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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Feb 21. 2016

한 서울대생의 유서와 자살

알베르 카뮈 <전락>



때때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말을 한다.
때때로 그는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방에게,
일종의 재판관에게 말을 건넨다
- 크로트카이아Krotkaia


"제 유서를 퍼뜨려 주세요."

한 서울대생이 자살했다. 자신의 수저 색깔(자신이 자란 집의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금/은/동/흙 수저로 비유하는 것)을 말하며 메탄올을 마셨다. '수저' 논리가 싫다, 식상하다, 혹은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쯤 이 학생의 글이 나왔다. 돌고 돌던 글은 결국 나의 소셜미디어 타임라인에까지 배달됐다. 전문을 찬찬히 읽었다. 처음 이 사건에 대해서 말을 들은 것은 친구들이 7명 쯤 있는 단톡 방(단체 카카오톡 채팅 방)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다 했고, 이 이야기를 전한 친구는 굉장히 쌉쌀해했다. 친구의 기분을 이해하고 싶었다. 전문을 찬찬히 다시 읽었다. 텁텁한 기운이 목을 타고 가닥가닥 기어올라왔다.



생존 결정하는 건 수저색, JTBC 뉴스룸, 2015년 12월 18일 자 방송


뉴스를 보고, 기사를 읽었다. 댓글도 모두 읽었다. 다행히도 고인의 지난 삶이나 끊은 목숨에 대한 조롱은 보이지 않았다. '유서를 퍼뜨리는 것'이 베르테르 효과(모방 자살)를 부를 것이고 이것 때문에 그의 유서를 퍼뜨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논설도 한 토막 읽었다. 댓글 중 하나가 나를 불렀다. "카뮈의 전락이 생각나네요."

이제는 어디서 읽었는지 조차 생각나지 않는 저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도서관에서 카뮈의 <이방인>과 <전락>을 빌렸다. 댓글을 쓴 사람의 저의를 파악하고 싶었다. 당신의 무엇이 카뮈를 떠올리게 한 것인지, 또 왜 하필 <전락>인지 묻고 싶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프랑스 문학가. 1월 4일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전락>의 주인공은 '클라망스'다. 그는 아주 수다스러운 변호사다. <전락>은 클라망스가 자신에 대하여 약 200페이지 정도를 쉴 새 없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자술(自述)의 목적은 자신의 이중성에 대한 고발이다. 그리고 클라망스의 이중성은 본인을 극단으로 몰아붙이면서 서서히 드러난다. 엉일반적인 논리는 결코 극단적 상황을 수용할 수 없다. 모순이 드러난다. 그러나 클라망스는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모순 아래서, 클라망스는 겸허하게 그 모순을 받아들인다.


아래는 도서출판 '책세상'의 <전락>에 있는 해설 일부다.


"그는 자신이 '이중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중략) 우리도 잘 아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크레타 사람이 모든 크레타인은 다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하는 논리 말이다. 클라망스 그가 몰두하고 있는 놀이 속에서는 어느 면 그런 지적인 곡예가 보인다.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일종의 사기행위다.
<전락> 해설 가운데서


Homeless children play a card game on a Paris sidewalk during World War II CORBIS, 월스트리트저널, 15/10/30


자살한 서울대생의 유서에도 이런 부분이 언뜻 보였다.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붙여가며 자살이라는 것을 하나의 해방구로 여기는 모습이나 '남은 사람들'이 자신을 자살로  몰아붙였는데, **를 좋은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 그렇다.

인간이 관계에 논리를 들이대고, 그 논리가 극단을 달리면 허점이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과학은 이를 '변인 통제'라는 이름으로 미연에 그 반박을 방지하지만  인간관계에 어디 통제될 수 있는 것이 있으며, 같은 상황에 처한 모두가 같은 행동을 하리란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오늘 이 학생의 유언장이 가진 모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서술을 하면서 본인의 음울한 삶을 몹시도 타인의 것인 양 담담하게 묘사한다. 도움을 요청하는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기와 논조에 관련 없이 그의 불우한 삶에 대한 묘사는 우리에게 도움을 생각게 한다. 그가 나를 자살을 방조 혹은 교사한 사람으로, '남은 사람들'로 묘사했을 때, 내가 크게 반박하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다. 나는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지도, 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에게 선택받지 못했다. 생의 단절로부터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


Life of Pix, 2015년 10월 27일자


이 학생은 사회비판적인 글을 남겼다. 논조도 <전락>과 닮았다. 그러나 카뮈는 현실적인 글을 쓰는 문학가는 아니었다. 카뮈는 <전락>은 실존주의적인 글이 아니라고 밝힌다. 카뮈는 사르트르와 함께 자신이 동시대를 다루는(실존주의적) 글을 쓴다는 평가를 부인했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실존주의: 그들이 자기 자신을 고발할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붓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확신해도 좋다. 재판관 겸 참회자들 아닌가.
- 플레야드판 카뮈 전집 제1권, p.2010


클라망스는 <전락>에서 "자신에 대한 감옥을 만든 뒤에야 타인을 감옥에 넣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다른 사람이 유죄임을 증명하는 증인은 많으나 무죄임을 증명하는 사람은 많지 않음은 이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이 생각난다. 서울대생은 '본인을 부끄럽게 하는 것은 자신'이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이 사회'라며 책망의 손가락을 양쪽으로 폈다. 그의 '이제 그만 꺾일 때도 됐다'는 표현에 말문이 막히는 것은 그의 비판이 바깥 사회를 가리킴과 동시에 자신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도 잘못했지만 이런 시스템 속 자신도 잘못이 있다 말한다. 만일 필자의 친구가 같은 말로 자신의 고통을 술회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 말 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미안하다."


카라 꽃 / 꽃말은 순결, 천년의 사랑, 열정이다


<전락>에서 클라망스의 발화 대상은 변호사로 추정되는 제삼의 인물이다. 소설 마지막에서 클라망스는 자신과 그 대상이 서로 닮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때문에 그가 서사에 더욱 정직해질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가 논리가 막힘에도 말을 아끼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청자와의 동질감 때문이다. 우리가 '꺾여버린 서울대의 꽃'에게 미안함과 침묵으로 통감할 수 있는 건, 그가 본인의 글을 읽는 이들. 즉, 독자를 본인과 같은. 아니 본인과 비슷한 수준의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며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이야기를 마무리짓자. 카뮈가 실존주의자들을 가장 격렬하게 공격할 때 그들에게 한 말이 있다. "그들의 유일한 변명은 이 끔찍한 시대다"라는 표현이다. '서울대의 꺾인 꽃'은 실존적인 글을 썼다. 그러나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대를 안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끌어안은 시대는 그의 생각보다 너무나도 그 덩어리가 크고, 질감은 거칠거칠했으며, 표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여기까지 쓰다가 잠깐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눈물이 흘렀다. 부인하지 않겠다.

아래 사진은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했을 직후 토마스 훱커(Thomas Hoepker)가 찍은 사진이다. 브루클린에서 월스트리트 방향으로 찍은 사진에서 사람들은 태평하게 신이 허락한 오늘을 누리고 있다. 필자 역시 그렇다. 이 글 전에는 즐거운 글이 가득했고, 후에도 가득할 것이다. 언제까지고 그를 애도하면서 슬픔에 젖어있을 순 없는 일이다.

이른바 '산 사람의 모순'이다. 우린 그에게 선택받지 못했고, 누구도 허락하지 않은 오늘을 살고 있다.


USA. 2001. Brooklyn, New York. September 11, 2001. Thomas Hoepker, Magnum Photo


서울대생의 유서 전문:


제 유서를 퍼뜨려 주세요.

**이 형이 딱 이맘때에 떠난 것 같아서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이군요. 생명과학부 12 월 18 일엔 뭔가 있나 봅니다. 저도 형을 따라가려고요.

힘들고 부끄러운 20 년이었습니다. 저를 힘들게 만든 건 이 사회고, 저를 부끄럽게 만든 건 제 자신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더 이상 힘들고 부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지금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죽으면 안 된다.” 엄마도 친구도 그러더군요. 하지만 이는 저더러 빨리 죽으라는 과격한 표현에 불과합니다. 저를 힘들게 만든 게 누구입니까. 이 사회, 그리고 이를 구성하는 ‘남은 사람들’입니다.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 하고, 나를 괴롭힌 그들을 위해서 죽지 못하다니요.

또 죽는다는 것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비합리적인 일은 아닙니다. 이걸 주제로 쓴 글이 ‘글쓰기의 기초’ 수업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제 유서에 써도 괜찮은 내용일 겁니다. 제가 아는 경우에 대해서, 자살은 삶의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클 때 일어납니다. 다분히 경제적인 사고의 소산입니다.

말이야 이렇게 했지만, 그렇다고 저를 너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보지는 말아 주십시오. 20년이나 세상에 꺾이지 않고 살 수 있던 건 저와 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아직 날갯짓 한 번 못 한 제가 아까워 잠실대교에서 발걸음을 돌렸고, 제가 떠나면 가슴  아파할 동생과 친구들을 위해 옥상에서 내려온 게 수 차례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힘이 듭니다. 동시에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제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분노가 너무 큰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이만 꺾일 때도 됐습니다.

무엇이 저를 이리 힘들게 했을까요

제가 일생동안 추구했던 가치는 합리입니다. 저는 합리를 논리 연산의 결과라 생각합니다. 어느 행위가 합리적이라 판단하는 것은 여러 논리에서 합리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합리는 저의 합리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그걸 비합리라고 재단할 수 있는가 하면 또 아닙니다. 그것들도 엄밀히 논리의 소산입니다. 먼저 태어난 자,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이 이 사회의 합리입니다. 제 개인적으론 비합리라 여길 수 있어도 사회에서는 그 비합리가 모범답안입니다.

저와는 너무도 다른 이 세상에서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좋은 기억이 없는 건 아닙니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꼽으라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작년 가을에 무작정 여권 하나 들고 홀로 일본을 갔다 온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번에 제주도에서 돌아온 다음 날의 일입니다. 즐거운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보통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날 들은 수업은 너무나도 흥미로웠습니다. 먼저 생물학 시간에 인간과 미생물의 상호관계를 배우고 너무나  감명받았습니다. 인간과 미생물은 정말 넓은 분야에 깊게  상호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연달아 있는 서양사 수업에서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배웠습니다. 유물론적 사관에 익숙한 저에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8 동을 나오는 길에 든 생각이 잠자리까지 이어졌습니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학문을 하는 것은 정신적 귀족이 되는 것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때만큼은 제가 그 정신적 귀족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서로 수저 색깔을 논하는 이 세상에서 저는 독야청청 ‘금전두엽’을 가진  듯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금전두엽을 가지지도 못했으며,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전두엽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군요.

맛있는 걸 먹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목이 너무 말라 맥주를 찾았지만 필스너우르켈은 없고 기네스뿐이어서 관뒀습니다. 처갓집 양념치킨을 먹고 싶지만 먹으면 메탄올의 흡수 속도가 떨어질까 봐 먹지 못하겠네요.

혹시 제가 실패하더라도 저는 여러분을 볼 수 없을 겁니다. 눈을 잃게 되거든요. 오셔서 손이나 잡고 위로해 주십시오. 많이 힘들 겁니다.

제가 성공한다면 억지로라도 기뻐해 주세요. 저는 그토록 바라던 걸 이뤘고 고통에서 해방됐습니다. 그리고 오셔서 부조 좀 해 주세요. 사랑하는 우리 동생 **이가 닭다리 하나나 더 뜯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마지막으론 감사를 전해야겠습니다. 우울증은 상담치료와 약물치료로 완화됩니다. 상담치료로썬 환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도 있지만 ‘실질적’인 위로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거도 없는 ‘다 잘 될 거야’ 식의 위로는 오히려 독입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으로  괴로워할 때 저런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실질적인 위안이 된 사람으로 둘이 기억나네요. 하나는 **누나입니다. “힘들 때 전화해, 우리 가까이 살잖아.” 이 한마디로 전 몇 개월을 버텼습니다. 전화를 한 적은 없지만, 전화를 할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도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날 위로해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힘이 됐습니다. 누나 정말 고마워. 미안해. 결국 전화를 하지 못했네...

다른 하나는 ***입니다. ***도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질문 하나 할 때도 매번 안부 물어봐 주고 이것저것 챙겨다 주고 고마웠습니다. 또 제가 약대 준비할 땐 교재도 빌려 주고 결과 발표 일시도 상기시켜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습니다. 약대 붙으면 맛있는 스시를 사기로 했는데, 결국엔 사지 못하게 됐네요. 고맙고 미안해... 행복하게 지내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Thumbnail Info: <The falling Man(2001)>, Richard Drew, 9/11 테러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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