬할 것 같았다. 스트레칭 한번 하지 않던 몸은 요가 첫날 앓아눕게 되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 몸이 풀리자 다시 요가원에 가긴 했지만, 강습이 아니라 환불받기 위해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거나 입을 걸 하는 생각을 했다. 스카이 블루 톤의 짱짱한 요가복은 여전히 요가에 대한 환상으로 머릿속을 옥 쬐곤 한다.     



오리발도 버리기 아까운 물건에 포함된다. 수영을 1년 가까이 배웠어도 접영과 평형이 어렵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물에서뿐만 아니라 바닥에 누워 발차기 흉내도 내보고, 거울 앞에서 손동작 연습도 자주 했지만, 실력은 제자리걸음이었다. 그쯤 오리발이 꿈의 물건이 되었다. 오리발만 있으면 물고기처럼 헤엄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막상 구매해 신어보니 걷는 게 힘들었다. 아무래도 뒤뚱거려서 오리발로 부르게 된 게 아닐까. 옆으로 겨우 걸어 물에 들어가니 오리발 덕에 물고기처럼 헤엄칠 수 있으리란 예상은 착각이었다. 다리에 힘을 더 줘야 해서 발차기조차 버거웠다. 짙은 블루 톤의 쫀쫀한 오리발은 여름만 되면 물을 찹찹 찰지게 때리고픈 마음을 뒤뚱거리게 한다.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넘칠 때마다 준비물을 완벽히 준비하면 잘 해낼 것 같은 마음에 지름신이 강림해도 그저 행복하기만 하다. 그 감정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려면 준비한 물건들을 마음껏 소진해야 하는 게 먼저다. 열심히 다뤄야 한다. 연습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반복하는 과정을 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요가도 수영도 그런 시간을 내주지 못했기에 남은 건 실력이 아니라 준비물이 되었다. 틈틈이 옥 쬐고 뒤뚱거리게 하는 물건만 열심히 준비한 셈인데, 이런 경우를 그림 배울 때도 흔히 보게 된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수채화 수업 시간이었고, 표현 방법에 대한 설명 중이었다. 잠시 설명이 멈추자 수강생분 관심이 다른 것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선생님, 이건 뭐예요?”

“네? 걸레요?”

설마 걸레를 가리키는 건가 싶어 되물었다.

“이게 걸레라고요? 좋아 보이는데 이런 건 어디서 사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와 버렸다. 수채화 수업을 하면 붓의 물기를 닦기 위해 걸레로 쓸 수건을 준비해 오는데 그날따라 알록달록 해진 그림용 수건이 보이지 않았다. 급한 대로 컵을 말릴 때 사용하던 물 받침용 패드를 가져왔었다. 각 잡힌 네모난 모양의 패드가 신기했었나 보다.

“쓰시던 수건이 좋아요. 수건이 없어서 가져왔는데 모가 빡빡해서 물 흡수가 안 되네요.”

수강생분의 자리를 슬쩍 쳐다보니 새것처럼 정갈한 수건이 펼쳐져 있다. 깨끗한 수건을 두고 흡수가 힘들어 시커먼 물이 고여진 걸레가 좋아 보인다니 너무 귀여우신 게 아닌가. 걸레에 관심을 거두고 다시 설명을 듣기 시작하셨는데 이번엔 나의 눈길이 걸레에 쏠린다.   




지금까지 물감을 닦다가 걸레로 만들어 버린 수건이 몇 장이나 될까? 아마 그분이 원했던 건, 이 물 받침용 패드가 아니었을 것이다. 제대로 그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생각처럼 쉽지 않으니 뭐가 다른지 관찰하게 되었을 거다. 종이도 똑같고, 붓도 똑같고, 물감도 똑같다. 그러다 평소와 다른 네모난 걸레가 눈에 띄었을 것이다. 저 걸레만 있다면... 충분히 공감이 간다. 여름만 되면 오리발을 발에 끼워 뒤뚱거려 보던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무언가를 원하는 대로 해내려면 그만큼 시간을 들여 노력해야 함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빨리 이루고 싶다. 좋아하는 만큼 조급해진다. 이 조급함을 내려놓아야 준비한 물건을 소진시키며 익숙해져 필요한 능력이 갖춰진다.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무수히 많은 연필이 닳고 종이가 망쳐져야 한다. 닳아야 할 것이 연필뿐일까. 물감이며 붓이며 하다못해 철로 된 파렛트도 닳아서 버려야 할 때가 온다. 깨끗했던 수건이 얼룩져 수십 장은 버려져야 한다. 어쩌면 재능 있는 사람은 그 과정을 꾸준히 반복해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만약 집안 어딘가에 그림 그리기 재료가 있다면 그리기에 관심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재료를 소진시킬 생각을 하면 된다. ‘필요한 도구를 빠트림 없이 준비해서 시작해야지’ 또는 ‘뭐가 제일 좋은지 알아보고 시작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미루지 말았으면 한다. 표현할 도구가 무엇이든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맞는 표현 방법은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연과 자연 연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화구통 속의 내용물에 대한 화가의 태도다.

- 파울 클레,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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