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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im Dec 24. 2023

불확실이 자아내는 레퀴엠(Requiem) 3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3. 귓불이 물어뜯긴 채 살아가는 시대     


 사실 팬데믹 이전부터 우리는 간접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독이 든 성배였지만 사람들은 그저 축배의 잔으로만 여긴다. 오늘날 타인의 진정성 있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자신의 포장된 자아만이 SNS 등 가상 세계의 쇼윈도에 진열된다. 모든 정보를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자 그 속에 서린 복잡다단한 누군가의 하루는 묻혀 버린다. 다양한 이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오고 가지 않자, 오롯이 자신의 목소리만 울려 퍼진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누구든지 배격하는 이들이 늘어간다. 포장된 자아가 촉발한 각종 정신의학적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텍스트 속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그들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소년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산다. 다른 사람에게 전혀 마음을 주지 않은 채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그 지식을 빨아들인다. 사이버 공간에서 온갖 정보를 흡입하는 현대인들처럼. 소년을 유일하게 품어주는 공간은 고야스 씨의 도서관뿐이다. 그 도서관은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장소이다. 그러나 도시 벽 너머의 세계는 소년에게 성이 차지 않는다. 그 도시로 가 완전한 고독의 상태에 다다를 때 소년은 숨 쉴 수 있다. 소년을 그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 이는 ‘나’밖에 없다. 소년은 ‘나’의 양 귓불을 물어뜯고 ‘나’와 합일함으로써 도시의 꿈 읽는 자가 된다. 그건 마치 귀가 있으나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에만 천착하는 현대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 순간, 인형이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고개를 뻗어 순식간에 내 귀를 깨물었다. 귓불이 찢어진 줄 알았을 만큼 세게, 깊게, 힘껏. 고통이 실로 격렬했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왜 내 귓불을 그렇게 세게 깨물어야 했을까? / 그렇다, 그건 뚜렷한 열을 품은 각인과도 같다. 한 세계와 또 다른 세계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각인. (660-667쪽)      


 무엇이 비극인지도 모른 채 많은 이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지 않는다. 무라타 사야카는 이들을 ‘편의점 인간’이라고 일컫는다. 편의점 인간들은 사회적 관계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단순 반복되는 삶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해 살아간다. 이들은 여러 나라에서 은둔형 외톨이의 사례로 보고되고, 나아가 사회문제로 간주해 연구까지 진행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실 많은 사람이 편의점 인간의 증상을 토로한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그 증상은 더 심해지고 점점 광범위하게 전파된다. 나 역시 이 증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코로나는 더 이상 치명적인 전염병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그어진 흉터는 갈수록 우리 사회를 잠식해 간다. 귓불을 물어뜯긴 ‘나’-옐로 서브마린 소년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은 너덜너덜해진다.


*4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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