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미술관(6.25 ~ 8.14), 현재를 유유히 침습하는 영상과 조각들
전시장소: 일민미술관
참여작가: 페드로 코스타(Pedro Costa), 후이 샤페즈(Rui Chafes)
전시기간: 2016.6.25 ~ 8.14
협력: 한국 영상 자료원
일민미술관이 새로운 전시로 찾아왔다. 이번에는 포르투갈 두 거장의 작품 전시다. 거장의 이름은 페드로 코스타와 후이 샤페즈. 한 사람은 영화감독이고 다른 한 사람은 조각가다. 두 사람이 건네는 기억에 대한 물음이 어둠의 장막 아래 서서히 드러난다. 어두운 공간에 독립영화를 투사하고 그것을 간접 조명삼아 조각을 전시한다. 암순응이 끝나는 순간부터 두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2층을 오르는 길에 후이 샤페즈의 조각이 보인다. 실제론 육중하고 단단한 강철이지만 그가 용접하고 휘어 만드는 오브제는 유려하고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 대형 리프트가 사용됐다고 할 정도로 그 대상은 어마어마한 무게를 자랑면서도, 무게감은 형태의 미끈함을 타고 거품처럼 빠져나가버렸다.
조각은 쇳덩이가 주는 육중함 대신 그것만이 전할 수 있는 묵직한 물성만을 담고 있다. 흐르는 물체를 표현하는 방식과 독특한 부풀음 때문에 후이 샤페즈의 작품은 절로 손가락을 대고 싶게 하는 기운이 있다. 대상은 마치 어떤 생물의 세포를 바라보는 듯도. 꿈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 2층 전시실로 눈길을 돌리자.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후이 샤페즈의 대표작 <블랙아웃>이다. 한아름에 안을 수 없게 커다란 검은 구체와 그것을 떠 받들고 늘어진 끈 타래. 두 대상을 아우르는 소재는 모두 강철임에도 두 부분은 서로 다른 질감을 전한다.
그의 작품은 인도 출신의 영국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를 떠올리게 한다. 시카고에서 보았던 <클라우드 게이트>(흔히들 시카고 빈(bean, 콩)이라고 부르는)처럼 부드럽고 미끈한 금속성의 물질. 그리고 그녀가 1990년에 유리섬유(fiberglass)로 만든 <무제>의 질감을 옮겨 놓은 것 같다.
그럼에도 후이 샤페즈와 아니쉬 카푸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히 다르다. 둘 다 금속성 물질을 미끈하게 깎아놓았지만 후이 샤페즈는 철의 물성을, 아니쉬 카푸어는 알루미늄의 반짝거림을 강조함으로써 주제를 부각한다. 여기서 후이 샤페즈는 기억의 바다에서 단단하고 묵직하게 떠오르는 어떤 물질을 구체화한다. 덕분에 그의 조각은 눈 앞에 펼쳐져 있음에도 꿈을 꾸는 것 같고, 감상자가 현실 속에서 추상적인 무엇을 끄집어내도록 부추긴다.
검고 커다란 철제 구를 지탱하고 있는 여러 가닥의 강철 다리는 그것이 구체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시선의 흐름 때문에 다리가 구체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용접부가 불룩하지 않도록 표면을 미끈하게 다듬은 것이 두 부분을 하나처럼, 하나를 두 부분처럼 자연스럽게 보이게 한다. 마치 몸통에 달린 팔이 우리의 것이고, 몸통과 팔을 자연스럽게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둘은 하나의 유기체 안에 종속되면서도 서로 다른 부품이 된다.
전시실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자. 마치 꿈속을 유영하는 듯한 조각이 눈 앞에 가득 찬다. 그 크기는 한눈에 들어오기에 너무 벅차고 한없이 풀어헤쳐 있다.
강철 쇳덩이들이 공간 따윈 의식하지 않는 듯 자유롭게 흩어져 있다. 그 흐름 끝에 응집된 원형의 고리는 어느 방향이든 시작임과 동시에 끝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저 끝 부분을 잇기만 하면 끊임없이 그 크기를 늘렸다 줄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꼬리에 꼬리를 물 수 있는 열린 조각인데, 어디가 머리고 꼬리인지 알 길이 없다.
후이 샤페즈는 일본 하라미술관에서 개최했던 전시에서 작품 제목들의 의미에 대해 "사람 사이에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 영화의 한 장면이 단어 천 개의 가치가 있는 반면, 한 단어는 천 개의 의미를 의미한다. 나의 작품 제목은 관람객에게 시적인 방향성을 제공해야 하며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적인 힘이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한 장면이 천 개의 단어를. 한 단어는 천 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그의 작품과 제목은 천 개의 단어를 부르고, 다시 백만 개의 의미를 형성한다. 그리고 각각의 의미는 또 다른 심상을 만들고, 백만 개의 심상은 각각 천 개의 단어를 불러 모은다. 이것은 작은 점에서 시작된 고동이 무한대로 퍼져나가며 무한대의 장면과 문자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의 조각이 환형의 단말을 가진 채 영원한 확장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너의 손들은 마치 '타자(他者)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보는 것만 같다. 그 손가락은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쳤다. 그래서 그 폭은 가늘지만 끝은 알 수 없이 길다. 손가락은 한없이 하늘거리면서도 단단한 뼈 위에 붙어 있어서 생각보다 몹시 단단하다. 공중을 부유하는 손가락의 비유는 징그럽게 느껴지다가도 내내 몽환적이다.
그의 작품은 어찌 보면 검은색 색지를 예쁘게 오려 휘어놓은 것만 같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그것의 물성은 여전히 쇳덩이다. 강철이다. 머리맡에서 한 점의 흔들림 없도록 강철 와이어로 연결된 조각의 현실과는 다르다. 그 형태가 너무나도 유연하다.
작품은 직접 조명을 사용하여 조명받지 않는다. 대신, 벽면에 빛을 쪼이고 그 반사광을 사용하여 대상을 드러낸다. 이것은 마치 트레펄지로 만든 디퓨저를 방 전체에 투사한 것 같다. 강한 빛은 벽면을 만나 어지럽게 반사하면서 조각의 표면을 더욱 부드럽게 만진다. 꿈을 흐르는 듯한 조각은 감상자가 자신의 상상력을 투영하기에 적합하다. 감상자는 그 대상이 눈 앞에 있음에도 심미적 반응을 일으키며 정신적 굶주림에 서린 채 공상하기 시작한다.
이 조각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자>이다. 가늘게 모인 부분을 허리라 한다면 머리는 숟가락을, 다리 부분은 포크 또는 젓가락을 모아놓은 것만 같다. 제목은 굉장히 명시적이면서도 함축적이다. 명시적이란 이유는 조르조 데 키리코라는 사람을 명백하게 지목한 작품이기 때문이고, 함축적이라 말한 이유는 이 사람의 작업이 시적이기 때문이다.
조르조 데 키리코(1888 ~ 1978)는 이탈리아의 화가다. 그는 일상적 물건을 곳곳에서 떼어내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이러한 작업 형태를 형이상학적 회화(dépaysmant, 데페이즈망)라고 하는데, 이는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초기 단계이다.
결국, 후이 샤페즈가 그의 작품을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자'라고 명시했을 때. 이것은 일상적이지 않은 모든 오브제의 그림자를 응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둔다. 그것은 '숟가락의 머리와 젓가락의 뒷다리'일 수도 있고, 꽃봉오리와 믹서기 날의 조화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조각이 '그림자'를 표현한 것이며, 눈에 뻔하게 들어오는 실체를 '그림자'라 칭해 버림으로써 현실을 부정하는 모순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 조각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처럼 형체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실체를 볼 수 없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후이 샤페즈의 '그림자' 왼편에는 페드로 코스타의 두 개의 영상이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는 다시 후이 샤페즈의 작품이 가로막고 있다. 대립하는 두 작품의 이름은 각각 <불의 딸들>과 <벤투라 알토 쿠텔로>. 작품의 내러티브는 압축의 과정에서 대부분 길을 잃었다. 그러나 무한히 도는 루프와 작품 사이를 가로막는 후이 샤페즈의 조각 그리고 감상자의 관점이 들어갈 자리를 밀어놓고, 확보한다.
<내가 어떻게 떠는지 보라>는 감방의 '잠들지 못하는 독방' 같기도 하면서 고해성사를 주고받는 칸막이 같은 느낌을 준다. 한쪽의 대상은 반대쪽과 통기 구멍으로 소리를 건네고 받을 수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그 대상을 관찰할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방향성이 존재한다기보다 양 방향이 '관음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때문에 어느 방향이든 감상자가 그 방향에 서는 순간부터 감상자는 후이 샤페즈의 렌즈로 페드로 코스타의 작품을 감상하는 모양이 된다. 반대로 페드로 코스타의 작품은 후이 샤페즈의 렌즈로 감상자를 지켜본다. 두 작가가 콜라보로 완성하는 이 공간은 니체의 <선악의 저편> 중 '심연'에 대한 언급을 연상시킨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니체가 이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광기와 비이성을 끌어왔다는 것도 본 전시가 '기억'에서 무엇을 끌어오고자 하는지 다시 한번 재고케 한다. 로맨티시즘의 근간은 이성과 합리, 절대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과 같은 선상에 있고, 모두 인간으로부터 구체화된 개념이다. 아이러니와 체계의 혼재. 후이 샤페즈의 작품 세계가 독일 낭만주의 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까지 한데 모여 버무려진다.
본 글은 일민미술관의 <뮤지엄 리포터 2기>의 활동 기록이며, 일민미술관의 협조를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전시된 작품에 관한 모든 저작권은 일민미술관에 있으며, 사진과 글의 저작권은 작성자(소고)에게 있습니다. 본 포스팅은 비상업적인 용도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세이프 하버 조항에 따라 주관자는 본 콘텐츠 작성자에게 게시 변경, 삭제 요청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