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1.
새 집은 좋지만 이사는 힘들다. 아 보통 힘이 드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월세였기에 계약까지는 쉬웠다. 진짜 문제는 가전과 가구를 들이는 일이었는데, 새로운 세탁기를 구매하고 설치하는 데만 2주가 걸렸다.
2.
이번에 리모델링하면서
세탁기 수전도 전부 교체했어요.
온수 수전까지 달린 집은
이 단지에서 10%도 안 돼요~
계약하는 날 부동산 사장이 말했고, 난 어정쩡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마치 내가 대단한 특혜라도 누리는 것처럼 공사 비용으로 20만 원이나 들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러니까 지금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는 타이밍인가? 세탁기 수전이 두 개인 건 당연한 일이 아니란 말인가? 오피스텔에선 디폴트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구옥에선 모두 옵션이었다. 나는 그저 ‘어쩌면 알뜰 삶음 코스는 꿈꾸지도 못했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10%든 1%든 나는 그 안에 포함되는 럭키걸(?)이라는 뜻이니까.
3.
가전에 무지한 20대 여성이 세탁기를 고르는 방법은 심플했다. 외관이 아름답고 이불 빨래가 가능하며, 100만 원이 넘지 않는 모델이면 충분했다. 조건에 맞는 세탁기를 찾고 주문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0분. 참 좋아진 세상이다. 내친김에 냉장고까지 한큐에 주문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배송을 기다렸다.
4.
여기 우수관이네요? 그럼 설치 못해요
세탁기가 배달 오던 날 설치 기사가 말했고, 나는 당황했다. 아아 미리 알아보지 않았던 게 아니다. 세탁기를 주문하고, 찍어둔 집 사진을 돌려보던 어느 날, 앞 베란다 그림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상함을 감지하고 검색에 나선 결과, 우리 집 세탁기가 들어갈 자리는 우수관이라는 걸 알았다. 더불어 우수관에는 세탁기 설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까지.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집을 보러 가던 날, 부동산에선 당연하게 세탁기 자리로 앞베란다를 보여줬고, 오수관이니 우수관이니 하는 소리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아니 무엇보다 나는 새로 설치한 온수수전을 사용할 수 있는 럭키걸이란 말이다!
바로 부동산에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별일도 아니라는 듯, 다들 그렇게 사용하니, 걱정 말고 세탁기를 주문해도 괜찮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도 ’다들 그렇게 사용하니’라는 문장이 마음에 걸려 관리사무소에도 더블체크를 요청했다. 확인한 결과 앞베란다 수도관은 우수관이 아닌 오수관이라는 답변을 들었고, 그제야 안심한 채로 뉴세탁기를 기다렸다.
관리소에서 오수관이라고 하던데요?
전화 녹음하셨나요? 여긴 딱 보면 알아요.
우수관이고, 우수관에 세탁기 설치하면
세입자분도 집주인분도 벌금 물 수 있어요
5.
관리소는 휴무였고, 급한 대로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지만 그런다고 오수관이 우수관으로 바뀌는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나의 아름다운 세탁기는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고, 솜사탕을 물에 씻어버린 너구리의 심경은 생각보다 더 허망하다는 걸 알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