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 수필선
초등학생일 적에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었다. 오늘은 비가 온다며 엄마가 책가방에 꽂아준 2단 우산. 나는 우산이 있어도 그것을 그대로 가방에 넣어두고 비를 맞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며 귀가했다. “레인 드랍스 폴링 온 마이 헤드”. 어렸던 나는 친구들과 하굣길 언덕을 뛰 내려오며 열 오른 몸이 빗물에 식는 기분을 즐겼다. 그때 흥얼거렸던 곡은 어떤 광고의 CM 송이었다. 광고 음악은 짧았고, 내 기억력은 없는 곡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빗길은 광고 노래보다 길었다. 그래서 나는 길게 남은 길을 “나나나나 나”하는 콧노래와 도돌이표로 꽉꽉 채웠다.
중 고등학생을 보내면서 나는 비가 싫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사춘기를 보내면서 모든 신경이 예민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내 몸을 만지거나 스치는 모든 감각에 짜증이 났다. 그런 내게 무작위로 나의 옷 위에 내려앉아 축축하게 적시는 빗물이 반가울 리 없었다. 나는 그것이 무례하고 지저분한 것이라고 여겼다. 사람에게도 그랬던 것 같다. 봄비처럼 촉촉한 인연이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그 손을 보지 않은 체 하며 잡지 않았다. 소낙비처럼 산뜻한 인연이 나를 불러도, 나는 “혼자 있고 싶어.” 하고 당신의 부름에 맞받아쳤다. 나는 비가 나를 건드리는 일이 없기를, 그리고 당신도 나를 찾지 않아주기를. 그리하여 어떠한 자극도, 슬픔도 일지 않기를 바랐다.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비는 쉬이 좋아지지 않았다. 빗물이 땅에 닿으면서 터지는 울음이, 아스팔트 위로 물이 곱게 갈리는 소리가, 비를 피해 들어간 차양막 틈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 정수리에 고였다가 이마로 흐르면서 생기는 물길이 성가셨다. 좁은 인도 위로 자꾸만 부딪히는 서울 사람들의 우산이 무정했다. 택시를 타면, 우산을 접고 몸이 들어갈 때쯤 가죽 시트 위에 흥건하게 젖은 빗물과 기사님이 야속했다.
그래서 나는 비가 내릴 때마다 실내를 향해 잰걸음을 걸었다. 개인적으로 발견한 비 오는 날 기분을 망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나는 평화로이 방 안을 거닐으며 빗소리를 즐길 수 있었다. 약속을 만들지 않으면, 물웅덩이에 호를 그려나가는 빗방울의 지문을 마음껏 감상할 수가 있었다. 에펠탑을 싫어했던 모파상은 매일 에펠탑 속에서 밥을 먹었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비를 피해서 방문을 꼭꼭 걸어잠갔다.
돌아보면 모두 강퍅하고 어려운 마음 때문이었다. 그 시절 나는 항상 시간이 없었다. 스프린트를 뛰는 선수의 트랙에 풀꽃은 잡초였다. 가뿐 호흡은 잠을 청할 때만이 비로소 잦아들 수 있었다. 득 실을 교환하거나, 목적 뿐인 만남에 바람과, 눈, 그리고 비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느린 호흡이 돌고 마음에 볕이 들고 난 뒤에야, 나는 비를 용서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진실은, 비가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니, 내가 비에게 용서를 구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 시절 내가 깨달은 사실은 옷에 젖은 빗물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게 된다는 것과, 누구를 만나든지 그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두 사람이 함께 노력하는 것이 날씨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리도 상투적인 말을 하기까지 삼십 년이나 걸렸다.
산책길 위를 걸으며 맞는 비가 싫지 않았다. 나의 팔 위로 얕게 쌓이는 물기는 반가웁고, 걸음과 침묵 사이를 곡조처럼 채우는 빗소리가 평화로웠다. 홀로 걷는 빗길도, 처마 갈퀴 아래의 빗물도 이제는 마음에 천천히 담을 수가 있다.
뽀얀 먼지 때문에 마냥 봄인 줄만 알았는데. 비가 내리고 먼지가 걷히니, 채도가 낮아진 서울 도심에는 초록빛 물결이 더욱 드러난다. 나는 습기 찬 버스 안에서 손바닥으로 창을 닦고, 바깥쪽 창가에 맺힌 빗방울과 도심이 뒤섞인 풍경을 바라본다. 종종걸음으로 걷는 노인, 한 우산 아래 사랑하는 두 사람. 고무장화를 신고, 우비를 입어 웃음이 잔뜩인 어린아이까지. 미워할 이가 너무 많아서 날씨에까지 역정을 내던 이의 눈에서 분노의 비늘이 벗겨졌더니, 비가 내리는 날엔 비가 내리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