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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Feb 05. 2016

"너는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야"

영화 <캐롤> 이야기

[스포일러 주의]: 영화를 보신 분들만 감상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넌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야
- 캐롤이 테베즈에게 사랑을 나누며 건네는 말


 사람의 사랑은 불안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를 바라볼 때를 제외하고는 불규칙적으로 흔들린다. 영화 <캐롤>은 여성간 사랑을 그린다. 둘은 우연한 만남에 끌려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다른 평범한 사랑들 처럼 안정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에게 한시적인 행복조차 허락지 않는다.

그들이 안정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허락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대로 성 정체성에 관한 어떤 것도 대중화되어 있지 않은 시기였다. 동성 간의 사랑은 금기였고, 성 지향성이 대중적 언어로 형성된 시기가 아니었다. 게이나 레즈비언, 그리고 동성애라는 단어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의 사랑이 규정되지(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 이리저리 부유할 것을 시사한다. 캐롤과 테베즈가 게이라는 관념이 형성된 사회에 살았더라면 행복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들이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로를 향한 애정뿐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다. 감정은 바람 앞에 촛불처럼 불안하다는 것을. 그것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것은 첫째가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반석 위에 결혼, 애인과 같은 단어로 표현된 공통 관념을 쌓아 올린다. 단어는 관념을 형성한다. 서로가 교감할 수 있는 언어가 형성되지 않은 관계는 반석뿐인 집과 같다. 둘은 아주 단단한 반석 위에 섰지만 바람과 비를 막을 순 없었다.



서로를 사랑하고 지켜야 하는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애정과 믿음 말고는 달리 의지 할 곳이 없다. 캐롤과 테베즈가 계속해서 불안에 떠는 이유다. 자기들이 하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동성애라는 관념 형성에 관하여 페이스북 Nara Lee님께서 적어주신 코멘트 일부를 가져온다. 아래는 영화 <여왕에게 작별을Les Adieux à la Reine Bande-annonce>(2012)에 대한 언급이다.


여든이 넘은 시아버지가 우연히 이 영화(여왕에게 작별을)를 보고 왔다.
(...)
"아버님, 그녀는 레즈비언이잖아요. 놀라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었는데 아버님은 "레즈비언? 왜 레즈비언이야? 둘이 키스를 했다고 레즈비언이라고? "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남편이 나를 옆에서 쿡쿡 찔렀다. 동성애라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 담론이 되기 이전 세대인 아버지 세대의 사람들은 동성 간의 다소 미묘한 관계를 굳이 동성애라고 규정하거나 의심하지 못한다고. 이건 아주 흔한 일이라고. 군대나 운동선수생활 등 동성만이 모인 곳에서는 많은 미묘하고 우애를 넘어서는 일들이 있지만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것을 동성애라고 "규정"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거나 비정상이라고 벌하였던 것이라고.
우리가 느꼈던 여고시절의 막연한 애틋함은 동성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그러한 것처럼. 이것은 "동성애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아니라 "동성애라는 관계에 대한 사회적 규정과 관념은 '역사적'으로 마련되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동성애 혐오가 서구 사회에 유래가 깊었다고 하더라고 동성애라는 것이 일반의 사람들에게 특정한 관념을 형성한 것은 또 다른 역사를 갖는다. 역사 속에서 어떤 현상은 명명되고, 현상으로 규정되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와 반대, 대충의 인상들이 부가된다. 오랫동안 동성애라는 것은 꽤 막연한ㅡ 당연히 실재했으나 많은 이들은 뚜렷이 '인지'하지 못하는 무엇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영화는 이렇다 할 설명이 없다. 단서만 수없이 흘릴 뿐이다. 시선을 표현하고 떨리는 감정을 잡는다.


다시 <캐롤>로 돌아오자.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구조적으로 어떤것도 완성된 것이 없는 사회를 그리기 때문이다. 1950년대 미국은 둘의 사랑에 대해 이렇다할 라벨(label)을 붙이지 않는다. "너 레즈비언이야?"하지 않는다. 대신, "너 여자를 좋아해?"하고 묻는다. 1950년대의 형성되지 못한 언어 관념 때문이다. 그저 단서만 수없이 흘린다. 시선을 표현하고, 떨리는 감정만을 잡아낸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둘은 점점 서로를 의지하고 있으며, 사랑하게 되는구나-라는 것 뿐이다. 감독은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테베즈는 19살이다. 우리 나이 열아홉이면 고3이다. 아직 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만한 나이다. 영화가 중반쯤 흘렀을 때, 그녀는 자신이 거부할 줄 모르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다. 고백에 거절을 못하고, 주는 대로 다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영화 마지막쯤에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의 키스를 거부한 것은 겁이 난 것이 아니라고 확실히 대답한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된다. 테레즈가 캐롤을 찾아가는 장면은 사랑을 스스로 선택하는 장면이다. 감히 최고의 엔딩이라 말하고 싶다.


Rehearsal of the scene, Edgar Degas (1872)

영화는 한 폭의 파스텔화 같다. 파스텔은 몽환적이고 흐릿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소재다. 그러나 드가(Edgar Degas)는 이러한 파스텔의 재질적 특성을 역이용한다. 색을 대조시키고, 명암을 분명히 함으로써 자신의 색깔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부드러워 보이는 것이 표현을 분명히 할 때면 더욱 눈에 띄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 이상의 것을 접하면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관찰한다. 영화의 미장셴은 부드럽지만 애정의 색깔은 진하다.

이 영화를 어떻게 규정지어도 좋다. 발화 시점 이후부터는 모두 당신의 생각이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이 그렇고, SF작가 듀나의 언어도 그렇다. 영화 이후의 평가와 논함은 당신의 세계이고, 당신의 표현이다. 아무것도 정의하지 않은 영화는 상상의 자유를 허한다.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장미라는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고. 그 향기가 무엇을 떠올리게 하기에 당신이 이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지 들어보고 싶다. 발화에 자유가 있듯 평론의 동조에도 자유가 있다는 것만 기억하자. 시비(是非, 옳고 그름)는 조금 나중에 찾아보자. 이 영화, 오늘 개봉했다.(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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