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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상하는 연필 Jun 05. 2020

마흔의 자격

콩국수와 설거지에 대한 단상

지난 주말 아침, 울렁거리는 속을 참아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휴일의 아침은 고요하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 아침은 유독 더 그렇게 느껴진다.

아. 아영이는 벌써 나갔겠구나.

친구 결혼식 참석 차 아내가 오전 일찍 집을 나서며 내게 무언가 말을 건넸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아내가 무슨 말을 건넸는지는 물을 마시러 나선 주방에 다다라서야 짐작 할 수 있었다. 주방엔 믹서기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엔 회색빛 액체가 가득 들어있었다.

서리태를 갈아놓고 갔구나.

자기 화장하고 옷 챙겨입기도 바빴을 터인데, 아내는 전날 회식으로 과음한 남편을 위해 콩물을 한가득 갈아놓고 나갔다. 와이프가 자신의 시간을 쪼개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놓은것을 볼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난다. 결은 다르지만 나를 케어하는 존재가 어머니에서 아내대물림 된 것 같은 머쓱한 느낌이 든다.

대체로 술을 마신 날 오전은 물만 마시거나 아주 느끼한 것을 먹어왔다. 짜장면, 피자같은 음식들. 하지만 나이 앞 숫자가 4로 곧 바뀌는 이 시점에, 와이프의 콩물은 무언의 강력한 메세지로 다가왔다. 나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라는 공익적 메세지에 반항 할만큼 어리석은 남편이 아니다. 결혼 3년 차, 아내 말 들어 손해볼 것 없다는 진리를 일찍이 깨달은 남편이다.

콩물만 마시기 허전해 면을 삶아 콩국수를 해먹는 것으로 마음이 끌렸다. 집에 소면도, 중면도, 쫄면도 없어서 신라면 하나를 집어들어 면만 꺼내들었다. 면 삶는 시간은 1분 30초라고 하는데, 꼬들한 면을 즐기기위해 1분 10초로 타이머를 맞췄다.

그러고보니 2020년 들어 처음으로 먹는 콩국수다. 매 해 초여름이 되면 회사 앞 중화음식점을 방문했었다. 중화음점 콩국수를 먹음으로 비로소 여름을 맞이한다는 혼자만의 의식을 치뤘던 것 같다. 콩물이 가득 들어있는 스테인레스 그릇을 받아드는 순간 느껴지는 한기는 다가올 여름을 잘 버텨보라는 위로 같기도 했다.

집에는 아쉽게 스테인리스 그릇이 없어서 도자그릇으로 대신 했다. 콩물 양에 비해 라면의 양이 턱없이 부족한 듯 했지만 그것대로 좋았다. 콩국수의 주인공은 고소 담백한 콩물이니까. 전라도 사람은 설탕을 넣어먹는다던데, 어렸을때부터 짭짤한 콩물이 더 좋았기에 찬장에서 굵은소금 한꼬집을 집어 콩국수에 넣었다.

호로록.

면을 먹기 전 국물을 먼저 맛을 본다. 아내가 급하게 간 것인지 알갱이가 군데군데 크게 느껴지긴 했지만, 맛은 훌륭했다. 너무 뻑뻑하지도, 찰랑이지도 않게 콩과 물의 비중을 잘 맞췄다. 면이 라면이라서 서운한 것은 전혀 없었다. 소면은 부드러운 맛으로, 중면은 두툼한 맛으로, 쫄면은 탱탱한 맛으로, 라면은 간편한 맛으로 즐기면 그만인 것이 바로 콩국수다.

간 밤 술이 할퀴고 간 위장을 하얗게 도포해주듯 슬슬 넘어가는 콩국수를 5분도 채 되지 않아 다 먹었다. 담배나 한 대 피러 나갈까 했지만,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거리에 눈이 갔다. 아침부터 부산스러웠을 아내에게 선물 겸 설거지를 해주기로 했다.

콩물 갈았던 믹서통과 도자그릇은 물 한바가지에 다 씻겨내려갔다. 지난 밤 아내가 먹었던 멸치볶음 담았던 접시는 세제를 묻힌 수세미로 한참 닦아야 했다.

설거지를 하면서 요즘의 코로나19 사태로 우리네 골치를 아프게 하는 고민거리들도 콩물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홍보회사인 우리회사의 일감이 줄고 그로인해 위기감이 드는데, 그걸 이겨내보자 간 밤 열린 회식이었다. 그 밤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이 하고 있을 고민 모두가 이렇게 콩물처럼 물 한바가지에 쓸려내려가는 것이었으면...정말 바라고 바라본다.

알고있다. 와이프를 위해, 나를 위해 하고 있는 고민들이 어찌 모두 콩물같을 수 있을까. 수세미 든 손에 힘을 주어 박박 닦아나가다 보면 깨끗한 개수대가 보이듯 인생도 그러지 않을까.


콩국수 먹고 설거지 하다 오만 생각을 다한다. 내일이면 불혹인데, 불혹은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는데.


마흔이 될 자격이 아직은 없음을 주말에 콩국수 먹고 설거지 하며 불현듯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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