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 번역선
이 칼럼은 Artsy News의 존 만(John Mann) 칼럼(원제: How the Futurists Used Art to Fuel Facism)의 번역입니다.
미래파는 경솔하고, 정력적이고, 전투적입니다. 이들은 1909년 이탈리아의 시인 필리포 토 마소 마리네티(Marinetti)가 <미래파의 설립과 선언>이라는 기사를 프랑스 신문인 르 피가로(Le Figaro) 일면에 싣는 것으로 그 시작을 알렸습니다. 마리네티는 이 기사에서 다트를 던지는 것처럼 확고한 어조를 사용하여 근대성(modernity)과 속도, 폭력, 전쟁, 그리고 기계를 찬사 하는 선언문을 완성합니다.
몇 년 후, 마리네티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 영역을 넓혀 회화, 조각, 건축, 사진, 시, 패션, 음악, 연극, 무용, 타이포그래피 및 인테리어 디자인까지 거의 모든 예술 분야를 아우르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합니다. 이들은 스스로에게 미래파(Futurism)라는 이름을 부여합니다. 미래파는 러시아와 영국 예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예술과 삶의 대한 주장은 너무나 강력한 나머지 이탈리아 정치, 그중에서도 파시스트에게까지 흘러들어가 이탈리아 내 혼란을 초래하였고, 20세기 아방가르드 운동의 시초가 됩니다.
1908년, 마리네티는 밀라노 교외에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전거가 갑자기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고, 마리네티는 급하게 핸들을 꺾으면서 도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자동차는 완전히 박살 났지만, 이 기이한 경험이 마리네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도랑에서 빠져나온 그는 그는 속도의 황홀경에 취해버렸고, 빠른 속력을 열렬히 신봉하게 되었으며, (퇴폐주의라 번역되기도 하는) 데카당스의 허위의식을 깨닫습니다. 그는 낡은 자전거가 현대 자동차에게 돌진하는 모습, 그러니까 노스탤지어와 전통이라 불리는 것들을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모습이 미래파의 메타포와 잘 맞아떨어진다 생각합니다. 이후 그는 급진적이고, 허풍이 많으며 격정적인 글을 남기는데, 그가 쓴 <미래파 설립과 선언>에서 그의 광기가 잘 드러납니다. "정상 위에 올라, 더 높이 있는 것을 향해 비판을!"
1910년 1월, 젊은 예술가인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 카를로 카라(Carlo Carrà), 그리고 루이지 러소로(Luigi Russolo)는 마리네티와 함께 초기 미래파 대열에 합류합니다. 이들은 마리네티가 창안한 미래파란 개념이 그가 추구하던 문학적 목표 그 이상의 것을 성취할 수 있을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이후 세 사람은 <미래파 화가의 선언>을 작성하였고, 마리네티는 이를 편집합니다. 이것은 미술계 동료인 지노 스베리니(Gino Severini)와 지아코모 발라(Giacomo Balla)에게 전해졌고, 이들은 다시 미래파의 철학이 시각 예술 면에서 영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학문적 토대를 마련합니다.
미래파는 공통적으로 젊었고, 과학과 철학 최신 동향에 정통했으며, 항공 산업과 초기 영화 예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미래파의 예술적 동향은 카라(Carrà)의 <Pizza del Duomo(1909-109)>와 보치오니의 초기 미래파 작품인 <The City Rises (1910)>에서 그 특성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미래파 화가들은 1912년 파리로 여행을 하다가 프랑스 큐비스트(Cubists)들과 조우합니다. 이들은 곧 큐비스트의 작업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합니다. 보치오니는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그리고 후기 인상주의자인 폴 세잔의 기법인 파사주-작은 조각 형상과 패치워크를 조합하는 기술-를 그들의 기법으로 차용합니다. 밀라노로 돌아온 보치오니가 완성한 <축구 선수의 역동성(Dynamism of a Soccer Player (1913)>에는 초기에 그가 빠져 있었던 모호성과 파편성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작품은 힘과 동작에 중점을 둔 추상적 표현이 도드라집니다. 이러한 스타일은 후에 미래파의 작업 기반이 됩니다.
1912년, 미래파 스타일은 두 가지 영역에서 자신들의 예술적 근간을 마련합니다. 하나는 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조각입니다. 문학 영역은 마리네티의 <미래파의 문학 기술>에서, 조각은 보치오니의 <미래파의 조각 기술>에 그 내용이 상세히 드러납니다. 보치오니는 이 선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만약 조각 오브제가 주변 환경과 힘에 협응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미완성 작품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20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이코닉한 조각 하나(아래)를 완성하게 합니다.
1913년, 보치오니는 <공간에서 연속성의 독특한 형태(With Unique Forms of Continuity in Space) (1913)>라는 동상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입체 미래파(Cubo-Futurist)"라는 개념을 창안합니다. 이 직립 동상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듯한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차 세계 대전을 상징하는 작품일 뿐 아니라 이탈리아가 현대 예술을 시작했다는 알레고리로 해석됩니다. 이작품의 얼굴과 가슴 부위는 크게 함몰되어 있는데, 이것은 과거 예술 작품들이 자신의 본체를 유지하던 것과 크게 대조적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저항하는 힘을 상징합니다. 마리네티는 1909년 한 선언에서 "격정적인 숨을 뿜어내는 뱀 같이 생긴 커다란 튜브가 달린 보닛을 가진 경주용 자동차는 사모트라케 승리의 여신(Winged Victory of Samothrace) (ca. 190 BCE) 보다 더 아름답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당시 미래파가 추구하는 면이 온전히 드러난다 할 수 있습니다. 미래파는 전통적 가치를 거부하고, 그것을 증류하여 새로운 동력원으로 삼았습니다. 니케의 여성스러운 날갯짓과 굳건히 땅을 지지하던 다리는 강력한 군인의 달음박질과 공간의 왜곡을 통해 새로 태어납니다.
지아코모 발라는 미래파의 철학을 의류로서 한층 더 높은 경지에 올려놓습니다. 그는 1914년 9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그 해에 "반 중립 슈트(Anti-neutral suit, 1918)"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밝은 오렌지 컬러와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진 남성복입니다. 포투나토 데페로(Fortunato Depero) 또한 1915년에 <미래파의 우주 재건(Futurist Reconstruction of the Universe)>이라는 문학을 발표합니다. 이것은 미래파의 미감을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즉, 미래파는 삶의 모든 측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했습니다.
마리네티는 이탈리아가 세계 1차 대전의 중재 과정을 통해 유럽의 인정을 얻길 바랐습니다. 그는 "우리는 성전을 추구한다. 성전은 곧 세계의 정화이고, 군국주의, 애국주의이며, 무정부주의자들의 파괴적인 행동"이라 말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습니다.
마리네티는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보치오니를 포함한 많은 미래파들은 군에 입대했죠. 그러나 전쟁은 미래파의 바람처럼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1916년, 보치오니는 군사 훈련을 받던 중 사망했고, 그의 예술 이론은 전후 미래파(post-war Futurism)로 갈수록 흐릿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탈리아는 세계 대전 후 정의의 편에 있었음에도 약속했던 땅을 받지 못합니다.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동맹인 삼국 협상(Triple Entente)이 이탈리아의 발목을 잡은 것이죠.
결국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큰 손실을 입습니다. 전쟁이 상처뿐인 영광으로 남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시민들을 현혹하고, 20년 간 파시스트 독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분위기를 연성합니다. 파시즘과 미래파는 많은 유사성이 있었습니다. 둘 다 전쟁과 폭력을 숭배했고, 이것을 이탈리아의 최우선 가치로 삼았습니다. 무솔리니 정권 아래, 마리네티는 기회주의적 수단으로 미래파를 사용합니다. 미래파 운동을 파시스트 프로토 타입의 운동인 양 그들의 사고를 홍보하고 나섰습니다. 이것은 파시스트 당 내에서 그의 예술 활동을 보장받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세계 대전 간 등장한 세 명의 독재자(아돌프 히틀러, 조세프 스탈린, 무솔리니) 중 무솔리니는 예술을 사람들을 현혹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있어 가장 도드라진 사람으로 남습니다. 예술이 자신들의 사상을 홍보하는 데 사용되기만 하면, 이 일 두체(Il Duce, 파시스트 당수, 무솔리니의 칭호)는 예술의 범위를 제제하지 않았습니다. 미래파는 이 시기(1909-1906)에 두 번째 부흥을 맞게 되는데, 이들은 '세 번째 로마'라는 구호 아래 기술적 진보를 추구했으며, 이러한 창조적 활동은 마리네티의 죽음 직전인 1944년 12월까지 계속됩니다.
1920년과 1930년대 사이, 무솔리니 독재 기간 동안, 미래파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예술 세계를 구축합니다. <안테나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의 통합(Synthesis of Aerial Communication) (1933-4)>(아래)은 다섯 개의 벽화 연작 중 하나로, 공공건물에 그려진 벽화입니다. 이것은 마리네티의 아내인 베네데타(Benedetta)가 그렸습니다. 이러한 작품은 아에로피투라(aeropittura) 또는 외광파(air-painting)이라고도 불리는데, 하늘에서 전투기를 타고 대지를 바라보는듯한 속도감과 역동적인 지형이 드라나는 그림을 일컫습니다.
미래파가 정치적 이론과 철학적 토대를 체계적으로 완성한 덕분에 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이들의 개념과 생각을 세부적으로 해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래파는 허풍이라던가 안티-페미니스트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많은 여성 시인들과 예술가를 고용하였는데, 이것은 마리네티가 여성들이 전통적 여성의 역할을 수행할 권리를 거부하는 것에 어느 정도(파괴와 폭력) 동조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래파는 시 영역에서 새로운 스타일을 창안하는데, 이것은 전투적으로 열변을 토하는 서술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양식은 20세기 행위 예술(performing art)을 정의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다다이스트인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 안토닌 아투아(Antonin Artaud)의 <잔혹한 극장(Theatre of Cruelty)>, 그리고 엔리코 프람 폴리니(Enrico Prampolini)는 미래파의 두 번째 물결을 통해 다형-물질주의(polymaterialism)를 발전시켰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새로운 장르를 섞음으로써 초현실주의 멀티미디어 아트의 초류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미래파, 마리네티가 사용한 대중매체의 조작과 개입은 예술가들의 시각을 예술 자체에서 팝 컬처로 돌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1915년에 발표한 그의 선언문에 드러납니다. "수십만 권의 성명서와 책, 그리고 팸플릿이 세계의 모든 언어로 쓰였다. 수 없이 많은 주먹과, 격동, 그리고 800편 이상의 문학, 전시, 콘서트를 통해 우리는 전 세계에 산포 한 다른 어떤 인종들보다 더 우월하고, 창조적이며, 혁명적인 인종임을 드러냅니다" 이렇듯 미래파는 정치적 목적으로 자신들의 예술을 사용하였고, 그 끝이 좋았다고 평할 할 순 없겠으나, 그 과정과 후대 양식에 이르기까지 파격적이고 도드라진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