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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Feb 21. 2016

나는 네가 펑펑 울었으면 좋겠다

너는 하나도 안 괜찮다

 후배와 블로그 서로 이웃이 됐다. 블로그에는 '서로 이웃'이라고 해서 해당 그룹 내 사람들에게만 공개 하는 글을 올릴 수가 있다. 처음에는 이 글을 쓰려고 컴퓨터를 켠 게 아니었는데, 의도치 않게 그녀의 사적인 생각을 읽게 됐다. 그리고 지금은 글을 쓰고 있다. 그 후배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사생활을 읽었다는 죄책감 때문이나, 어쭙잖은 미사여구로 그녀를 위로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후배의 생각을 따라 나도 내 이야기가 하고 싶어 졌을 뿐이다.





후배는 속상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서술한 글의 억울함과는 달리, 속상함을 표현하는 방식은 참으로 논리 정연했다. 그녀의 글은 마치 법원의 형사 사건 판결문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한 주체가 그런 발언을 하게 된 경위를 모두 파악하려 했고, 그 사람을 이해하려 했다. 그럴 수 있다고. 그냥 내가 과민한 거라고. 스스로에게 짐을 지웠다.

보통 억울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앞뒤가 맞지 않고, 사건에 생각보다 과민하게 반응한 자신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후배의 글은 억울함을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 글은 그녀가 이 일에 대해서 얼마나 깊게 생각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바꿔 말하면 후배는 이 아픔을 수없이 곱씹은 것 같았다. 얼마나 씹어댔는지 그 표현은 군더더기가 없고 명확했다. 그런데 표면에는 이빨 자국이 수도 없이 나 있었다. 정제된 표현 속에는 형용할 수 없는 짙은 아픔이 줄줄 배어 나왔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잘못한 일은 없었다. 제삼자의 시각으로 봤을 때 그렇다. 후배를 나무랐던 사람은 또라이라서 그렇고, 그녀를 논리적으로 조곤조곤 제압한 사람은 가끔 그것으로 자신의 지적 우위를 증명하며 으스대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날의 분위기가 후배를 절벽으로 몰아세웠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이러이러해서, 네가 잘못한 일은 없어" 라며 어쭙잖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다. 그녀가 상심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지레 해석한 꼴이기 때문이다. "네 잘못 아니야. 그런데 왜 그렇게 열을 내고 그래? 그러지 마." 하고 달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Bailarina Ensimismada, 61x51 cm, Pastel, Vicente Romero Redondo



세상 사람들 참 야속하다. 좋은 것들은 부지런히 쏙쏙 빼먹고, 책임 지울 일은 호구 몇 명을 찾아 세운다. 때로 호구들은 분풀이의 대상이다. 손가락질을 할 곳을 찾다 보면 약삭빠른 사람들은 다들 어디 가고 항상 그들만 설뚱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란 녀석도 참 야속하다. 나라고 다를 것이 없다. 나는 한 여자를 채 지우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만났다. 매 만남에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너무도 한심했다. 그래서 이별을 고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런 내게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말했다. 겉은 멀쩡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인간관계는 엉망진창이고, 이런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아직 이십대라서, 더 늦기 전에 하나씩 고쳐가고 싶다고 했다. 말은 안 했지만 그래서 너와 이별하려 한다니. 참으로 뻔뻔스러운 말이다.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글썽였다. 나는 나쁜 남자다. 멋진 면도 하나 없으면서 사랑했던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지질한 남자다.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네가 펑펑 울었으면 좋겠다고. 네가 겪은 일은 하나도 괜찮지 않다고. 나는 천하에 나쁜 놈이니까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차마 이렇게 말을 할 순 없었다. 가해자 피해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순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입만 달싹거리다 명동 거리를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반쯤 웃으며 헤어졌다.

평생을 미안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내가 그녀에게 더욱 미안해야 할 것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이 사과를 한다 해도 그녀를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과 메시지는 수신자가 없다. 발신지만 찍혀 있을 뿐이다.



Untitled, 81x65 cm, Pastel, Vicente Romero Redondo


나는 상담을 받는다. 마음이 아파서다. 이렇게 종종 멋대로 튀어나가는 나 자신과 마주하고 싶어서다. 스물다섯 이후로 펑펑 울어본 적이 언제던가. TV 드라마나 영화관에서 펑펑 우는 주인공들을 보며 가끔은 부럽기까지 했다. 언젠가 상담 선생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S 씨, 상담에서 흔히들 우리의 마음은 기차와 같다고 해요.
만약에 S 씨가 계속해서 칙칙폭폭 나가고 있는데, 
그 압력을 분출할 굴뚝이 없잖아요?
그러면 언젠가 굴뚝 아닌 어딘가에서 터져요.

다치게 돼요.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가 있어요.
저는 S 씨 얘기가 듣고 싶어요.
마음을 열어줬으면 좋겠어요.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어쩌면 나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일 수도 있겠다. 펑펑 울지 못하는 사람은 당신뿐만이 아니라, 나도 그렇다. 넌 하나도 안 괜찮다. 나도 그렇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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