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구두를 함부로 밟지 마라
그리스 신화, 올림포스의 열두 신(神) 가운데 가장 세련된 외관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헤르메스.
그가 이러한 평가를 받는데 있어 혁혁한 공을 세운 아이템은 바로 날개달린 신발이었다.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게 해주는 헤르메스의 신발. 그의 존재 기원으로부터 기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자에게 있어 신발은 여전히 가장 핫한 아이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모든 신발이 남자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남자다움을 증명하면서도 이성을 유혹할 수 있는 마법 같은 아이템인 구두. 단언컨대 구두는 남자의 패션에 있어 날 선 자존심이자 시리도록 차가운 이성적 아이템이다.
예로부터 구두는 남자의 특별한 날에 함께 해야 한다는 절대적 의무감이 깃들어 있었다. 생에 가장 아쉬운 날인 졸업식, 설레고 두려운 마음을 간직했던 첫 출근 날, 그리고 군대에서 그토록 기다려왔던 백일 휴가 때도 남자들은 여지없이 구두에 가장 큰 공을 쏟는다. 구두약을 묻혀 닦든 물광 혹은 불광을 내든 반질반질해지는 구두코를 바라보며 남자들은 자신의 마음까지 세심하게 '세심(洗心)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짚신과 나막신으로 대변됐던 우리네 조상들의 '족사(足史)'에 구두는 언제부터 그 자국을 남겼던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구두를 신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개화파 정객들과 외교관들이 구두를 사 신고 들어오면서부터다. 그 당시 남성 구두는 목이 발목 위까지 올라오고, 발등부터 버튼이 달려 잠그게 된 장화형의 버튼부츠였다. 이어 구두끈을 얽어매는 지금의 등산화와 비슷한 목이 긴 목구두가 들어왔다.
패션은 돌고 돈다고 했던가? 사실 2015년의 지금, 그 두 형태의 구두는 엣지 있는 아이템으로 패션 피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개화기시대의 구두를 디지털 시대의 남성들이 애용하고 있다는데 시대의 오마주가 느껴지는 것도 같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남자의 패션에 구두를 대체하는 다른 아이템들이 사랑받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로퍼나 스니커즈가 구두의 자리를 대체하며 이른바 댄디패션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이는 구두를 신어야 할 때 샌들이나 펌프스 등 슈즈 선택의 폭이 넓은 여성에 비해 컬러나 가죽 정도의 선택권 밖에 주어지지 않는 남성들의 딜레마가 반영된 현상이다.
물론 남자들에게 다양한 슈즈가 보장된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양한 슈즈는 그만큼 패션의 다양화를 보장해준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구두를 대하는 세심(洗心)적 관점에서 로퍼와 스니커즈는 패션을 대하는 남자의 마음을 자칫 해이해지게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좋은 신발은 남자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는 말이 있다. 바꿔 말하면 '좋은 곳엔 좋은 신발을 신고 가야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구두를 꺼내 광을 내는 것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가는 곳에 대한 자신의 태도, 정성, 그리고 당당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포돼 있다. 구두는 하나의 패션 아이템을 넘어서 그날 자신이 내보이고자 하는 대표적 이미지들의 총체적 집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반바지에 로퍼와 스니커즈를 신은 젊은이들의 댄디함보다 각이 잡힌 슈트하의에 광이 나는 구두를 매치한 아저씨들의 정갈함을 더 사랑하고 있다. '진짜 패션'은 화려한 겉치장보다 진정성 있는 속치장이 울림이 더 큰 법이니까.
오늘은 곁에 있는 남자들의 구두를 유심히 살펴봤으면 한다. 그들이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준비했을 구두의 속뜻을 음미해보고 구두에 나타나 있는 그들의 하루를 응원했으면 한다. 닳고 닳아진 굽일지라도 구두코만큼은 반질하게 닦고 다니는 우리 시대 남자들의 등을 토닥이고 싶은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