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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Feb 05. 2016

유전자 개이득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보고

지난 주말, 친구와 함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봤다.

디카프리오의 오스카를 향한 열망을 잘 담아낸 이 영화는 미 대륙 개척 시절의 탐욕과 그 탐욕에 맞서는 사람의 감정선을 몹시 사실적이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영화 얘기는 많이 안 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오스카 시상식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오늘은 유전자 이야기가 하고 싶기 때문이다. 참고로 난 리처드 도킨스의 책 세 권 읽어 본 게 전부다.

먼저 유전자 이야기가 왜 하고 싶어 졌는지부터 말해야겠다. 이 영화는 지극히 감정적이다. 이성적이지도, 그렇다고 감성적이지도 않은 감정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감정 깊숙한 곳을 찾아 건드린다. 자연을 매개로, 탐욕을 매개로, 그리고 살육을 매개로 유혈과 비명을 낭자하게 퍼뜨리며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서서히 몰아간다.


아, 빼먹었는데 톰 하디도 나온다.


영화의 전개 방식은 너무나 사냥과 닮아 있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감독이 만들어놓은 포위망이 턱 끝까지 쳐들어왔을 때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영화가 지극히 감정적이었기 때문에 이성적인 감정을 떠올리게 됐다. 마치 "공부해라"하면, 공부가 하기 싫어지는 감정과도 같이.


티벳 스님들이 그런 말을 한대.
'육체는 인간의 정신을 담는 자루 더미에 불과하다'고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저 말을 버릇처럼 하고 다닌다. 저 말의 저의는 외모에 치중한 삶을 살지 말자-와 같은 교훈적인 맥락으로 알고 있다. 외모는 그저 보관함(Container) 일 뿐이고, 그 정신이 발현되는 매개일 뿐이니 우리는 내면을 바라볼 줄 아는 삶을 살자. 뭐 이런 동화 같은 훈육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저 인용구를 다시 생각해보니, '정신'이란 단어를 '유전자'로 환원해서 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육체는 유전자를 담고 다니는  캐리어이며, 인류의 모든 행위들은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잘 전달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무한 경쟁을 한다. 또 무한 상생을 한다. 마지막으로 무한한 성적 관계를 갖는다. 웃긴 이야기지만 사람들이 외모를 가꾸고, 또 이에 반하는 안티 테제(Anti-thesis)로 외모를 가꾸지 않고, 뭐가 유행하고, 또 그 유행이 흘러 다른 것이 유행하는 이유는 모두 매력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그럼 매력을  극대화하면 무엇이 좋으냐 묻는다면, 자기 유전자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꿈의 실현으로 충족되는 '만족감'이나,  '자아실현'과 같은 말들은 <유전자 전달>이라는 인류의 본능적 목적성을 부드럽게(인간답게) 순화하고 표현하기 위한 학습된 감정이며, 이러한 순화된 표현 역시도 자신의 유전자가 젠틀하고, 좋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어필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지하철 민폐녀가 민폐가 아니게 되는 이유는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보는 이를 관음적으로 만들어버리는 뭔가가 있다.


무한 경쟁하면 또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자본주의다. 자본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여러 요소가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론 (자본주의가) 유전자의 긍정적인 발현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이 더 나은 삶의 질을 얻을 수 있게 노력하게 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풍족한 삶의 길을 열어주는 자본주의 경제 체체가 유전자에게 소위 '개이득'인 것이다.


이러한 나의 주장에 대해서 반박하고자 한다면 굉장히 많은 근거를 댈 수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먼저 한국의 <출산 기피 현상>에 대해서 해명해야 할 것이다. 글쎄, "유전자가 한국 땅에서 발현되기 싫다"는 말로 편하게 해석하면 너무 제멋대로 한 말이라고 돌을 던지려나? 필자의 대답이 황당한 거, 잘 안다. 필자도 지금 이 말을 적으면서 빙글빙글 웃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가 이 땅에서는 유전자가 전달되는 것이 생존에 불리하기 때문이라니. (웃음) 이유 같지 않으면서도 왠지 근거를 댈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무얼까.



일부일처제(monogamy)는 '자신의' 유전자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합리적인 방식이다. 진정한 '해방과 번성'이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일부다처제 혹은 다부일처제(polygamy)를 선호할지도 모른다. (이 역시도 유전자 관점에서 합리적이다) 어떤 이는 자유 연애주의야말로 인간 사랑의 참모습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일부일처제가 제도적으로 규제된 나라는 20% 내외일 뿐이라고 말하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를 구속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필자는 저 발언에 어느 정도 동조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다자 연애가 필자의 것은 아닌 듯 싶다. 민감한 주제이기에 조금 더 당부의 말씀을 드리자면,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너 역시도 똑똑한  척하면서 남들이랑 똑같다' 같이 생각하지는 않길 바란다. 한 집단의 기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결론이 같다고 해서, 다자 연애에  손가락질하는 사람들과 동급 취급을 한다면, 이는 마치 폴리 가미(polygamy)나 자유연애주의자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줄 모르는 감정 들개'라고 싸잡아 표현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건 아니지 않나. 나는 다름을 인정한다. 다만, 내 것이 아닐 뿐이다. (이런 통속적인 말이 주는 근거 없는 안도감이란)


한동안은 이러한 '유전자의 목적성'에 푹 빠져 지낼 것 같다. 몰입에 이유를 찾는 것도, 휴식에 이유를 붙이는 것도, 그리고 사람을 만나는 목적과 이유를 대기에 참으로 간편하기 때문이다.

유전자, 이 얼마나 편리한 합리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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